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머문 자리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구평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조회수7

좋아요0

‘당신이 머문 자리는 아름답습니다.’
어느 휴게소 화장실 소변기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음속에 새겨 두고 여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싶은 문구다. 잠시 머무른 사람들 중 더러는 아름답지 않게 그 자리를 떠났기에 그 글귀가 대신 악취를 맡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을 심안으로 살피면 머물렀던 자리가 떠난 후에도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까.
우리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는 그냥 지나치기 아쉬운 호수가 있다. 산골짜기마다 흘러 내려오는 맑은 물이 어우러져 머무르는 호수다. 하늘과 주변 산을 미리 담아 두고, 뜨는 해와 달과 별과 변화를 부리는 구름까지도 담는다. 또한 지나가는 이들의 마음이 드리우는 곳이기도 하다. 그 호수를 싸고 도는 굽이진 외길을 따라가다 보면 호수 안으로 파고든 산자락이 있다. 앞서 가던 바위 일부가 물에 잠기고 뒤따라가던 소나무, 굴참나무가 멈춰 서 있다. 산새도 날고 물오리도 돌아가는 곳이다.
언제인가 나도 쉬어 가려고 그곳에 머물렀다. 맨 앞 바위보다 한 발짝만 앞서 맑은 호수에 발을 담그고 싶었다. 그런데 나무들 사이로 깊숙이 들어서자 발길을 주춤거리게 하는 게 있었다. 누군가가 버리고 간 쓰레기를 들고양이가 헤쳐 놓았나 보다. 비닐 조각이 너풀거리고 빈 깡통들이 나뒹군다. 누군가가 잠시 머문 자리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돌무더기 위에 철판이 엇갈려 얹혀 있다. 그뿐이 아니다. 어딘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는 역겨운 냄새는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당신들이 즐겨 머무른 자리는 분명 다른 이들도 머물고 싶은 곳일 터인데, 그 자리가 왜 이리 아름답지 아니할까.
여름 휴가철이 되면 계곡 안은 텐트촌이 된다. 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고 온 3대 가족 나들이를 보면 정겨운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들이 머물렀던 어느 자리는 그리 아름답지가 않다. ‘쓰레기는 되가져 갑시다’라고 쓴 현수막 아래에 온갖 오물이 다 버려져 있다. 아무 데나 버리는 습관이 대대로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면 어쩌나 싶다. 계곡에 버려진 쓰레기는 이끼로 개울을 시퍼렇게 멍들이고, 맑은 계곡은 그들이 떠난 후 한동안 심한 몸살을 앓아야 한다.
얼마 전 청남대가 주민에게 되돌아왔다. 청남대를 조성할 당시 대통령이 지금 청남대가 있는 근처에 갔다가 ‘이런 곳에 쉼터가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걸’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수행원이 앞장서서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든 게 지금의 대통령 별장이라는 일화가 있다. 더구나 주민들에게는 삶에 보탬이 되는 시설이 들어선다는 사실과 다른 말로 달랬다고 한다. 그로부터 20여 년간 접근조차 금지되는 구역이 되고 말았다. 그 후 역대 대통령들은 그곳에 잠깐씩 머물고 갔지만, 주민들의 원성은 늘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이라크 전쟁 후 드러난 후세인 궁전들을 보고 그가 머문 자리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히틀러가 어지럽혀 놓은 아우슈비츠는 정신병자 아니고는 상상이 되지 않는 역사 현장 아닌가.
세상에 빛을 남기고 간 사람들이 머문 자리는 후일에도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 주고 한층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반면 세상을 흠집 낸 이들이 머문 자리는 우리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게 한다. 사는 동안 마음밭에 아름다운 씨를 뿌리고 거두고 떠난 그 자리는 후일에도 아름다운 명소가 되어 있다.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마을 어귀에 한 아낙의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가난한 살림에 노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불구가 된 지아비 몫까지 다하다 간 효부를 기린 비다. 머리에는 밤새워 빚은 떡을 이고, 등에는 젖먹이 아이를 들쳐 업고 길바닥에 세월을 묻으며 마을 사람들 마음속에 아름답게 살다 간 여인이다. 반세기가 지나 그 후손들과 마을 사람들이 뜻을 모아 그 여인이 생전에 머무르던 자리 근처에다 흔적을 되살려 놓았다고 한다. 그 비가 서 있는 면적이라야 서너 평 남짓하지만, 비문에 담긴 효심과 사랑을 풀어놓으면 더없이 아름답고 넓은 들녘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 같다.
한 세상 머무르다 간 자리가 떠난 후 이렇게 아름다우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떻게 머무르고 있는 것일까. 나를 가장 잘 헤아려 줄 듯한 아내의 마음속에서만이라도 긍정적인 사람으로 자리 잡고 있을까.
김구 선생님이 즐겨 쓰셨다는 글귀가 떠오른다.
“눈 덮인 들판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히지 마라(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오늘 내가 남긴 발자취는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가 될 것이기에(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광고의 제목 광고의 제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