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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두렁길과 떡 두 덩이

한국문인협회 로고 허문정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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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 두 덩이가 든 가방을 메고 논두렁길을 걷는다. 쌀밥 한 번 실컷 먹는 것이 소원이던 시대를 건너온 나에게는 이보다 더 배부르고 흐뭇한 순간이 있을까. 한데 황금물결을 이루어야 할 들판이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잘라 놓은 시루떡처럼 반듯반듯한 논에는 벼 대신 잔디가 자란다. 마을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일손이 부족하고 쌀 수요도 점점 줄어 대체 작물로 잔디를 심었다니 내 미약한 힘으로 어쩌랴. 지난날 걷기만 해도 풍요롭고 구수함이 느껴지던 논두렁길은 마음속 풍경으로나 남겨 둬야 할 것 같다.
광주에서 모임이 있었다. 참석 인원이 많지 않은데도 마음 후덕하신 분이 찰떡과 메떡 두 박스나 해 오셨다. 당장 한 입 떼어 먹고 싶었지만 떡을 먹으면 점심 식사를 맛있게 못 한다며 각자 나눠 가졌다. 돌아오는 버스에서 기사님께 한 덩이 드리려고 했으나 보는 눈이 여럿이라 그러지 못했다. 전에 드렸을 때는 무척 좋아하셨는데. 가방에 큼지막한 떡이 두 덩이나 들어서인지 어깨가 제법 무겁다. 한창 때 같으면 순식간에 먹어 치우겠지만 지금은 배가 든든하고 그럴 체면도 아니다. 집에 가서 남편과 나눠 먹을 생각이다.
유난히 떡을 좋아해서 ‘떡순이’ ‘떡보’로 불리던 유년에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 떡인 줄 알았다. 우리 집은 명절에도 떡을 해 먹을 형편이 못 되었는데 설날 방앗간에서 흰 가래떡을 빼 가는 사람들이 무척 부러웠다. 집이 방앗간 근처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주머니들이 잘 보였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지켜보았는데 어쩌다 눈이 마주쳐 한 가닥 집어 주면 책상 서랍에 감춰 두고 한 입 한 입 아껴 먹었다. 가끔 생일을 쇠거나 제사를 지낸 집에서 떡을 한 접시씩 갖다 주었는데 난 그게 좋아서 내 생일이나 우리 제사보다 남의 집 생일과 제사가 더 기다려졌다. 떡이 생기는 날 할머니가 안 계시면 안달이 났다. 할머니보다 먼저 손을 댔다가는 혼쭐이 나기 때문이다. 숫기는 없었지만 마을에 상량식이 있으면 떡 얻어 먹을 욕심에 빠지지 않고 달려갔다. 그날은 꼬챙이에 수수경단 대여섯 개씩 꽂은 걸 하나씩 나눠 줬다. 그 꿀맛 같은 떡, 어서 부자가 되어 실컷 해 먹어야지 했는데 막상 어른이 되고 떡을 해 먹을 형편이 되니 아이들 식성에 맞추느라 빵을 더 가까이 하며 살았다.
여학생 때는 학교까지 4Km 되는 길을 걸어서 다녔는데 아랫동네에 또래 친구가 있었다. 둘은 지름길로 가느라 종종 논두렁길을 걷고 야산을 넘었는데 운동화가 아침 이슬에 채여 누렇게 흙물이 들고 흠뻑 젖기 일쑤였다. 하루는 돌아오는 길에 둘이 나눠 먹으려고 길섶에 떡을 묻어 두었는데 갑작스레 비가 쏟아졌다. 부득이 버스를 타야 했지만 묻어 둔 떡을 포기할 수 없었다. 비를 함빡 맞으며 떡을 먹는데 머리카락과 교복이 몸에 착 달라붙어 참으로 민망한 몰골이 되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떡을 먹는데 왜 그리 웃음이 쏟아지던지. 비에 젖은 떡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싱그럽고 행복하기만 했다.
간혹 내가 떡을 좋아한다고 하면 촌스럽다고 하는 친구가 있다. 하지만 나는 떡만큼 좋은 음식이 없는 것 같다. 특히 나이 든 사람들한테는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하며 부드러운 게 안성맞춤이다. 영양은 물론 오래전부터 먹어 온 정감에 추억이 깃든 음식 아닌가. 여기 마을회관에서는 떡을 종종 해 먹는다. 어르신들 누구나 좋아하고 여럿이 나눠 먹기에도 이만한 음식이 없다. 더구나 요즘은 모양도 다양하고 예뻐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할 만한 우리 음식이다. 떡을 전혀 입에 대지도 않던 남편도 술 담배를 끊고부터는 헛헛한지 제법 잘 먹는다.
이십여 분 걸었을까. 그 짧은 시간에도 꼬리를 물고 떠오르는 상념들, 몇 트럭은 됨직한 추억을 삼단우산처럼 접었다 폈다 하다 보니 멀리 우리 집이 보인다. 어둔 밤 마중 나오던 어머니의 호야등 불빛처럼 지그시 나를 바라보는 우리 집. 어서 오라고 반기는데 우리 마을은 광주시와 장성군의 경계에 있고 행정구역상 장성군에 속해 광주 시내버스가 닿지 않는다. 해서 광주에 다녀오려면 오늘처럼 광주 시내버스 종점에 내려 논두렁길을 걸어야 한다. 운동 삼아 걸을 만한 거리지만 광주 시내버스가 1Km 남짓 장성 땅을 더 돈다고 해서 무슨 큰 변고라도 생기는 건지. 가을 들판처럼 생각이 넓지 못한 행정가들에게 아쉬움이 많다.
점점 감성은 메마르고 큰 웃음 웃을 일 별로 없는 변방살이, 아무리 걸으며 살펴봐도 예전처럼 길섶에 떡을 묻어 둘 곳도 깔깔대며 웃어 줄 젊은 친구도 없다. 논두렁 자투리땅도 아까워 다문다문 콩을 심은 흔적도 보이지 않고, “어이 학생, 밥 좀 먹고 가!” 하며 손 흔들던 따뜻한 인심도 사라졌다. 이 논두렁길도 머잖아 잡초밭이 될지 모른다. 그래도 투명한 바람과 맑은 소리로 날아가는 새들과 조우하고, 사방이 푸름으로 에워싼 곳에서 텃밭 일구며 초록 풀잎의 신선함을 만끽하니 감사한 일 아닌가. 적적하지만 비우고 비워 마음 푸근해진 생의 후반부, 그래도 가난했던 가방에 커다란 떡을 두 덩이나 담아 들었으니 나는 부자다. 어서 걸음 재촉해 집에 가면 더 포근포근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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