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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지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외남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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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구름이 드리운 11월. 목화밭으로 향한다. 가을걷이도 마무리된 들녘을 바라본다. 읍내 쪽으로 뻗어 나간 길 끝을 보며 땅바닥에 퍼져 앉았다. 설움이 목구멍을 타 넘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절규로 변했다. 언니야! 언니야! 그 절규가 허공이 삼켜 버렸다.
불과 몇 시간 전 언니는 빨강 치마 노랑 저고리를 입고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울며 차에 올라 시집을 갔다. “힘들더라도 고집 피우지 말고 엄마 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 한다”면서 꼈던 가락지를 내 손가락에 끼워 주며 그 손가락에 결혼 예물 쌍가락지 끼고 집 안팎을 한 바퀴 휙 둘러보고는 떠났다.
집안 대소간에 다 모여서 온 마당이 북적이다가 다들 되돌아갔다. 대소쿠리 옆에 끼고 하얗게 핀 목화를 따러 나섰다. 큰머슴같이 일하던 언니를 떠나보내면서 엄마와 아버지는 얼마나 서운했을까? 할아버지가 신행길에 같이 가셨고 아버지는 사랑방에 엄마는 안방에 문을 닫고 들어가시는 걸 보고 울적해서 나온 길이다. 아직 농사일도 잘 못한다. 더더구나 밥도 혼자서는 제대로 못 익힌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들이 너무 벅차다. 상일꾼이던 언니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산나물도 캐고 쑥도 뜯었다. 논이면 논, 밭이면 밭, 언덕배기 과수원까지 앞바퀴가 가면 뒷바퀴가 따라가듯 그렇게 늘 밭일 들일 과수원일 집안일을 했었는데….
언니의 하던 일을 고스란히 맡게 되어 두렵고 또 설움이 북받쳐 목화밭 고랑에 퍼질러 앉아서 끄윽 끅 소리 나게 울었다. 집안 아줌마들은 “큰머슴이 나가면 작은머슴이 다 한다”며 위로인지 덕담인지 나를 두고 한 말이 귀를 후빈다.
막막하기만 하다. 그렇게 언니를 떠나보내고 작은머슴이 큰머슴 다 되었다. 하얀 사과꽃이 지고 씨방이 자라서 사과가 새알만큼 굵어졌다. 놉을 들여 적과를 했다. 뻐꾸기는 긴긴 오월 산천에서 피를 토하듯이 울고 점심을 먹고 난 후면 젊은 잠이 쏟아지는데도 그 달콤한 낮잠 한숨 못 잤다.
어느 날 한 차례 잠깐 쉰다는 것이 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자 버렸다. 장에 갔다 오신 아버지는 “이놈의 가시나, 인부들 데려 일 시켰더니 낮잠이나 자빠져 자고 잘한다”면서 노발대발이셨다. 무안도 하고 골도 났다.
“하도 졸려서 좀 자고 하면 일도 갑절로 되는데 뭘 그러세요. 그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요.”
도리어 골을 내며 그때부터 농땡이를 부렸다. 아버지는 애가 탔다. 과일은 날로 굵어지는데 굵기 전에 어서 적과해야 하는데 빈둥거리니까 “저 계집애한테 일 시키려면 절대로 입대면 안 돼. 하던 일도 안 한다니까”면서 혀를 껄껄 찼다. 또 덧붙였다.
“저 계집애는 골대기가 세어서 절대 맏이한테는 시집 못 보낼 거다.”
날만 새면 일 구덩이, 보리 타작, 모내기, 김매기, 사과 따기, 얼굴은 새카맣게 탔다. 머슴 뒤를 따라다니는 조부 노릇도 비가 오지 않으면 쉴 틈이라곤 없다. 내 성질을 건드리면 재미없다는 걸 아는지라 아버지도 간섭은 하지 않았다. 외고집 하나가 무언가를 획득한 셈이다. 그리고 ‘부당함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다’라는 외고집이 달라붙었다.
유월 모내기를 하고 난 후 언니가 내 손에 끼워 준 하얀 가락지를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다. 빈 손가락에 늘 눈이 간다.
초록으로 꿈틀대던 논들이 황금 들녘으로 변했다. 오동통 살 오른 메뚜기를 잡아 삼베주머니에 넣고 흔들고 다녔는데 벌써 벼 베고, 콩 꺾고 가을걷이로 분주하다. 벼 걷은 논에는 이모작 논보리를 간다. 얼기 전에 보리 싹이 터야 하기에 볏단은 논둑에 쌓아 둔 채 보리 갈이부터 서둔다. 벼 그루터기 사이로 쟁기로 살살 쟁기질한 고랑에 퇴비를 넣고, 그 위에 보리씨를 뿌리고 고무래로 흙을 부드럽게 쳐 덮어 준다. 한참만 해도 옆구리는 엄청 당긴다.
중3 때 몰래 고교 입시를 치렀다. 대구경북여자고등학교에 합격 통지서가 왔다. 그 일류 학교에 합격했느냐 물어 주는 사람 없고 사흘을 단식 투쟁했지만 내 배만 고팠다. 시골에서 공납금이며 차비며 하숙 시킬 형편도 안 되고 셋방을 얻어 가며 공부시켜 줄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
가을 해는 너무 빨리 진다. 어정거릴 새가 없다. 손바닥에는 물집이 생겼다. 파크 골프 공 치듯 흙덩이를 친다. 솔솔 저녁밥 짓는 연기가 퍼지는 마을 뒷산으로 넘어가는 노을빛이 너무 곱다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반짝 물체 하나가 보인다. 노을빛에 반사된 반짝 물건 하나. 허리를 굽혀 흙덩이 속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어마나 세상에나! 쟁기질한 이랑에 잃어버렸던 가락지가 온 여름 동안 논물 속에 잠겨 있다가 이랑 만드는 골에 변질되지 않은 채 굳은 땅속에서 내 눈에 띈 것이다. 흙속에서 ‘날 꺼내 주세요’ 빛을 발하고 있지 않는가.
우아, 반지다! 손에 쥐고 껑충 높이 뛰었다. 언니가 시집 갈 때 주고 간 가락지를 찾았다. 나를 지켜 줄 언니를 찾은 것이다. 로또 당첨된 것보다 더 큰 확률로 내게 돌아온 그 가락지. 넓고도 넓은 천지에 나에게 인연 되어 나를 떠나지 않으려고 내게 돌아온 가락지.
우연이란 이런 걸까, 인연이라서 이런 걸까, 행운이란 이런 걸까. 힘들 때마다 따듯한 미소로 다독거려 주던 언니를 보는 듯 위로를 삼는다. 상급 학교 진학 못 한 슬픔도 이 반지가 달래 주었고 지치고 힘 빠질 때도 용기를 준 반지다. 이때껏 생의 이정표가 되어 준 이 금속 한 조각이 순금 가락지 못지않게 내게는 지극히 소중하다. 아직도 내 장롱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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