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스텔로 짐을 옮긴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현관문을 열자 문 안쪽에 붙여 두었던 메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생백, 랩…. 며칠째 계속 사야지, 사야지 하면서 까먹었던 것들이었다. 한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왜 그렇게 많은지. 기현은 잠시 인터넷으로 주문할까 했지만 부서 회식에서 먹은 기름진 음식도 소화시킬 겸 그대로 발길을 돌려 근처에 있는 대
- 김서연(인천)
오피스텔로 짐을 옮긴 후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현관문을 열자 문 안쪽에 붙여 두었던 메모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생백, 랩…. 며칠째 계속 사야지, 사야지 하면서 까먹었던 것들이었다. 한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건 왜 그렇게 많은지. 기현은 잠시 인터넷으로 주문할까 했지만 부서 회식에서 먹은 기름진 음식도 소화시킬 겸 그대로 발길을 돌려 근처에 있는 대
회사 지입차 형태로 직영 인부 10여 명을 수송한다. 12인승 봉고 승합차 기사 박두호 씨, 아침에 인부들을 내려주고 나면 그는 딱히 할 일이 없다. 해서 현장 곳곳을 쑤시고 다니며 무료한 시간을 최대한 무료하지 않게 보내려고 나름 애를 쓴다.새참 준비에 여념 없는 함바에 미리 가서 죽 치고 앉아 함바 종업원들과 노닥거리는가 하면 콘크리트 타설 작업이 한창
마흔다섯 살 노총각인 나의 요즘 관심사는 결혼이다. 그건 관심사라기보다는 어쩌면 거역할 수 없는 나의 굴레와도 같다. 4남매의 장남이자 장손인 나를 부모님은 이틀이 멀다 하고 며느리 될 여자 하나 데려오라고 닥달하는 통에 나는 늘 스트레스를 달고 산다.사실 요즘 결혼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지만 젊은이들은 결혼에 목매달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건 해
타자는 인간이 탈을 쓰도록 유혹한다. 인간은 본연의 사악을 감추려고 천사의 얼굴을 빌린다. 악인은 그럴싸한 미소 뒤에 비수를 숨긴 채 다가온다. 하회 양반탈처럼 넉살 좋은 웃음에 가려진 속내를 선량한 이들이 꿰뚫어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강단 앞에서 강론을 펼치는 일부 성직자조차, 금기의 벽 뒤에서 쾌락과 돈을 탐닉하는 시대다. 선인의 탈을 쓴 채 악행과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난 열차 안은 한산했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나는 흔들리는 손잡이에 체중을 의지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수확을 끝낸 빈 땅들이 보이는가 싶더니 울긋불긋 원색으로 물든 나지막한 야산, 그리고 은빛 억새들까지. 가을의 조각들이 빠르게 점멸하듯 지나갔다.구파발역 안내방송이 나오고, 마침 내리는 승객이 있어 바로 그 자
잠결에 무슨 소리가 들렸다. 굵은 빗줄기를 퍼부어 땅바닥을 때리는 소리 같았다. 다시 눈을 감았으나 잠은 짧고 생각은 깊었다. 무슨 꿈을 꾸었는지 모르는 사람의 잔영만 어른거렸다. 몸과 정신이 엎치락뒤치락했어도 살아있음을 인식하는 나, 몸뚱이와 의식은 말짱했다.나는 홑이불을 슬며시 빠져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바깥은 캄캄했으나 어둠을
1. 서론_ 세계 앞에 머무르는 언어를 위하여문학을 읽는 일은 작품을 해석하는 행위에 앞서 세계를 대하는 태도를 배우는 과정이다.특히 시를 읽는 일은 언어 속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데 머물지 않고, 존재와 마주하는 자세를 스스로 점검하는 데 있다.이 논고는 그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오늘날 시 읽기는 개념적 해석과 이론적 분류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
때_ 현대등장인물_ 오해결(진행 교수, 즉문직답 인생 코치)|필봉(77세, 가부장적이고 강압적인 노인, 음식점 운영)|애심(71세, 필봉의 아내, 참고 참다가 입을 닫아버린 시어머니)|며느리(몇 달 동안 서로 말을 하지 않는 시부모 메신저 역할)|퐁당삐리리(고민상담AI, 최첨단 로봇)|고은(청소, 집안일 하기 싫어하는 영식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영식(
바다가 보이는 자산동에 38년째 살고 있다. 바다가 없는 곳에서 살다가 직장 따라 마산에 왔을 때 바다가 잘 보이는 곳으로 방을 구하고 정착했다. 바다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시원했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직장이 이곳과 가까운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바다가 보이는 곳을 떠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이곳은 무학산 아래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이민주!”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함 소리에 놀라 그만 잡고 있던 노를 강에 빠뜨리고 말았다. 오늘은 안 걸릴 줄 알았는데 역시나였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채가듯 콱 붙잡았다.“집에 붙어 있으라고 했제!”“죄송해요, 할머니.”할머니는 몇 번이고 나를 쏘아보며 고함을 잔뜩 지르더니, 여전히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상태로 집으로 걸어갔다.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