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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푸른 금고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현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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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 염상섭의 소설 「두 파산」을 읽었던 기억이 있다. ‘두 파산’은 광복 직후 경제적, 도덕적 가치의 혼란 속에서 살아간 정례 모친의 물질적인 파산과 고리대금업을 했던 김옥임과 교장의 정신적인 파산을 의미한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본 기사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31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한 영국 여성이 8년 만에 모든 돈을 탕진하고 이혼했다. 부모님의 유산을 도박과 유흥으로 허비한 남성이 절도범이 된 사연도 있었다. 이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보증할 거라고 믿었겠지만, 그리 오래가지 않아 물거품이 돼버렸다. 돈이 많으면 삶을 보다 편안하고 자유롭게 살 수 있겠지만, 삶을 지탱하는 것은 정신적인 부분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었다.
2년 전, 친정아버지의 삼우제를 마친 후, 우리 가족은 집에 돌아와 유품 정리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흔적이 묻은 옷, 아끼고 아끼느라 한 번도 입지 못한 양복, 신발 등을 정리하고 마지막 유품인 푸른 금고 앞에 모였다. 40년의 세월이 묻어 있는 금고는 쉽게 열리지 않았다. 가족들의 생일, 핸드폰 뒷자리 등 의미 있는 숫자들을 조합하며 몇 번이나 번호를 눌렀지만 금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결국 우리는 금고를 박살 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52년을 함께 산 엄마한테도 금고의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호기심 많은 엄마는 금고 안이 얼마나 궁금하셨을까.
푸른 금고에는 오만 원짜리 지폐 몇 장과 600만 원짜리 적금 통장이 있었다. 경제권이 엄마에게 있었고, 아버지는 본업 외의 부수입이 들어오더라도 엄마를 위해 돈을 거의 다 쓰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비상금에 관하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금고 속 돈을 보니 몇 시간 전 국립 임실 호국원의 하늘 공원 게시판에 붙어 있었던 엽서 내용이 생각났다.
“아버님! 하늘에서도 잘 계시지요? 아버님의 유산 덕분에 우리 가족은 아주 잘 살고 있습니다. 돈을 많이 남겨 주셔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오겠습니다.”
어떤 사위가 돌아가신 장인어른께 썼던 글이다. 그 당시에, 나는 엽서를 읽고, 그 어르신은 자식들에게 얼마나 많은 재산을 남기고 가셨는지 궁금했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남기고 간 금고 안을 들여다본 순간 깨달았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금고 속의 돈이 아니라, 그 금고를 열기까지의 삶의 흔적을 남기고 가셨다는 것을. 아버지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평생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하며 살아오셨다.
나는 배우 정동환이 KBS 1TV <아침마당>에 출연해, 학비를 벌기 위해 월남전에 참전했다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라를 위해 국방의 의무를 다했겠지만, 당시 먹고살기가 어려워 자발적으로 참전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친정아버지도 월남전에 참전하여 번 돈으로 친할머니께 방앗간과 소 몇 마리를 사드렸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8남매의 장남으로서 기둥 역할을 하셨을 것이다. 내가 어릴 적, 부모님은 인삼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피땀 흘려 정성과 노력으로 재배했던 4년근 인삼을 출하하기 직전, 큰 수해(水害)를 입었다. 아버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인삼 몇 뿌리라도 건져 보려고 물속에 들어갔지만, 급물살에 모두 떠내려가는 인삼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런 큰일을 겪었음에도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삶을 포기하지 않고 보일러 시공, 과일 장사 등 온갖 일을 하셨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즈음, 아버지는 공무원이 되셨다. 공무원의 박봉에도 우리 삼 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보내 주셨다. 정년퇴직 후에도 일을 멈추지 않으셨다. 카이로프랙틱 자격증을 따시고 일흔 중반까지 일을 하셨다. 삶을 지탱하는 힘은 물질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평생 몸소 보여주셨다.
엄마 지인 중 어떤 분은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해 집을 팔거나 빚을 지는 ‘의료 파산’을 했다. 아버지는 중환자실에 계셨을 때, 혹시 엄마가 병원비 걱정을 하실까 봐 금고 안에 돈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세 차례의 수술을 받은 후, 스무 날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나셨다. 장례식을 치르고 남은 돈으로 병원비를 모두 낼 수 있었다.
엄마는 지금도 “니네 아빠가 우리한테 돈 걱정 안 시키려고 그렇게 빨리 세상을 떠났나 갑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버지는 많은 돈을 우리에게 남기지 않으셨지만, 누구보다 값진 유산을 주셨다. 삶을 살아가는 태도, 성실함, 그리고 끝없는 배움의 자세.
우리 사회는 빠르게 변한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 더 높은 지위를 원한다. 그러나 돈이 많아도 삶의 방향을 잃게 되면 머지않아 정신적 파산에 이른다. 물질적으로 많이 갖고 있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풍요롭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된 유산이라는 생각이 든다.
박살이 난 푸른 금고 안에서 마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헝그리 정신이 부족혀. 우리 땐 가난하고 굶주려서 죽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먹고 살았어도, 못 배웠어도 어떻게든 먹고 살려고 별스러운 일 다 하면서 살았는디, 뭐가 부족해서 힘들다고 목숨을 끊어. 정신머리가 썩어 버렸당게.”
정직하게 살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 그것이야말로 아버지가 푸른 금고에 남기고 싶었던 값진 유산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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