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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츄 카드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관영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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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에서 택시를 탔다. 충남 아산의 모 학교로 ‘학교 시설 안전 인증 심사’를 가는 길이었다.
같은 충청도인 때문일까. 반갑게 맞는 운전기사의 수더분한 말씨가 전혀 어색하질 않다. 나이가 좀 있는 것 같아 물으니, 벌써 일흔셋이란다. 나이 스물에 시작했으니 올해가 벌써 53년째란다. ‘아산 1호 택시 기사’라는 은근한 자랑도 말끝에 꼬리로 붙어 있다.
지난 53년을 한 평이 채 안 되는 비좁은 택시 안에서 하루 평균 15시간가량을 보낸다고 했다. 평일엔 개인 영업 시간을 갖고 휴무 날에는 인근 주민센터에서 무료 운행 봉사를 한다고 했다.
나이도 어지간한데 젊은 사람들한테나 하라고 하지 그러느냐고 했더니, 자기가 ‘바르게살기협의회’ 회장이란다. 안 맡으려고 했는데, 자기밖에 없다고들 자꾸 맡으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맡은 거라고 말하는 입가에 잔잔한 웃음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봉사란 게 별거 있남유? 그저 좀 더 행팬이 못헌 사람한테 눈꼽맨큼 이래두 눈길을 두는 거쥬.”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뿐만이 아니다. 그의 택시에는 남다른 뭔가가 있다. 꽁무니에 태극기가 달린 것이다. 그런데 트렁크 안에는 여분이 50여 장이나 더 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많으냐니까, 하는 말이 운행 중에 태극기가 더러워지면 바꿔 달기 위해서란다.
혹시 보훈 가족이냐는 내 말에 차내 백미러로 한심하다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 끝에 또 이런 말을 매달아 놓는다.
“아, 태극기란 게 꼭 보훈 가족만 아끼는 거유? 이쁘잖어유. 세상에 우리 태극기만큼 이쁜 게 어딨슈? 이걸 꽁무니에 매달고 다니면, 얼마나 멋있어유? 태극긴 나라 얼굴이잖유. 그렁께 태극기 사랑이 나라 사랑아뉴?”
그러나 정말 놀란 것은 버츄 카드(virtue card)였다.
벌써 13년이나 됐다고 했다. 지난 13년 동안 그는 자기 차를 타는 손님들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버츄 카드를 한 장씩 선물했다고 했다.
쉰두 장으로 구성된 이 카드는 ‘감사, 배려, 봉사, 이해, 존중’ 등 우리네 마음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좋은 문구가 적혀 있는, 이를테면 ‘희망’ 카드다. 모두 좋은 내용뿐이라서 누구에게나 기분 좋은 선물이 틀림없다고 했다. 50년 넘는 세월에 재미난 얘기도 많지 않았겠느냐는 내 말에 그는 말했다.
“1980년대 초닝께 한 30년 됐나 봐유. 이웃에 사는 임산부를 태우고 병원으로 가다가 아, 택시 안에서 나 혼자 아를 받았어유. 옆집에 살던 산모였는데, 예전엔 넓은 도로가 없다 보니 덜컹거리구, 시간두 꽤 걸렸지유. 그래서 양수가 터지고 만 거지유. 근데 벌써 그 애가 지난해에 장갈 갔어유, 글쎄.”
껄껄 웃으며 덧붙여 말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가 을마나 행복한질 모르는 사람이 태반여유. 아, 두 발루 걷구, 두 눈으루 볼 수 있다는 것만두 을마나 큰 행복인데유. 무슨 일을 하든지 자기 그릇만큼만 담으면 되는 걸, 요즘은 다들 너무 큰 욕심들을 부려 큰일이쥬.”
사실 그도 믿었던 사람에게 배반을 당하고 술과 담배로 지내던 어려운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갑자기 찾아온 암을 가족의 사랑과 배려로 극복할 수 있었다고도 했다.
목적지에 다 도착해서야 그는 내게도 버츄 카드를 한 장 뽑아 보라고 권했다. 나는 눈을 감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 장을 뽑았다. 그런데 거기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합니다. 나 자신도 용서합니다. 나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이 용서를 구하면 그를 받아들입니다. 나는 나의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를 구합니다. 나는 실수로부터 배웁니다. 나에겐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계속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용서라니! 그날 나는 온종일 용서를 생각했다. 수없이 나부끼는 나뭇잎에서 오래 잊고 있던 용서의 얼굴을 보았다. 용서의 마음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아픔은 아픔으로만 머물지 않고, 그 힘으로 새살을 돋게 한다는 생각도 했다. 나무마다 한 잎 또 한 잎 자신의 몸을 잉태하는 아산의 봄내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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