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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자를 위하여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양근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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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보인다. 아무리 작은 나무라도 뿌리에서는 물이 오르고 줄기에서는 새싹이 움트고 끝에서는 꽃이 부활한다. 온몸으로 펼쳐 내는 조그만 변화를 지켜볼 때면 나무가 지닌 힘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연은 늘 그런 변화로 우리를 일깨운다. 가지 끝에 달린 열매는 무언가 타이르는 동그란 입모양을 닮았다. 특히 무성한 잎이 산 전체를 가릴 때면 작고 약한 것이 세고 강한 것을 지켜 준다는 역설의 진실도 알게 된다. 나무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창을 바라본다. 창을 통해 바라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무로 보인다. 걸어가는 나무, 이야기하는 나무, 일하는 나무. 쉬는 나무, 때때로 함께 걷는 나무도 보인다. 그럴 때면 창은 나무를 비추고 있는 거울이 된다. 냇가에 서 있는 나무는 물 위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바닷가 나무는 수평선 너머에도 자신과 닮은 나무가 있으리라 꿈꾼다. 방 안의 나무도 가만히 있지만, 몸에서 잎이 돋고 가지가 뻗고 열매를 맺는 듯한 기분에 젖어 든다.
진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사람이 지나다니면서 순간순간 가려졌던 나무다. 창을 통해 바라본 나무는 의연하고 어진 사람처럼 여겨진다. 나무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세상 어디엔가 있다면 마냥 달려가서 그의 손을 잡고 싶다. 참. 힘들기도 할 텐데. 어떻게 4계절 동안 한 번도 몸을 굽히지도, 앉거나 눕지도 않으면서, 내내 몸으로 세월 경전을 읊을까. 밤낮, 눈비, 혹서 가리지 않고….
고개를 숙여 내 손에 쥐어진 펜을 바라본다. 도르래가 굴러가듯 글자를 뽑아내는 길쭉한 펜이 마치 나무처럼 느껴진다. 묵묵히 제 기운을 하얀 종이 위에 달팽이처럼 뽑아내는 펜이지만 엄전하리만큼 꼿꼿하다. 펜은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 서 있을 때만 제 역할을 한다. 서 있을 때만….
그런 나무들이 자(尺)가 된다. 험한 상처가 있어도 나무는 하하 웃는다. 세상 사람들의 온갖 낙인이 옹이로 박혀도 허허 웃는다. 해코지며, 험담이며, 모함마저 붉은 송진으로 녹여 태우며 후후 웃는다. 나무를 지켜보면 땅과 하늘을 잇는 자가 생각나서 ‘나무는 자다’는 말을 자꾸 하고 싶어진다. 침묵으로 세월을 재는 자. 좋은 사람은 그냥 서 있는 나무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더욱 나무 곁으로 다가가고 싶다. 올곧은 나무를 볼 때면 만져 주고 싶다. 만짐으로 내 몸이 제대로 설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실감하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건 내 세월을 잴 무언가를 가지면 한다는 것이다. 꽃잎이 돋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나무 같은 자가 있으면 하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꼿꼿이 서는 나무 같은 것이면 한다.
창밖 나무가 하늘을 건드린다. 하늘에는 둘러친 울타리가 없고 덮인 천정도 없다. 두 눈으로 빤히 보이건만 아무리 찾아 올라가도 모두 오를 수 없다. 오직 나무만이 하늘의 당에 글을 쓴다. 나무라는 글이 사람을 부른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허영의 시장에서 영혼을 파는 자는 언어의 나무를 닮을 수 없다.
나무는 바람이 불면 푸른 종이 된다. 가지마다 매달린 작은 종들이 바람에 술렁술렁 소리를 낸다. 그 소리를 제대로 듣는 사람이면 자신의 연필과 볼펜과 컵스가 나무의 이웃임을 알게 된다. 가을이 되어 핏덩이 같은 꽃을 활짝 피우면 단풍나무보다 더 붉은 글이 태어날 것이다. 겨울이 되면 단단한 겨울나무 같은 글이 태어날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몸으로 당신의 벗은 몸을 재시오.”
나무는 눈보라가 치고 바람이 불어도 선 채로 제 일을 한다. 오직 나무만이 그렇다. 그러므로 곧은 펜을 가진 자가 곧은 문인이다. 나무는 사계의 변화를 알려 주긴 하지만 진짜 하는 일은 영혼을 재는 것이다. 어쩌다 눈 무게로 두세 가지를 잃기도 하지만 겨울나무는 어느 때보다 제 몸을 지켜 낸다. 나무가 나무인 이유가 이것이다.
창을 통해 바라보니 나무가 하는 일이 짐작이 간다. 나무가 있어 창이 제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만일 나무가 창에 비치지 않으면 어떨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창은 벽처럼 막막하리라.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처럼 헛헛하리라.
노을빛이 벽을 비추고 열린 창으로 바깥바람이 들어온다. 몸을 문틀에 기대어 밖을 지켜보니 나뭇가지에 늦은 저녁이 걸려 있다. 덕분에 나도 비스무레 나무를 닮는다.
8월이면 가을이 멀잖다. 겨울도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나무는 다음 해 봄이면 다시 싹을 틔우고 더 실한 자가 되어 세상을 잴 것이다. 나무란 꼭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손에 쥔 조그마한 펜 한 자루도 사람을 지키는 나무다. 그것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니 펜의 주인도 창밖의 나무만큼 귀하다 할 것이다. 서 있는 펜을 나무로 바라보는 자만이 진정한 문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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