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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끼와 바늘

한국문인협회 로고 박주원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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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자의 음성이 겹쳤다. 높고 날카로운 걸 보니 또 윤희의 딸이 온 모양이다. 모자라는 것 없이 잘 사는 사람들 인데 마치 도끼를 든 엄마와 바늘을 든 딸이 서로 이기려고 필사의 힘을 실어 겨루는 듯하다. 친모녀의 소통도 미인도 감상과 흡사하다. 청자의 얼굴에는 고소가 번진다. 한 때는 우리 모녀도 저랬다. 으르렁거리는 어미와 왈왈거리는 새끼. 칠십이 넘은 엄마 윤희나 오십이 다 된 딸 진이의 악에 받친 음성에는 서로 지지 않으려는 기세가 팽팽하게 뻗쳤다.
청자도 한때 남들로부터 북소리라는 별명도 들었다. 살 찐 큰 몸집에 목청까지 큰 청자가 폭압적인 음성으로 화를 내면 달리는 기차소리처럼 진폭이 커서 온 집안의 소리는 그에 묻혀버렸다. 청자의 크고 툭진 음성 못지않게 빠르고 예리한 정아의 전방위 공격도 과녁을 향한 활촉처럼 집요했다. 사안을 미리 분석하고 정리해 둔 정아의 각진 음성은 막힘이 없다. 서로의 결점을 지적하고 따지느라 피붙이의 존재감이 무색하게 대치했던 그 시절.
궁금해진 청자는 한 가랑이에 두 다리 꿴 뒤뚱 걸음으로 고샅을 질러 뛰어서 윤희의 집으로 들어간다. 산수를 유도해서 제법 잘 꾸며놓은 분 수가 넘치는 커다란 확 옆에서 모녀가 서로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말싸움만 하는 게 아니다. 윤희는 손에 칼을 들었고 진이는 칼을 뺏으려 한 다. 손에 들린 칼로 차마 딸을 베지는 못하지만 진이를 벨 것 같은 윤희의 칼은 허공을 휘저으며 번쩍이고 있다.
“아무리 친한 부모자식 관계라도 지켜야 할 예의법도가 있는 법인데, 네가 알면 에미인 나보다 얼마나 더 안다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져. 나 이래 뵈도 선주 딸인데 천지분간도 못하고 덤빌까.”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평소의 윤희답잖게 진이를 제압하려 하나 진이는 더욱 탱그렁 소리가 나게 제 어머니를 힐책한다.
“엄마에게 자식은 언제나 한 몸이지 세포 분열을 인정 안해. 이제는 내가 더 많이, 더 잘 아는 걸 인정해야지. 엄마는 고급수저로 먹는 것만 즐겨했지. 손톱에 칠한 매니큐어 상할까 봐 나물도 장갑 끼고 무치고 설거지도 나한테 다 시킨 사람이잖아요.”
다시 제지하는 딸을 피해서 윤희가 주저앉는 물가에 뿔룩한 배를 늘어뜨린 복어가 놓여 있다. 복국을 좋아하는 윤희가 어디선가 복어를 사 온 모양인데 옆구리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걸 보니 황복이다. 냄비가 있고 국에 넣을 무와 콩나물 미나리까지 준비돼 있는 것은 복국에 대한 윤희의 간절한 먹성이다.
“이모, 좀 들어보세요. 황복은 바다에서 2∼3년 성장한 후 아카시 필 무렵 강으로 와서 산란을 한 뒤 밤꽃 필 무렵이면 내려간대요. 자주복 까치복 검복 등 복의 종류도 많은데 임진강에서는 25년간 황복 치어 방류를 하는가 하면 양식도 시도했대요. 황복은 미식가들을 끌어들일 만 큼 맛있는 반면 테트로톡신이라는 독성이 어찌나 강한지 청산가리는 비교가 안 된대요. 엄마가 꼭 저렇게 큰 소리치고 우기는 바람에 속상해 죽겠어요.”
“네가 무슨 연구 박사야? 밉살스럽게도 뭐든 아는 척해서 에미 기죽일려고 그러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제발! 자식이 그렇다면 자식들 말 좀 들으세요.”
“싫다! 이런 것도 내 맘대로 못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사태를 짐작한 청자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언니, 진이 말 들어요. 복어는 전문요리사가 다루어야지, 일나. 사람 이죽을수도있어.”
청자의 훈수에 힘을 얻은 진이는 하고 싶은 말들을 잇달았다. “고집 부릴 걸 부려야지. 엄마는 집에 일하러 온 아줌마들 무시하고,
미스코리아 나간다고 할아버지 할머니 속만 썩히고 다닌 말썽꾸리기 큰딸인 줄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굳이 나 이기려고 하지 말고 그냥 한 그릇 사 잡수세요.”
“못된 년. 죽어도 제 잘못은 인정 안 하지.”
“자기 잘못 인정 안 하는 건 엄마 딸인데 뭐. 그러니까 내 성질도 못 돼먹었지.”
그들 모녀의 언쟁을 말리지 않으면 목불인견 사태가 어디까지 펼쳐 질지 모른다.
“진이 말도 틀린 것 없이 싹다 맞시다. 어디서 어찌 구했는지 모르지만 고등어나 갈치 토막 내서 찌져 묵는 것도 아니고 진이가 질겁하게는 됐시다.”
끼어드는 청자 때문에 윤희가 잠깐 대치를 늦추는 참에 진이는 재빨리 복어가 얹힌 도마까지 챙겨들고 사라졌다. 청자는 이들 모녀가 만나면 언제나 티격태격이 일어나는 걸 잘 알지만 오늘처럼 이런 별스러운 이유도 본다.
예민하고 여린 윤희는 비슷한 처지라 그런지 걸핏하면 청자에게 딸 진이의 흉을 보았다. 에미가 이제 지갑 열 것도 없이 빈털터리 되니까 저것이 일일이 얕보고 맞서서 에미를 이기려고 드니 참 환장하겠어. 언니 딸만 그런 게 아니라 헌옷 새로 고치듯이 저들 취향대로 어미를 뜯어고치려는 자식들 때문에 속으로 등갈 진 사람들 많아요. 청자는 슬쩍 남의 경우를 빗대서 제 속내를 턴다. 어떤 사람은 늙은 부모 힘이 얼마 나 남아있는지 시험해 보는 거니까 못이기는 척 가만히 있으면 차라리 불쌍해서 더 잘해준답디다. 아이고 나는 죽으면 죽었지 억지로는 그렇게 안 해. 언니 생각이 그러니까 딸하고 둘이 만나기만 하면 항상 싸우제. 누구에게든 턱없이 풍성한 청자는 깨자분한 인색함으로 자식들에 게조차 인기가 없는 윤희를 늘 다독거리는 역할을 했다.
자식들 꼴 보기 싫어서 변두리 집을 구해왔다는 윤희의 존재는 이사 올 때부터 경계의 눈빛을 끌고 다녔다. 서글서글한 청자는 낯선 동네에 서 외톨이 취급을 받는 윤희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알고 보니 윤희는 큰 섬 선주 겸 선장의 딸이고 청자는 작은 섬에서 주낙질하던 집 딸이 다. 두어 살 적은 나이로 청자가 동생 위치를 정해버리자 윤희도 청자를 대할 때 다른 사람보다 친하게 곁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윤희의 배경에 접힌 청자는 얄궂은 회상에 젖었던 적이 있다. 선주의 딸 윤희가 호의호식 사랑 받고 살 적에 청자 자신은 이름도 모르는 병으로 고랑고랑 앓느라 주낙질로 일손 바쁜 부모를 제대로 도운 기억이 없다.
주낙은 한 마리를 낚아 올리는데 시간이 짧을수록 유리하다. 그런데 이 시간을 단축하는 방법으로 알 맞춤한 줄 한 가닥에다 미끼 낀 낚시를 여러 개 매단다. 거기다 모릿줄의 일정한 간격으로 가짓줄을 매달면 그 끝에 여러 개의 낚시를 더 달수가 있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그들은 늘 가난했고 큰 섬으로 이사를 가거나 큰 배를 장만하는 꿈도 희망도 그림 속의 떡일 뿐이었다. 형편이 그러하니 초등학교 총각선생이던 남 편이 청자를 선택해 주지 않았다면 지금 쯤 청자는 아마 이름도 모르는 병줄에 목이 매여 맨날 쌕쌕대다가 처녀 귀신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네 딸은 안 그렇지? 윤희는 청자가 만 콩국수를 먹으면서도, 자신이 사온 미조산 멸치조림을 쌈 싸 먹으면서도 변하지 않는 순서로 청자의 딸이 언제 오느냐고 궁금해 했다. 이럴 때도 청자는 스스럼없이 대답해 버린다.
“먹고 살기 바쁜 놈이 친정 나들이하기 쉽나요.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우린 그리 살아요.”
“동생도 내가 참 별나게 보인가? ”
“차암 언니도. 달보다 해보다 별이 억수로 더 많으니 별 사람도 많겠제. 전쟁통에 태어났던 우리 섬 가시내들이 이만하면 출세했지요. 욕심을 버려요. 언니 요새 하는 말 들어보면 일일이 딸 흉보데요. 요새 세상 에, 어느 자식들이 지 가족들 다 안 챙겨놓고 부모 생각부터 합디까.”
“그래도 나는 억울하고 분하다. 지들 키우느라 뭐 한가진들 내 맘대로 해본 게 없다. 너나 내 심정 이해할란가 이거 한 번 읽어봐라.”
“언니는 선장 딸이라서 대학교육도 받고 호강하고 살았지만 나는 까막눈 겨우 면했는데 읽을 줄이나 알란가 모르겠시다.”
“동생은 통 큰 만큼 넉살도 인심도 다 좋은데 그 시치미 떼는 버릇 좀 고쳐라. 하여튼 답답한 가슴 심화풀이를 했는갑다 생각하고 내 속 짚어 서 지어본 글이니 읽어나 봐 줘.”
청자는 마지못한 채윤희가 주는 노트를 받았다. 배우 윤정희를 너무 좋아해서 이름조차 윤희로 바꾼 그녀는 호기심도 많고 질투심도 유난 해서 메이커 옷이나 신발은 물론 감성마저 젊은이들을 닮으려 애쓴다.

‘엄마 집에 계시죠. 조금 있다 잠시 들를게요.’
딸의 문자를 받은 영자는 한숨부터 푹 내뱉는다. 내가 뭐 붙박이 장롱인가 어디 있는지 확인도 안하고. 영자는 구시렁거리며 현관과 집 안을 정리하고 여러 가지 마실 것을 꺼내서 손님맞이 준비를 한다. 무 엇으로든 딸의 지적 질은 또 시작될 것이라 여기저기 눈을 돌려서 살펴 본다. 어서 오라는 반가움보다 서먹함이 앞서, 에미가 이래서는 안되지 싶은 심정으로 본심을 애써 숨긴다. 딴에는 자식노릇을 잘 하는 방 법이라 자주 오는지 모르지만 울화가 치밀어 같은 자리에 오래 있는 것 도 피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며칠 전에도 딸은 어디선가 퍼 온 문자로 카톡 화면을 꽉 채웠다.
-옆에서 보기에도 사서 고생하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의 삶에 만족 하는 사람은 매일 작은 기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작은 기쁨이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삶은 그 자체로 더 없이 소중해 다른 것들이 끼어들 틈 이 없어요. 하지만 반대로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만족을 모른다면, 채워지지 않을 욕심으로 인해 언제까지나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엘리스, 「너만의 길을 그려 봐」중에서)
딸은 이제 어미를 저 나름으로 분석할 수 있을 만큼 성장했다. 쌓은 학식에 걸맞은 직장에서 민첩하고 꼼꼼하고 성실한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발전이나 욕망이라는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도모해볼 수 있을 더 없이 이상적인 모녀 관계지만 모녀의 담소는 걸핏하면 신구세대의 격론으로 번졌다. 딸은 제가 분석한 어미의 화려한 성격을 대책 없는 낭만이라 비웃었고, 어미는 벌개진 안색으로 쓸데없이 비난 받는 처지에 대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지만 수세에 몰려 끝내 는 자리를 피하고 만다. 피하고 싶다. 무섭다. 자주 안보아도 욕먹지 않을 먼 곳으로 이사를 갈까. 까똑 까똑. 하긴 그도 안 된다. 화장실까지 도 따라다니는 이 물건이 있는 한 어쩌는 수가 없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동안 어떤 상황이나 사람에 대한 감정이 극에 치달아 이성적으로 판 단하기 힘들다고 느낀 적이 있나요? 지금 품고 있는 불안도 마찬가지 일지 몰라요. 필요이상으로 염려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뿐, 실제로는 그 다지 큰 일이 아닐지도 모르니까요. 영자의 입가에는 시답잖은 미소가 떠오른다. 딸은 저 나름으로 뜻한 바 있어 남의 말까지 끌어와 어미를 교육시키겠지만 영자는 이미 다 아는 이미지들이라서 내용에 대한 별스런 감동은 없다. 제임스가 누군데‘너만의 길을 가 봐’제목까지 알뜰히 새겨 놓아서 얄미움까지 부추긴다. 어미의 경험이나 인생론 자체를 제 식으로 농단해 버리며 주입을 시도하는가 하면 나이 많은 엄마의 위세를 두루 흠집 내고 휘저으면서 나름 자일을 던지고 사다리를 걸친다. 하지만 어미의 세계를 극복 못할 숙명적인 한계가 있음을 아직 알지 못 한다는 것 조차 딸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며칠 뒤 청자는 보말죽 냄비를 들고 앓고 누워 있는 윤희를 찾아갔다. “삼천포장에 가니 이게 나왔길래 죽 한 그릇 끓여 왔수. 꾀병 앓지 말고 일나서 잡솨봐.”
“너도 내보고 꾀병이라고? 그런 인심 싫응게 갖고 가서 니나 실컷 배 터지게 많이 무우라.”
청자가 껄껄 웃으며 윤희의 입으로 가져가던 숟가락을 떨구는 바람 에 죽방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언니는 부잣집 딸이라서 늘 친구 집에 가서 밥하고 죽을 바꿔 먹었다며? 에이그 불쌍해라, 얼매나 죽이 먹고 싶었으면 밥 그릇 들고 죽 동냥을 다녔을까.”
그래놓고 청자는 또 큰 소리로 찢어진 북처럼 웃어 젖힌다.
“그래 나는 불쌍하다. 이것이 그 난리를 치고 갔으면 전화라도 한 번 하지 여태도 이런다.”
윤희는 한숨을 쉬는데 그리움인지 원망인지 가닥잡지 않고 청자는 그저 들어주었다.
며칠 후, 콧물까지 훌쩍거리던 윤희의 집 대문에 열쇠가 잠겼다. 많이 아파서 자식들 집에나 갔을까. 미우나 고우나 자식인데.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을 고쳐먹었지만 공공근로에 바빴던 청자는 윤희가 사라진 것도 모르고 지낸 것이 제 잘못만 같아 미안했다.
그런데 또 얼마 후, 윤희의 딸 진희가 청자네 집골목으로 들어오다 마주쳤다.
“저희 엄마가 집에 안 계시는데, 이모는 모르세요? 전화도 내내 꺼져 있어요.”
곤혹스러운 얼굴로 윤희의 딸이 바라보는 데 표정이 울먹한다. “나도요새못본지한참됐네. 와아 무슨 일이 있었던가베?”
윤희의 딸 얼굴에는 감추고 싶은 어두움과 계면쩍은 표정이 슬쩍 엇갈려서 지나갔다.
청자는 얼른 윤희가 읽어보라고 준 글이 떠올랐지만 더 깊은 어떤 사 연들이 있었는지 대놓고 물어 볼 수도 없다. 문제도 대답도 시원하게 해결해 줄 수 없어 우두커니 서 있는 청자 앞에서 진이가 얼굴을 가렸다. 이내 어깨가 들썩거렸다.
“엄마 땜에 속상해서 죽겠어요. 엄마는 나더러 인정머리 없이 까다롭다고 걸핏하면 타박을 하지만 저도 아이처럼 매사에 칭얼거리는 엄마 가 너무 싫어요. 저도 직장 다니고 아이들 키우느라 너무 바빠요. 시댁 은또시댁대로….”
“너거 옴마가 고생을 안 해 봐서 그렇지 속마음은 한없이 여리고 고운 사람이다. 그냥 좀 늙은이 응석이라고 받아 줘라. 너 오빠 사업 실패 해서 이리로 이사 올 때도 얼매나 자존심 상했는지 한 달간 문밖출입을 안 했는데 내가 와서 문을 텄다. 딸인 니가 이해해라.”
“솔직히 말해서 여기 와서 고생하라고 등 떠민 사람도 없구요. 항상 용돈 때문에 징징거리지만 우리가 드리는 용돈도 아껴서 쓰면 되잖 아요.”
“너들도 훗날 우리 나이 되면 아, 이게 그거구나 생각날게다만. 우짜 것노, 어서 죽으라고 양밥을 할 수도 없고.”
오늘도 윤희는 오지 않는다. 윤희가 없으니 청자는 동네가 다 빈 것 같다. 삼거리 마을회관에 가야 사람 구경을 한다. 자칭 ‘상여알’감인 늙은이들 그것도 남자는 없고 할멈들만 몇 눕고 앉아서 세월을 보내는 곳이다. 자식들 기를 때는 황소처럼 열심히 노동력을 보탰지만 지금은 자기 입에 들어갈 음식 만드는 것도 성가시고 힘없어서 겨우 여기 와서 한 끼 해결을 한다.
청자는 텃밭에서 나온 장거리를 팔러 시장에 다녀오면서 난전에서 팔고 있는 술떡 한 덩이를 사다 회관 방에 들여 주었다.
“꿀찜할 시간인데 쪼끔씩 노나 잡수시게.”
“아이구, 또 주전부리까지 사왔네. 번번이 무슨 돈을 얼매나 벌었다 꼬 놀고 있는 늙은이들 양앵이까지 이리 챙기노.”
“형님은 참. 내가 녹슨 금고 열쇠 찾았다꼬 소문냈던 말 벌써 이자삣 는갑소? ”
노인들의 반색에 허허 웃은 청자는 옆에 있던 고무대야에서 고등어 두 마리를 더 꺼내놓는다.
“장수만세. 그거 얼매나 바라던 일인데 하루를 살아도 즐겁게 사입시더. 갯가에서 나고 자란 년이라 드세다고, 시어머니한테 구박 받고 쫓겨나서 울고 있을 때마다 언니들이 옷도 주고 밥도 주고 다했는데 그 은혜를 잊으면 사람이 아니지요.”
청자는 이럴 때면 늘 일에 치이고 지리멸렬한 일상에 묻혀 있던 자신을 햇살 속에서 확인하는 가슴 벅찬 기쁨을 느낀다. 누르고 참느라, 웅크리고 수그려야만 했던 날들 속에서 악악거리며 돌출하고 싶은 자아의 머리통을 스스로 누를 수밖에 없었던 긴 세월. 오늘 탈탈 마지막 빚을 갚는 기분인 그녀의 내면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병마에 시달리고 있을 때조차 부모형제의 맏이답게 건강하고 싱싱하게 성과를 내고 싶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에도 잠재적인 이런 의식 은 불쑥불쑥 그녀 청자를 추동시켰다.
마을 회관에서 밥 한 그릇을 얻어먹고 돌아 온 청자를 뜻밖에도 기다 리고 있던 딸 정아가 맞이했다.
“아이고, 네가 웬일이고, 내가 또 뭔 잘못을 했나? ”
지은 죄를 들키는 심정으로 청자가 멈춰 서는데 온갖 생각이 출렁거리며 뒤범벅이 된다. 그런 청자를 슬그머니 끌어안으며 딸이 귓속말을 한다.
“엄마, 나도 사실은 내 새끼한데 벌써 도끼가 됐어.”
“거참 꼬시다. 깨소금이 열두 단지다. 아이고 이 웬수를 우짜꼬.” 청자는 정아의 머리를 쿡 쥐어박는 시늉을 하면서 하하 웃음으로 과거를 날려버린 듯 호탕해진다. 그러나 청자는 준비해 놓고 마시는 ‘골 담초’ 단술을 냉장고에서 꺼내주며 어린 딸에게 빌붙었던 그때를 떠올린다.
정아가 기어코 선언을 했다. 엄마가 저지른 불구덩이에 나까지 타죽기는 싫어. 스무 살을 갓 넘긴 여린 심성의 딸이 감당하기로는 저라도 그러지 않을까 싶은 상황이었지만 청자는 애원을 했다. 너까지 엄마를 도와주지 않으면 에미는 죽는다. 목이 메여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미가 부여잡는 손을 떨치며 정아는 앞으로 나간다. 이때 청자는 준비하고 있던 무기처럼 분노한 얼굴에 핏빛 눈알을 부라리며 다시 정아의 다리에 매달렸다. 야, 이년아. 니가 이라고도 자식이가. 청자는 미리 준비해 놓은 양잿물 그릇을 곧 마실 듯이 얼굴 높이로 들어 올리며 정아를 위협했다. 그러나 이미 어미의 속셈을 파악하고 있는 정아는 싸늘하고 태연하게 제 갈 길을 갔다.
밥알이 동동 뜨는 단술을 다 마실 때쯤 모녀간의 분위기는 어느덧 오늘이 되었다.
“잘 참아줘서 얼매나 고마운지 짚신이라도 삼아주고 싶건만….” 만감을 다스린 청자의 말을 느닷없이 들은 정아는 애매한 웃음으로 대꾸를 한다.
“핏, 엄마가 무슨 짚신을 삼을 줄 안다고.”
“도처에 스승이라더니, 천지만물이 한 번 나면 한 번 죽는 건 정한 이친데 무엇 때문에 왜 그렇게 불안에 떨며 아등바등했는지….”
모녀 사이에는 만감이 교차하는 침묵이 가로놓였다.
일없이 커피 한 잔씩을 풀어 권하던 청자가 갑자기 생각 난 눈길로 정아를 바라본다.
“참 그러고 보니 잘 됐다. 뒷집 이모 딸이 닐로 궁금하게 여기는데, 지금도 있는지 가고 없는지 모르겠다.”
봉창으로 윤희 집을 살핀 청자가 맘내껴하지 않는 정아를 설득했다. “한번 만나봐라. 그년도 바늘 들고 지 에미한테 덤비는 딸인데, 막상 어매가 없자 걱정인지 기다리고 있다.”
“엄마도 참. 처음 보는 사람하고 무슨 이야기를 하라고.”
“그냥 내 흉만 잔뜩 봐라. 그럴 사정이 좀 있다.”
윤희의 집으로 간 청자는 진이에게 정아를 소개한 뒤 얼른 자리를 피했다.
“젊은 사람들 끼리 친구해서 놀다가, 내가 저녁 해놓고 부를 때 같이 오니라.”
자세한 사연은 모르지만 정아도 알았다는 눈짓을 했다.
주방에서 과일을 깎아 내온 진이가 소파에 앉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정아 씨는 어쩜 그리 어머니와 잘 지내세요? ”
이런 오보가 살아 있었다니, 어색했지만 정아는 대뜸 집히는 대로 대꾸를 한다.
“엄마들은 거의 비슷한가 봐요. 우리 엄마가 늘 하던 말 중에‘세월 이 다 해결해준다’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얼마나 기막히게 분통 터지는 줄 아세요? 나는 우리 엄마의 특이한 긍정과 괴변 때문에 어릴 때부터 머리통이 빙빙 도는 경험을 많이 했죠. 우리 집은 굉장히 부자인 줄 알았던 착각도 그 중 하나였구요. 내 도시락 반찬은, 언제나 다른 애들보다 고급이었지요. ‘무엇이든 잘 먹고 건강해야 그게 돈 버는 거다’그 게 우리 엄마의 생활철학이었는데 그에 따라 엄마와 나 사이는 북소리 하고 종다리가 별명일 정도로 무척 상극인 일들이 잇달아서 일어났죠. 직장에 들어간 지 얼마 안됐는데 예고도 없이 내 월급이 절반으로 뚝 잘린 겁니다. 엄마가 귀가하면 이유를 따질 셈이었는데 만땅으로 취한 아버지가 먼저 비틀걸음을 보이면서 들어오셨어요. 전에 없던 굳은 표정에다 자세마저 억지로 곧추세웠으나 평소와 다르면 가족들 눈에는 대번 들통이 나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배우 같은 폼에 성격조차 얌전할 정도로 점잖고 조용해서 집에 들어오시면 별 말씀을 안 해요. 초등학교 선생님답게 아이들 가정교육의 귀감이 되려고 작심 하신 분인데 그날 은 의외로 엄마를 먼저 찾으시데요. 세월이 가면 권태기라는 것이 있다던데 이 부부는 술김에 역주행을 하는 건가 의아할 정도로 뜻밖이었죠. 애정표현이나 서로에 대한 살가운 감정 표현도 없는 분이라 그들 부부 는 제 역할 착실히 실행하는 것으로 존재감을 보이는 것 뿐, 늘 근검하고 천편일률적인 일상을 보였거든요. 저런 부부가 우리들 남매는 어떻게 낳았을까. 상품제작 기획을 누가 먼저 제안 했을까, 성에 눈뜰 무렵 이던 우리 남매들은 우스개처럼 속닥거리곤 했죠. 음식점에 오래 앉아 있다 영업시간 끝났다는 채근을 받고 오는 것 같은 시간에 엄마가 들어왔어요. 묻어 온 먼지를 터는 것처럼 현관에서 아래 위를 쓸어내린 엄마가 우리들 곁으로 올 때 집안 공기를 진동시키는 강한 기류를 만들며 숯불에 탄 고기냄새가 점령을 합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늘 그랬던 것을 그제야 인지를 하게 됐죠.
“아우, 웬일들이야? 나를 기다린 건 아닌 것 같고.”
기다리는 가족들을 일별한 엄마는 아직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모를 천연스런 동작으로 들고 온 베가방을 내려놓더니 무 장해제용 평상복을 챙겨들고 욕실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때 술기운에 빠진 것처럼 소파에 늘어져 있던 아버지가 벌떡 상체를 일으키더니 잡아채듯 엄마의 팔을 끌었다.
“당신이리좀들어와!”
손에 든 수건을 펄럭거리며 하마처럼 안방으로 끌려 들어간 엄마. 전에 없이 벼락같은 아버지의 고함이 뒤따랐다.
“당신 도대체! ”
천장을 뒤집을 듯이 격한 아버지의 음성이 닫혀 있는 문틈으로 계속 터져 나왔다. 그 사이로 전에 없이 아연 낮아진 음성으로 웅얼거리는 엄마의 대꾸가 들렸다. 아버지의 추궁에 대한 경위를 엄마가 설명하는 모양인데 무언가 중대한 일이 닥친 증거였다.
잠시 후 긴장해 있는 거실 분위기를 착 가르며 엄마가 뛰쳐나오는데 서식이 인쇄되어 있는 종이 두어 장이 문 어우름에 같이 날아와 흩어졌다. 엄마가 부리나케 화장실로 들어간 뒤 요란한 물소리가 났다. 쏟아지는 물소리 외에 얼굴을 씻거나 몸을 세척하는 외에 코를 푸는 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는 거야. 내가 따질 차례를 놓친 억울함 속으로 이상 한 생각이 튀어 올랐어. 생전 처음 아버지의 힐책을 당한 엄마가 흐르는 물소리를 방음벽 쳐놓고 무슨 짓을 하는지 기척이 없다. 순간 영화 나 텔레비전에서 본 온갖 불행한 장면이 스쳤다. 내가 그렇게 빨랐는지도 모를 뜀박질로 화장실 문을 열었지. 아버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하얗게 긴장된 얼굴로 같이 뛰어들 태세를 취하고 있어. 다행히 문이 잠겨 있지는 않았는데 뜻밖의 장면을 목격한 나는 뒤로 발랑 주저앉고 말았지. 사람의 옷을 입은 하마가 전신으로 물을 뒤집어쓴 채 귀신처럼 우뚝 서서 마주보는게 아닌가.
온몸의 물을 줄줄 흘리며 우리들 가운데로 걸어 나온 엄마가 큰 소리로 명령했어.
“당신은 아까 그 이혼서류 가져오고, 너는 서랍 두 번째 칸 열면 내 도장 있으니까 가지고 와.”
그제야 나는 아버지가 펴놓은 인쇄물 위에다 엄마의 인감도장을 얹어 놓으면서 그날이 그날처럼 평온하던 우리 집을 소리 없이 덮친 쓰나 미 현상을 접하게 되었지.
“어찌 그리 간 큰 짓을! 나한테는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책임감이나 가장의 권위로 시작된 아버지의 호통은 점점 시그러지는 현상이 일어나더니 급기야는 엄마를 설득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냥 위장으로 하는 거라. 서류상으로만 그래놓고 한 집에 같이 사 는 사람들도 많대.”
기승해져서 벌벌 떨던 엄마의 목소리는 적반하장으로 변했다.
“꽁생원 같은 당신만 믿다가 어느 천 년에 집사고 아이들 공부 마치고 끈 맺어 줄 건지, 나라고 고민 없이 히야 호야 하는 줄 당신은 내가 깍짓동처럼 살찌는 것만 보았지? 나는 당신이 홰치고 일어서기를 기원 하고 바랐어. 이까짓 도장쯤이야 천 번도 만 번도 찍으라는 대로 찍어 줄게. 희망도 없이 마냥 밥만 축내고 있자니 나도 좀이 쑤셨던 참에, 기 회가 왔으나 결과는 이 지경이 되었고…. 우리한테 나중에 받을 유산이 있는 것도 아니니 나라도 유산 물려주는 부모가 되고 싶었다, 당신은 산골짝 바위가 왜 부르르 떠는지 모르지? 나는 봤어. 거기 박힌 바윗돌도 앞뒤가 꽉 막힌 그 산골짜기를 벗어나서 달리 살아보고 싶었던 거야. 만약 내가 당신이라면 이런 알량한 종이 쪼가리부터 미리 내놓지는 않을 거다.”
전세를 뽑고 아버지의 직장에서 신용 대출한 돈으로 급한 불을 껐지만 거덜 난 형편을 뻔히 아는 채권자들이 부처님처럼 가만히 앉아서 기다려주겠어요? 속옷 껴입은 듯이 전신에다 파스 칠갑을 한 엄마까지 온갖 알바를 나섰지만 수입은 늘 우리의 신용이나 의리를 시험대 위에 세워서 벌거벗겨 놓곤 했죠.
과식한 여자처럼 살쪘던 엄마는 어느 샌가 목소리까지 찢어진 북소리처럼 변했어요. 격렬하게 말씨름을 하다보면 상대방의 소리가 거의 묻혀버릴 정도로.
어느 날 취직을 앞둔 작은 오빠 어학연수에 대한 의논을 하고 있었는데 빚쟁이들이 몰려들었어요. 그들의 벌떼 같은 반응은 불 보듯 뻔하잖아요. 피 같은 남의 돈은 안 갚으면서 비싼 돈 들여서 유학 보내는 것 보니 어디 숨겨 놓은 돈다발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오늘은 절대 맨손으 로 그냥 안 가겠다고 방바닥에 눕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들 앞으로 썩 나선 우리 엄마의 반응이 어땠는지 상상이 돼요?
“당신들은 돈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돈줄까지 막으러 왔다. 돈은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데 내 아들이 황금 돈줄을 끌고 오면 누구 먼저 갚 아줄까? 돈 받기 싫은 사람들은 우리 자식들 손발 다 묶어놓고 같이 있 어보자. 그깟 돈 백억도 안 되는 거 이승에서 못 갚으면 저승에서라도 꼭 갚지 떼먹을 나 아니다.”
당연히 어학연수를 포기하는 오빠에게 엄마가 뭐랬는지 아세요? 빚 이 걱정이면 너희들이 공부해서 그 실력으로 벌어 갚으면 되지. 사내가 그렇게 패기가 없어서야 어떻게 이 세상을 헤쳐나가노. 너의 부친 말대로 일확천금에 눈이 멀었던 내가 잘못이지 네가 무슨 잘못이냐. 너 좋을 대로 세상이 너 따라 오는 줄 아니? 어떻게든 넓은 세상을 밟아야 장래가 있다. 돈 걱정은 말고 가서 공부나 해라. 
동료나 친지들 낯 보기 부끄럽다고 밖으로 나서지 않으려는 아버지 대신, 엄마는 더욱 말이나마 궁지에 몰린 가족들을 지킬 수문장은 자신 밖에 없다 여기는 거였지요. 나는 그때 코웃음을 쳤어요. 십 억 남짓한 돈을 백억으로 부풀려서 큰소리치는 어머니의 가당치도 않은 허풍. 나 는 엄마의 유들유들함에 대한 혐오를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가난하면 줄여 먹고 입는 것은 당연지사로 받은 가정교육이 있기 때문에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내가 번 돈이 내손으로 만져보지도 못하고 뚝뚝 잘려서 남의 손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갓 이십대를 맞이한 내가 받는 고통으로서는 너무 허무하고 가혹했어요.
게다가 더 환장할 것은 우리 엄마의 허세와 분수 모르는 오지랖입니 다. 신용을 지키기 위해서 여기서 빌린 돈으로 저쪽 돈을 갚느라 달려 갔고 또 약속한 제 날짜를 어기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은 엄마다 운 양심이라고 봐 넘길 수도 있지요. 사람 상대를 많이 하니까 언변도 늘고 이해의 폭도 한다한 남자들 뺨치게 푼수가 넉넉했죠. 속으로는 시련 속에서 따로 얻어지는 것도 있구나, 놀랍기도 했고요. 그런데 그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식구끼리만 밥을 먹어본 적이 별로 없어요. 이웃에 는 밥 굶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엄마는 밥 굶었지 싶은 사람이 지 나가면 너도 오라 너도 오라 숟가락을 들려 주었죠. 정작 식구들 중 누군가 불편한 인상을 지으면 등을 탁 쳐서 입을 막아요. 한 끼 굶어서 안 죽는다. 그 뿐인 줄 아세요? 먹고 힘내라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는 말 이 공연히 나왔겠나. 기적이라는 것도 있다. 크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몰고 다니는 사람들 모두 다 행복한 건 아니다. 인생은 새옹지마란다. 물론 그때마다 저는 더 악악거렸고요. 그런데, 작년 우리 엄마의 72세 생일날에야 우리는 채무자 딱지를 떼고 맑은 하늘을 보게 됐어요. 세월이 모든 걸 해결해준다던 엄마의 말이 사실처럼 되어버린 겁니다. 우리 남매들은 지금 돈 부자는 아니지만 지난날의 괴로움이 키운 행복의 열 매를 품에 안고 스트레스로 뚱보가 된 우리 엄마를 위해서 피트니스클 럽에 등록을 하자 안 한다 입씨름도 했구요.
“정아 씨를 보니까 우리 엄마 부러움도 이유가 있네. 그런데 우리 엄마는 보통 사람은 이해 못할 특이함이 많아요. 앞집 이모는 나보고 이 해하라고 하지만 전 도저히 용납이 안돼요. 우리 남매들, 특히 큰오빠 는 소문 안 난 효자예요. 저기 있는 물침대며 족욕기며 또 저쪽에 있는 안마의자까지 모두 엄마가 입만 뻥긋하면 해드린 거예요. 그런데 그 얌체는 조금도 양보를 안 하는 거 있죠. 저번에 큰오빠 집에 가서도 엄마 가 약 먹고 있는 혈압 당뇨를 걱정해서, 가만히 앉아있지만 말고 이런 저런 운동도 좀하고 먹는 것도 이런 저런 걸 좀 가려 드시라고 했더니, 잔소리 말라고 화를 벌컥 내면서 당장 가방 챙겨서 갔대요. 정아 씨는 되는데 나는 왜 이해가 안 되고 속만 타는지 모르겠어요.”
“가을에 수확하는 감도 있지만 이른 봄에 나오는 딸기도 있다. 그게 우리 엄마한테 물려받은 유산인데, 정아와 진희가 똑 같을 수 있나요? ”
말하다 말고 정아가 슬쩍 의미 있는 미소를 지었다.
“진이 씨는 집안 일이 잘 안 풀리고 답답할 때 자녀들께 일일이 진심을 드러내는 편이세요? ”
“아뇨. 저것들이 뭘 알고 해결에 도움이 도겠어, 이런저런 설명을 하 기 보다는 그냥 입을 다물고 말죠.”
“나 역시 그래요. 자신이 약한 모습만 드러내는 것 같아서 그냥 덮어 두고 나만 끙끙 앓는 경우가 많아요. 저도 작년에 우리 엄마 청자 씨가 보낸 이 문자가 아니었다면 엄마 장례식장에서 뒤늦게 후회하고 통곡 의 눈물만 펑펑 흘릴 뻔했지요. 작년에 당신 생신 지나고 나서 우리 엄마가 보낸 문잔데 한 번 보실래요? ”
진이는 청자의 딸 정아가 밀어주는 폰을 받아들었다.

(전략) 네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나는 참으로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단다. 비로소 네가 내 동지가 되었다는 이 든든함은 어디서도 느끼지 못 했던 감격이었지.
그 동지에게 수십 년 숨겨 놓았던 내 변명을 이제는 좀 털어놓고 싶구나. 날카로운 지적으로 걸핏하면 나를 찌르던 내 귀여운 바늘아. 
네 아버지와 결혼은 내게 있어 죽은 나무에 꽃 핀 것 같은 부활이었다. 이유 모를 병으로 죽을 것 같던 내가‘손말명’나겠다는 소문이 파다할 즈음, 뜻밖에도 섬마을 선생인 너의 아버지가 죽다 살아난 이웃 처자의 가녀린 모습이 안쓰러워 결혼을 하겠다고 청혼을 했다. 
결혼하여 처음 나를 맞이한 허허벌판의 오두막 한 채가 너희들의 터전 이어서 나는 처음 기가 막혔다. 그 고절한 가난이 사오 대 내리 외동으로 연명해 온 시어른들의 눈물샘을 걸핏하면 자아내던 필유곡절인 것은 그 때까지 알 리 없었다. 작은 섬이지만 이집 저집이 모두 일가친척인고로 정신적 결핍 모르고 유순했던 내 인생의 유턴은 절실하게 변형이 필요했다. 신기하게도 그때 떠오른 한 생각이 큰 배의 닻처럼 내 중심을 잡아주었다. 내가 낳은 아이가 손이 번창한 집 손자로 태어나서 있는 지 없는 지 도 모르게 자라는 것 보다 훨씬 귀한 사람대접을 받고 존재감의 가치도 높을 것이다. 
나는 그때부터 내가 해야 할 역할에 대한 시야를 넓히며 현명하고 슬기로운 안총을 밝혔다.
성실했으나 뒷배 없이 핍진한 생육과정을 거친 남자는 여자보다 더 심 약한 경우가 많다. 부부를 요철로 비견한 데 비해서 견인이 필요한 지점 의 내 역할은 무모하고 용맹스럽게 개발 될 수밖에 없었다. 너희들이 노 방의 여린 잡초로 자라지 않을 튼튼한 온상을 갖추기 위해서 나는 남의 눈치보다 나 자신의 주관에 몰입해서 더 강해져야만 했다. 각오는 실천을 해야 되는 것이고 실천은 어느 결에 천성으로 바뀌더구나. 
한 인간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그 중에서 가장 보람 있고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서 실행하는 동안 자신이 가장 큰 부자 인 것을 깨닫는 순간이 바로 부자의 위치에 도달한 거란다.
봄비를 맞고 이지러지는 묵은 푸나무를 보면 내가 보이고, 그 아래서 뽀족뽀족 돋아나는 새순은 어쩜 그리 너를 닮았는지…. (하략)

청자는 이틀 후 고향 남해로 갔다. 태평양으로 통한 넓은 바다는 여 일하게 똑 같은 동작으로 대해의 물을 끌어다 바위에 부닥뜨리며 인내 의 세월을 가르쳤다. 섬이 싫어 도망가고 싶어서 미칠 듯이 숨 막히는 순간도 있었지만 인생은 파도타기의 연장이었다. 나도 오늘 같은 날이 있네요. 모양내서 입은 옷을 쓰다듬으며 청자는 곁에 누구라도 있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터 잡고 살던 일가친척들은 모두 큰 섬 아니면 육 지로 떠나고 고향인 작은 섬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가 되었다. 꼭 가보려면 낚싯배라도 대절해서 갈 수는 있겠지만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예까지 왔던 정감은 흐뭇하게 채워졌다.
돌아오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정아의 전화가 왔다. 어딘가로 또 바삐 걸어가는 쌕쌕걸음질로 전하는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엄마, 진이 씨한테 전화 왔는데, 자기 엄마 계시는 데를 드디어 찾았 는데….”
너무나 반가운 김에 청자는 앞뒤 말들을 사이도 없이 고함치듯이 소 리를 질렀다.
“아이고 잘됐다. 그럼 너도 때 맞차서 오니라. 우리 넷이서 맛난 것 해먹고 놀게.”
“엄마 제발, 오버 좀 하지 말아요! 요양병원 호스피스 병동에 있는 환자가 오기는 어디를 와.”
“뭐시라꼬? 아이고 지랄아! 우짠다꼬, 자기 몸 그런 걸 혼자만 숨카 왔을꼬. 아이고, 나도 지 친구는 아이던가베. 거기는 말기에 황천길 닦으러 가는 곳이라는데.”
어이없는 청자의 의식 속에서 황복을 국 끓여먹겠다며 유난히 기승하게 굴던 윤희의 최근 모습이 떠올랐다. 병줄을 숨긴 채 혼자 앓아 누운 환자를 향해 선심 쓰는 듯 윽박지르며 꾀병 하지 말라고 디밀었던 보말 죽 한 그릇까지. 그 사이 울먹이는 음성으로 정아의 다짐이 건너왔다.
“엄마, 편하고 만만하다고 속상하면 툭툭, 뒷동산 바위처럼 차면서 예의도 없이 대들었는데 인생의 스승을 몰라봤어. 이제부터라도 잘할 게, 제발 건강하게 오래만 살아줘.”
청자는 실쭉 아심찮은 웃음을 머금었다. ‘막부작침’이라꼬 너 아부지 가 했던 말이 있다. 그러나 청자는 으스러져라 정아를 껴안아주고 싶었다. 티격태격, 아웅다웅. 별것도 아닌 이유로 참 많이 다투었다. 그러다 가 윤희네처럼 이렇게 앙금만 남긴 채 어이없는 작별로 끝나지는 않을 까. 엄습하는 두려움이 겁난 청자는 이미 꺼진 전화기 속으로 검붉게 젖은 고백을 쏟아붓는다.
“딸아, 나도 잘못했다. 언제까지 에미 품에 안겨서 젖 빨아먹던 어린 자식으로만 생각했지. 에미가 에미답지 못하게 시건이 좁아서 참말로 미안하다.”
부모 자식도 모두 각각이며 타인이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혈연의 분별없는 연대감은 그 인식을 늘 망각한 채 후회할 일을 만든다. 남의 일 같지 않은 윤희의 일로 망연자실한 청자는 노둣돌처럼 오뚝, 앉은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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