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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소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7월 6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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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마로니에 전국 청소년 백일장 <고등부 산문 차상>

 

하얀 이어폰의 줄이 엄마의 손에 걸려 있었다. 반대쪽 손에는 손바닥만 한 MP3가 들려 있었다. 귀에 이어폰을 꽂은 엄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엄마는 귀를 통해 숲을, 오래된 추억을, 삶을 느끼고 있었다.
두껍고 어두운 헤드폰과 커다란 구형 수음기, 그리고 이름 모를 장비들을 가방에 넣은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머리를 크고 거친 손으로 헝클인 아빠가 거실에 있을 엄마에게 무어라 소리쳤다. 맥락상 다녀오겠다는 말일 것이었다. 귀에서 이어폰을 빼면서 현관으로 온 엄마가 작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아빠는 익숙하게 그 두 손을 잡아 자기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차례대로 이마, 눈, 코, 귀, 입을 만진 엄마가 손을 내렸다. 입가에 미소를 건 엄마가 아빠에게 말했다. 잘 다녀오라고. 짐을 챙긴 아빠는 내게 손을 흔들어 준 후 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이 왜인지 신이 나 보이기도, 행복해 보이기도 했다. 아내와 딸을 두고 혼자 나가는 게 그렇게 좋을 일인가 싶었다.
아빠는 숲의 소리를 채집하는 일을 한다. 오로지 숲에서 나는 소리만. 바람이 불어서 나는 나뭇잎의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와 같은 소리 말이다. 평일에는 소리를 채집하고, 주말에는 막노동을 하는 아빠는 늘 몸에 상처를 달고 있었다. 숲이 만든 풀에 베인 붉은 상처도 있었지만, 철제나 돌 같은 걸 옮기면서 생긴 숲이 만들지 않은 상처도 있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 주말까지 일을 하는 것도, 그 일이 막노동인 것도. 엄마는 그런 아빠가 좋다고 했지만, 나는 엄마가 아빠의 상처들을, 흉터들을 보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엄마는 아빠가 아니라, 아빠가 가지고 오는 숲의 소리를 녹음한 녹음본을 좋아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보지 못하게 되면서 엄마의 세상에는 그 숲의 소리가 담긴 MP3만이 남았으니까.
엄마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건 나 때문이었다. 내가 놀러 가자고 해서, 내가 엄마를 조르다가 차도로 넘어져서, 내가 달려오는 차를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있어서. 그래서 엄마는 시력을 잃었고, 나는 청력을 잃었다. 숲 전문 사진가이던 엄마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소리가 사라진 나의 세상에는 그날 엄마가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이 절대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다. 엄마는 그날부터 말을 잘 하지 않았고, 아빠의 오래된 MP3와 유선 이어폰만 가지고 살았다. 더 이상 볼 수 없는 숲의 모습을 귀로 느끼면서.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숲의 소리를 녹음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날은 오랜만에 병원에 다녀오는 날이었다. 엄마는 병원에 다녀오고 나면 우울감이 심해지는지 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 하루 종일, 밥도 먹지 않고 MP3로 숲을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아빠가 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게 다였다. 다음 날에는 나올 줄 알았던 엄마가 나오지 않았고, 그게 이틀이나 지속되었다. 나는 문득 두려운 마음에 엄마가 잠근 방의 문을 열었다. 엄마는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져서 엄마에게 달려가 엄마를 흔들었다. 엄마는 누구인지 찾기 위해 손을 뻗었고,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나는 엄마의 손 위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차례대로 이마, 눈, 코, 귀, 입을 만진 엄마는 나임을 확인하고 손을 내렸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아빠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빠는 MP3를 만지작거리다가 내려놓고 품에서 사진 하나를 꺼냈다. 사진 속에는 숲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나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엄마가 찍은 걸 표시하고 싶었는지 끄트머리에 ‘PHOTO BY. J’라고 쓰여 있었다. 아빠는 내가 볼 수 있게끔 아주 천천히
“엄마는 숲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야. 살기 위해 숲에서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버티는 거야.”
라고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보자, 아빠의 목소리를 들은 건지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엄마는 살기 위해 숲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아빠는 그런 엄마를 살리기 위해 숲에서 소리를 담아 왔다는 것을. 둘 다 숲을 통해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결국 나는 투박한 아빠의 토닥임을 느끼며, 엄마의 품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하얀 이어폰과 손바닥만 한 MP3를 들고 엄마에게 갔다. 엄마는 앨범을 손으로 쓰다듬고 있었다. 엄마의 귀에 이어폰을 꽂아 주고 앨범을 펼쳤다. 엄마는 숲을, 오래된 추억을, 삶을 느꼈고, 나는 앨범 속 사진을 하나하나 천천히 눈에 담았다. 숲을 통해 살아가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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