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55
1
‘6·25전쟁’이라고도 하는 한국전쟁이 휴전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어.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어.
학교 뒷동네에 분이네 집이 있었는데, 마당에 살구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어. 살구나무는 봄이 되면 꽃이 활짝 피어 눈이 부 실 정도였어. 벌들도 모여들어 종일 잉잉거렸고….
나는 늘 가던 길로 가지 않고 되도록 분이네 집 앞으로 돌아가곤 하였어.
“얘, 너희 집은 학교 앞에서 바로 냇물을 건너는 것이 더 빠르 잖아? ”
어쩌다 분이가 골목에 나와 있다가 한 마디 하면, 나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꽃도 꽃이지만 사실은 분이를 보러 갔기 때문이었어.
“어, 어! ”
나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얼른 골목길을 내달려야 했어.
‘이그으! ’
나는 도망치듯 달려와 냇물을 얼굴에 끼얹었어. 그래도 자꾸만 화끈거렸어.
그 뒤, 어느 날 학교에 갔을 때였어. 나는 보지 않는 척하면서도 분이가 뭘 하는지를 살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어.
“자, 앞을 보세요.”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무거운 소리로 입을 여셨어.
“오늘은 아주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주겠어요. 이 이야기는‘참된 용기란 무엇인가? ’에 대한 이야기이니 잘 듣고, 그 느낌과 생각을 일기장에 써와야 합니다.”
교실은 잠시 침묵에 젖었어. 분이도 주먹을 바투 쥐고 선생님을 바라 보고 있었어. 선생님이 이야기를 시작하셨어.
옛날 어느 마을에, 머슴들이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밤이 점점 깊어지자 한 머슴이 불쑥 말했어요.
“우리들 중에서 누가 가장 담이 셀까? ”
그러자 두어 사람 입에서 억쇠라는 이름이 동시에 튀어나왔어요. “억쇠이지. 억쇠는 이름에서부터 억세다는 느낌이 들잖아.” “그래, 팔뚝도 우리들 중에서는 가장 굵고! ”
그런데 억쇠는 낮에 일을 많이 해서인지 새끼줄 뭉치를 베개 삼아 이미 잠들어 있었어요.
“이봐, 억쇠! 억쇠! ”
머슴들이 억쇠를 흔들어 깨웠어요.
“으음….”
억쇠는 돌아눕기는 해도 눈은 뜨지 않았어요.
“안 되겠다. 벌써 곯아떨어진 것 같네. 억쇠를 깨울 구실이 없을까? ” “좋은 수가 있지. 상을 걸고 내기를 하는 거야. 쌀 한 가마니면 어때?
하루 저녁에 그 정도이면 누구나 탐나지 않겠는가? ”
“그건 그렇군. 그런데 무엇으로 담이 세다는 것을 알아보지? ” “혼자 뒷산 공동묘지에 가서 말뚝을 박고 오게 하면 어떨까? ”
“그보다는 앞산 깊숙이 있는 빈 절에 가서 부처님 손가락 하나를 뚝 따오게 하면 어떨까? 그 절은 폭격에 허물어져서 모두 무서워하잖아! ”
“으음, 부처님 손가락이라, 그게 더 좋겠는 걸.”
머슴들은 모두 몸을 부르르 떨었어요. 아무도 해낼 수 없다는 표정이었어요.
“자, 다시 억쇠를 깨워서 갔다 올 수 있는지 알아보세.”
“이봐, 억쇠! 일어나 보게! 앞산 절에 갔다 오는 사람에게 우리가 쌀을 거두어 한 가마니 주기로 했네.”
그러자 억쇠는 겨우 부스스 일어나 기지개를 켜면서 말했어요. “그게 무슨 대수라고 벌벌 떨고 있는 거야. 내가 갔다 오지. 쌀이나
거두어 놓게.”
억쇠는‘커읍커읍! ’기침을 하며 일어나 골짜기로 향했어요. 달빛에 비친 억쇠의 그림자가 안개 속에 싸여서 물감 번지듯 사라지고 있었어 요. 머슴들도 억쇠 몰래 뒤따라 나섰어요. 억쇠는 골짜기 입구에 이르자 큼직한 검은 바위를 향해 고함을 질렀어요.
“이놈의 곰이! ”
억쇠는 굵은 돌멩이로 바위를 내리쳤어요.
따닥! 돌멩이가 튕겨 나왔어요.
“에이! 곰이 아니고, 바위였구나! ”
억쇠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는지 계속 앞으로 나아갔어요. 다리는 계 속 후들거리는 것 같았어요.
마침내 절이 나왔어요. 절에는 무너진 담장 대신에 나무판자가 몇 개 둘러쳐져 있었어요. 그 판자에는 옹이가 빠진 자리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흡사 사람 머리뼈의 움푹 들어간 두 눈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아니, 이놈들이 나를 노려보고 있네! ”
억쇠는 중얼거리며 나무막대를 주워들고는 마구 내리쳤어요. 그 바람에 습기를 머금은 판자가 부스스 무너져 내렸어요.
“그럼, 그렇지! ”
억쇠는 마침내 절 마당으로 성큼 들어섰어요.
“자, 이제는 말려야 할 것 같네.”
“그래, 정말 손가락을 떼게 할 수는 없어! ”
뒤따라온 머슴들이 달려들어 억쇠를 붙잡으려 했어요. 그런데 억쇠는 무엇에 쫓기기라도 하는 듯 어느새 법당 안으로 쑥 들어가 버렸어 요. 그리고는 잠시 뒤에 무엇인가를 움켜쥐고 뛰쳐나왔어요.
“으으 으아! ”
억쇠가 쥐고 있는 것은 정말 부처님 손가락이었어요. 그 손가락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억쇠는 뒤따라 와서 마당에 빙 둘러서 있는 검은 모습의 머슴들을 바라보고는 더욱 크게 비명을 내질렀어요.
“누구냐, 누구냐? 으아아! ”
억쇠는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못 알아보았어요. 억쇠는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어요. 억쇠의 몸에서 똥냄새가 풍겨져 나 왔어요.
“으아아! ”
우리들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말고 일제히 고함 소리를 내질렀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모두 옆 사람의 손을 잡으며 벌벌 떨었어.
그때, 마침 검은 구름 사이로 번갯불이 번쩍 치고 뒤이어 천둥까지 뒤 따라 터져 나왔어.
꽈르릉 꽝꽝!
우리들은 다시 비명을 내질렀어.
“으아아 아! ”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님이 이야기를 하면서 칠판을 내리치고 발을 쾅쾅 구르신 것이었어. 심지어는 빨강색 머큐롬을 솜에 묻혀 쥐고 있다가 피처럼 짜내기도 하셨어. 우리들은 더욱 정신이 나가서 살을 꼬집어 보아야만 했어.
그때 나는 결심했어.
‘그래, 안 되겠구나. 며칠 전, 성당에서 몰래 주머니에 넣어 온 이 하얀 석고상을 돌려주어야 하겠어. 아무래도 선생님은 내가 석고상을 가 져온 것을 아시고, 그 무서운 이야기를 하셨을 것 같아.’
며칠 전,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에 새로 지은 성당에 구경 갔을 때였어. 코가 높고 눈이 파란 서양 신부가 왔다고 하여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어. 그때 창가에 주먹만 한 하얀 석고상이 하나 놓여 있었어. 흰 면사포에 입술이 붉게 칠해져 있어서 마치 인형 같았어.
순간, 나는 분이를 떠올리며 그 석고상을 얼른 내 주머니 속에 넣었던 거야.
‘이거 분이한테 갖다 주어야지. 분이는 아직 이런 걸 보지 못하였을 거야. 그런데 혹시 분이가 받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
나는 생각 끝에 오늘 집에 갈 때, 분이보다 먼저 가서 살구나무 밑에 석고상을 몰래 놓아두고, 멀찌감치 보리밭에 숨어서 지켜보려 했는데, 하필이면 선생님이 그 무서운 이야기를 하셨던 거야.
시간을 마치고 아이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는데도 나는 우물쭈물 교실에 남았어.
“정남수, 너는왜집에가지않니?”
“저어, 선생님! 며칠 전에 제가 이걸 성당에서….”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어.
“아니 이건 성모 마리아상이잖아, 선생님과 함께 성당에 가서 돌려드리도록 하자.”
나는 선생님과 함께 성당으로 향했어. 가는 동안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어. 성당에서 뭐라고 할지 걱정되었던 거야.
“신부님, 우리 학교 학생이 이 성모님 상을 가져왔기에 도로….” 그런데 신부님은 의외였어.
“아넵네다. 괜찮습네다. 성모님이 이 어린 친구를 우리 성당으로 인도하셨군요.”
작은 성모상은 본래 자리에 놓여졌어. 그리고 돌아섰을 때였어. “어머, 이렇게 예쁜 부인상도 다 있네! ”
분이 목소리였어. 아마도 분이는 성당에 처음 구경을 왔는지 몇몇 여자아이들과 함께 신기한 듯 성당을 둘러보고 있었어. 우리 뒤로 금방 따라온 것 같았어.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분이를 건너다 보았어. 분이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나에게 손짓하였어. 아마도‘너도 여기에 와서 이 성모상을 한번 봐’라고 하는 것 같았어.
‘휴, 그래도 다행이다. 분이가 저 성모상을 좋아하다니! ’ 나는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