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년의 막가는 겨울, 조선 시대 유배지였던 동해안의 배움터 장기초등학교를 들리게 되었다. 포항 장기면으로 들어서는 길은 옛 기운이 서려 있는 듯 조용했다. 바다는 가까운데 파도 소리는 멀고, 산은 낮은데 그늘은 깊다.마음의 선입견 탓인지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이곳을 유배지로 생각했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듯했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작고
- 박천익
을사년의 막가는 겨울, 조선 시대 유배지였던 동해안의 배움터 장기초등학교를 들리게 되었다. 포항 장기면으로 들어서는 길은 옛 기운이 서려 있는 듯 조용했다. 바다는 가까운데 파도 소리는 멀고, 산은 낮은데 그늘은 깊다.마음의 선입견 탓인지 조선 시대 사람들이 이곳을 유배지로 생각했던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듯했다. 마을 중심에 자리한 작고
아파트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곤 한다. 어렵사리 빈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더라도 나갈 때 방해받지 않고 나갈 수 있어야 좋다. 선이 그어진 자리에 주차해 놓아도 다음 사람이 일렬 주차로 앞을 가리기가 일쑤다. 다음날에 새벽 골프라도 나가는 날이면 버티고 있는 앞차들을 끙끙대면서 저만큼 밀어내야 한다.좋은 주차 자리 찾는 일이 일상적인 버릇이
“사물함에 있는 화구(畵具)를 빼주셨으면 합니다.”H대학교 평생교육원 행정실에서 아내에게 걸려온 전화다. 지난 학기에 이어 이번 학기까지 등록하지 않으니 당연한 요구인데도 왠지 야박스럽게 여겨지고 서운했다. 혹시 어깨가 회복되면 다시 등록하게 될지 몰라 그대로 둔 것인데….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사물함 정리를 위해 아내의 뒤를 따라 들어선 평생교육원 강의실
설설 눈발 날리는 초봄의 하룻저녁 닭이 몰살을 당했다. 족제비가 다녀간 것이다. 구사일생 살아남은 한 마리 암탉을 위해 수평아리 한 마리를 사들였다. 유정란 먹을 욕심이다. 두 그루 감나무 아래 망을 치고 닭의 에덴동산을 감상하리라 잔뜩 기대를 걸었다.수평아리는 쉽게 놀이터로 나오질 않는다. 늘 갈고리에 잡혀 나가던 농장의 트라우마가 있는지 닭장 안 어둡고
탄허 스님만큼 올곧은 사람은, 나는 보지 못하였다. 머리부터가 절세의 수재였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박식하셨다. 스님은 아홉 살 적에 한문에 문리가 나서 원전을 해득하였고, 10대에 들어 사서삼경이며 노장(老莊) 사상까지 회통한 기호학파의 마지막 선비였다. 출가 이전에 이미 동양철학의 석학이었다.탄허(呑虛)는 허공을 삼킨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 해석으로
안도현 시집 『쓸데없이 눈부신 게 세상에는 있어요』에 수록된 「풀 뽑는 사람」 한 편이 잠 못 드는 밤 내 시선을 끌었다. 노트 세 페이지에 꾹꾹 눌러 필사를 했다. 시인의 섬세한 관찰로 묘사된 문장 행간에서 고향의 풀냄새가 푸르게 났다. 시 한 편에 이름이 불리어진 풀들이 반가웠다.쇠뜨기, 애기똥풀, 개비름, 개망초, 도꼬마리, 바랭이, 애기땅빈대. 고향
아침 러시아워라서 찻길이 매우 복잡했다. 4차선 곧은 도로인데 길 한쪽으로는 고깃배가 드나드는 작은 항구, 맞은편 도로 우측으로는 큰 어시장으로 붐비고 있었다. 도로는 시장 쪽으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정차해 놓은 차들로 사실상 3차선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1, 2, 3차선 중 어느 차선이 빠를지를 연방 계산해 가면서 고향 집으로 달
기상이변은 언제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자연현상이었다. 인류가 지구에 존재하며 그 생명을 유지해 나가는 한, 예측 불가능한 그들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자연이 주는 혜택을 고스란히 떠안아 삶의 영역을 굴곡지게 할지 모른다. 미처 겪어보지 못한 지난여름의 폭염과 폭풍우가 안겨주는 재난이 그런 느낌을 또다시 던져주지 않던가. 모든 것 다 물리치고 여기에 고스
8층 오피스텔 건물 중간층인 3층 집에 혼자 산다. 지난달부터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위층에서 쿵쿵대는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새로 이사 온 모양이었다. 천장이 울리는 소리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이 쿵쿵 뛰기도 했다. 참다 못해 관리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매일 저녁 층간소음으로 고통받고 있으니 중재해 달라고 했다.그 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
경포호에 달이 뜨는 밤이면 일부러 걸음을 늦춘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 같아서다. 이 호수의 밤은 빠른 사람에게 좀처럼 얼굴을 내주지 않는다. 가을로 접어든 경포호는 낮보다 밤에 더 많은 것을 품는다. 바람은 얇아지고, 물결은 낮게 숨을 죽인다. 달빛은 물 위에 닿자마자 풀린다. 흔들리지만 흩어지지 않는다.강릉의 경포호에는 월파정이 있다.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