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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방미현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6년 1월 6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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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헤어짐이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헤어짐은 늘 익숙하지 않다. 정들었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못 보게 되어도 아쉽고 허전한데, 하물며 가까운 사람이 다시는 볼 수 없는 생의 반대편으로 떠나간다면 그 이별은 슬픔이 겹겹이 쌓인 고통임을 말해 무엇할까.
새해가 되어 시댁에 인사하러 갔다 작은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얘기를 듣고 시댁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작은어머니는 안방 넓은 침대 한 귀퉁이에서 미동도 없이 주무시듯 계시고, 바닥에 앉아 곁을 지키는 작은아버지는 오랫동안 계속된 수면 부족과 마음고생으로 무척 수척해 보이셨다.
“벌써 48시간 수면 상태야. 곡기를 끊은 지 보름째인데 아직도 비워내야 하는 게 남았는지…. 병원에서 영양제라도 맞으면 일주일은 더 살겠지. 하지만 그게 뭔 의미가 있나? 다리 좀 보게. 이게 사람 다리인가?”
작은아버지가 이불을 걷고 보여 주는 작은어머니의 다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하기만 했다. 작은어머니는 당뇨 합병증이 눈으로 와서 고생하다 대장암까지 재발해서 항암 치료를 받고 있었는데 그동안 잘 견디시는 것 같았다. 몇 달 전,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과 함께 찾아갔을 때만 해도 직접 식사 준비는 할 정도였는지 장조카와 질부에게 밥 한 끼 해 먹이고 싶다고 주방에 들어가시려는 걸 간신히 말렸었다. 밥을 못 먹인 게 마음에 걸린다며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차가운 냉동실 안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얼려 놓은 냉이나물과 완두콩, 떡 등을 아낌없이 주셨는데 도대체 겨우 몇 달 사이에 당신의 몸에서는 어떤 소용돌이가 일고 있었던 것인가? 직접 보면서도 생명이 이렇게 빨리 사위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생과 사의 건널목에서 불어오는 소리 없는 바람이 만들어내는 적요가 공간을 감싸고 있을 때 나는 인사를 드리러 침대 위로 올라갔다. 작은어머니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고, 옅은 숨소리도 고르게 들렸다.
“작은어머니! 천안에서 저희 왔다 가요. 다음에 또 올게요.”
의식 불명 상태에서도 귀는 마지막까지 열려서 들을 수 있다는 말이 생각나 귀에 대고 큰소리로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삼일 안에 소식이 갈 거여. 기다리고들 있게.”
아내의 죽음을 예감하는 작은아버지의 얼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은 슬픔과 두려움이 그림자로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남편은 대문 앞까지 배웅 나온 작은아버지의 손을 맞잡으며 위로했고, 내가 작은아버님 좀 안아 드리라고 하자 쑥스러운 듯 작은아버지를 포옹했다. 그러자 장조카 품에 안긴 작은아버지는 누르고 있던 슬픔이 밀려오는 듯 눈물을 쏟아 내셨다. 어스름이 내려앉은 저녁에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집에 도착했는데 몇 시간 후에 작은어머니의 부고를 들었다. 낮에 자식들이 다녀갔을 때도 변화가 없던 작은어머니의 맥은 우리가 떠나고 서서히 약해졌다고 한다. 의식이 있을 때 장조카가 보고 싶다며 남편 이름을 여러 번 부르셨다고 하더니 마치 보고 싶은 사람 다 보고 서둘러 떠나가는 것처럼 칠십여 년의 인생을 이승에 남겨 놓고 그렇게 하늘로 떠나셨다.
작은어머니가 더 안타까운 건 십여 년 전에 겨우 서른이 넘은 큰딸을 병으로 잃고 평생 퍼런 멍을 안고 사셨기 때문이다. 장례식장 가는 동안 ‘이제는 그리워하던 딸을 만나셨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는데 그런 사후의 해후를 상상한다는 것은 슬픔을 더 중첩시키는 일이었다.
빈소에 들어서서 상주들과 맞절을 하고 나니 작은딸인 사촌 시누이가 “언니, 고마워요. 엄마 아플 때 죽도 끓여다 주고 그랬다면서요. 명절 때도 이것저것 잘 챙겨 줬다고 엄마가 고마워했어요”라고 말하는데 나는 죽을 갖다 드린 기억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댁에 끓여다 드린 전복죽을 시어머니가 병문안 갈 때 덜어서 갖고 가신 것이다. 큰며느리인 시어머니와 둘째 며느리인 작은어머니는 새댁 시절, 한집에 살면서 쌓인 갈등과 오랜 세월 부딪혀 온 감정들 때문에 노년까지 사이가 원만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어머니 스스로 아픈 동서에게 죽을 덜어서 찾아가셨으니, 생의 뒤안길에서 그분들이 나눴을 뒤늦은 정은 돌이킬 수 없는 세월과 함께 또 얼마나 아쉬운 것인가.
“이렇게 떠날걸, 그동안 괜히 너 잘났니, 나 잘났니 하면서 살았어.” 
어머니가 손아래 동서의 죽음 앞에서 지난 세월을 후회하셨다. 반목하던 세월 속에서 두 분의 가슴에는 다른 듯, 같은 멍이 들어 있었음을 나는 안다.
빈소에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들고, 고인이 베푸는 마지막 음식을 먹으며 슬픔을 나누기도 하고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을 때 누군가 놀라며 입구를 가리켰다.
“아니, 저기 좀 봐! 큰사위야.”
오래 전 세상을 떠난 큰딸의 남편이 군복을 입은 건장한 청년과 함께 침통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혼자 살다 몇 해 전에 재혼했기에 아무도 옛 장모의 빈소에 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천천히 제단 앞으로 걸어간 큰사위는 영정사진 속의 장모님과 대화를 나누듯 사진 앞에서 서서 움직이지 않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엎드려 절을 했다. 그러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낮은 소리로 꺼이꺼이 울었다. 옆에서 함께 절을 하며 우는 군인은 큰딸이 남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가 장성한 청년이 되어 외할머니의 빈소에서 엄마의 흔적을 찾듯 아버지를 따라 우는 모습에 친척들의 눈도 벌게져 있었고,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아내를 잃고도 때 되면 처가를 찾아왔대. 사위가 왔다 가면 장모는 일주일은 딸 생각에 끙끙 앓아누웠나 봐. 사위가 몇 년 전, 재혼하면서는 상대 여자를 데리고 인사까지 왔었다네. 자기는 평생 사위라고….”
친척 한 분이 하는 말과 조문을 하는 사위와 손자의 모습을 보며 딸을 잃은 엄마, 아내를 잃은 남편, 엄마를 잃은 아들의 아픔이 시간을 건너 전해져 왔다. 아무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세월이 흘러서 겉으로 보이는 생채기는 아물더라도 가슴에 든 멍만은 어찌하지 못하고 살았을 사람들이다. 그렇게 누군가는 멍든 가슴을 한 채 세상을 떠났고, 누군가는 멍든 가슴이 밀어 올리는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큰사위와 외손자는 빈소에서 밤을 새우고 발인식에 참석한 후 화장터와 장지까지 함께하고서야 서울로 올라갔다.
이별 의식은 끝나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지만, 평생 살면서 부부싸움 한 번 하지 않았다는 작은아버지는 시골집에서 아내의 흔적을 그리워하고 가슴에 묻어 둔 딸을 어루만지며 조용한 성품처럼 멍든 가슴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쓰실 것이다.
작은어머니와 헤어지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흔적처럼 가지고 있는 크고 작은 멍을 혼자서 감내하고, 때론 같이 쓰다듬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평생 사위’의 예를 다한 마지막 인사 또한 그러했기를, 그가 쏟아낸 눈물이 멍을 지우는 연고가 되어 돋아난 새살로 힘차게 살기를 바라면서 멍든 가슴들을 위해 글로나마 나지막한 기도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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