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스마트폰으로 혼밥하는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집 인근 공공기관 식당의 메뉴가 먹을 만하다고 입소문이 자자해 예전에 아내와 한 번 식사했던 곳이다. 아내는 저녁을 먹고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인 구립스포츠센터에 수영하러 가던 길이었다. 식반에는 밥과 동태콩나물국, 계란말이, 김치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최애 메뉴
- 최효찬
아내가 스마트폰으로 혼밥하는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집 인근 공공기관 식당의 메뉴가 먹을 만하다고 입소문이 자자해 예전에 아내와 한 번 식사했던 곳이다. 아내는 저녁을 먹고 걸어서 5분 정도 거리인 구립스포츠센터에 수영하러 가던 길이었다. 식반에는 밥과 동태콩나물국, 계란말이, 김치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계란말이와 최애 메뉴
지중해 크루즈 여행 3일째 되는 날, 우리 일행은 스페인의 북동쪽 끝에 위치한 바르셀로나 여행을 시작했다. 배에서 잠을 자고 매일 새로운 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크루즈 여행만의 장점이 아닐 수 없다. 20여 년 전 미국 시애틀에서 출발하여 알래스카까지 크루즈 여행을 다녀온 나로서는 이번 여행도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들뜬 마음으로 시작했다. 바로 전날 다녀
비틀거리며 시작하는/ 갓난아기의 작은 발걸음/ 되돌아오는 추위를 막아서서/ 어린 새봄을 지킨다/ 가진 것은 여린 솜털뿐이지만/ 봄을 덮어 온기를 간직한다(「노루귀」 전문) 무엇 하러 다녀오던 길이었는지 잊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산어귀에 핀 노루귀 한 송이를 봤다. 이천 년대 초 지리산 성제봉 활공장에서 내려오던 길이었다.가슴에 작은 불길 하나가
손자가 갖고 놀던 풍선이 집 안 곳곳을 굴러다닌다. 고사리 손놀림의 기억 때문에 쉽사리 치워버리지 못하던 중이다. 꽤 여러 날이 지나도 뾰족한 물체에 스치지 않은 탓으로 적당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신기하다. 손자의 체취가 풍선에 서려 있는 듯해서 수시로 눈맞춤을 이어간다. 거기다가 색색의 모양새이니 싫증도 없을뿐더러 굳이 치울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숨
먹을 수 없으면 죽을 수 있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그리고 깊게 생각하는 일이 있었다. 건강했던 P는 밥을 먹을 수 없어 응급상황이 발생했다. 점점 식욕이 없고(어쩌면 거식증일지도) 의욕도 사라지니 체중이 눈에 띄게 줄었다. 병원에서 촘촘하게 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영양제 처방과 음식을 먹으려고 노력하라는 의사 소견이 있었다. 그러나
굴뚝 끝에 고추잠자리 하나처마 끝엔 뽀얀 무명 한 자락 한낮 고요 속에 눈길 팔다가 문득 소박한 얼굴이 살아난다. 언제나 봐도 들꽃처럼 수수하고 햇살 내려앉은 옹기처럼 실팍한 그녀다. 뜸하게 마주쳐도 변덕스러운 사심이 들랑거리지 않아 편하다. 우린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무던하게 흘러간다. 투박한 오지 아낙처럼 사람다운 품새에 반할 만하면
나는 40년을 병원에서 일해 온 간호사다. 수술실과 중환자실, 응급실을 거치며 환자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은 셀 수 없이 보았고, 피와 통증, 두려움이 가득한 병원의 풍경도 담담하게 넘길 정도의 연륜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치과만 가면 내 마음이 작아지는 것은 물론이며 두렵고 긴장까지 하게 된다. 드르르 울리는 기계 소리만 들어도 어깨가 굳고,
두바이 쫀득 쿠키(이하 두쫀쿠)라던가? 갑자기 ‘두쫀쿠’ 열풍이 거세게 부는가 했더니 이번엔 또 봄동나물비빔밥이란다. 재미있는 건 외국인들까지 덩달아 우리의 유행에 춤을 추는 모양이다. 한류의 영향이지 싶다. 참 대단한 한류다. 이제 적지 않은 외국인이 우리의 새로운 시도와 우리의 작은 변화마저도 시차 없이 동시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니 말이다.내게 유행이란
바쁜 하루를 끝내고 식구들과 마주 앉은 저녁상 위로 거실의 TV가 거친 소식들을 쉼 없이 내뱉고 있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함께 진행한 이란 공격으로 화면 속 뉴스는 온통 중동의 포연으로 가득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에 대한 무차별 공습,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 그리고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절규하는 선량한 사람들의 표정들이 밥상머
오랜 세월 서울의 단독주택에 살았다. 도시 재개발로 이곳 수지의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도 차마 주부로서 버리지 못하고 데리고 왔던 항아리가 꽤 있었다. 그걸 오랫동안 몇 년을 끌어안고 살다가 미련 없이 남의 집으로 보내버렸다. 사람도 늙어서 갈 때가 되었는데 이 항아리가 다 무슨 소용일까 싶어서다.장위동 단독주택에 살 때는 장독대에 올망졸망 항아리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