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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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_ 정소영(33세, 딸)|모성자(59세, 엄마)
무대_ 원룸 형태의 공간. 좌측은 침대와 1인용 쇼파가 있는 개인공간이고 우 측은 부엌과 식탁이 놓인 공용공간이다. 부엌 뒤쪽 출입구를 통해 세 면실 및 다른 공간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지만 무대에서 보이지는 않는다.
칠흙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집 안. 키폰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검은 정장을 입은 소영이가 들어온다. 가방의 무게마저 이길 기력이 없어 보이는 소영.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질질 끈다. 겨우 침대에 몸을 눕히더니 이내 쏟아지는 눈물. 슬픔에 겨운 듯 꺼이꺼이 운다. 무슨 일 인지 알 길 없는 소영의 감정에 집 안의 분위기는 더욱 무겁고 어두워진다.
암전.
어둠 속에서 어렴풋하게 들리는 소리. 엄마의 목소리, 잔소리다. 엄마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하면 집 안도 서서히 밝아진다.
성자 (목소리) …벗어 놓기만 하면 빨래가 되는 줄 알지. 제 손으로 세탁기를 돌려봤어, 빨래를 널어봤어! 빨아서 말려 놓은 옷도 못 개 켜! 벗은 옷이라도 세탁기에 넣든가! 지가 나라를 구해, 기업을 살려? 기껏해야 책 나부랭이 만들면서… 으이그!
엄마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소영. 누워 있던 침대에 앉는다. 두리번거리면 주위 살피면 다목적실에서 마른빨래 걷어서 들고 들어오는 엄마, 모성자를 본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빨래더미를 들고 들어오는 성자. 투덜거리며 집 안 으로 들어온다.
성자 양말은 왜 뒤집어 벗는 건지… 발 씻을 때 호작호작 빨믄 좀 좋 아. 에미 알기를 몸종으로 알어. 시집을 가야 지 에미 손 귀한 걸 알지….
소영, 성자를 바라보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성자만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소영. 성자는 빨래더미를 들고 들어오다가 검은 정장을 입고 멀뚱히 서 있는 소영을 보며 화들짝 놀란다.
성자 아이구 깜짝이야! 저승사자라도 온 줄 알았네!
소영, 황급히 입고 있던 재킷을 벗는다. 성자, 무대 중앙에 철퍼덕 주저앉 아 빨래더미를 개키기 시작한다. 어찌할 바 모르는 소영,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서 있다.
성자 별일이네! 깨우지 않아도 일어나고!
소영 …….
성자 (갑자기 든 생각에 빨래 개키다 말고 소영을 향해 돌라보며) 너, 씻지도 않고 그 꼴로 잔 거야? 어우어우!
소영 엄마….
성자 화장만 뺀지르르 하면 뭐해! 씻기를 잘 씻어야지! 남자들, 그걸 알아야 되는데. 화장이 진할수록 감출 게 많다는 거! 향수 이런 거 쓰는 여자들 특히! 어우, 내가 아들이 없어 다행이지. 그런 며느리를 어떻게 봐!
소영 엄마…!
성자 어우, 칙칙해! 젊은 애 옷 입는 취향하고는! 밝고 화사하게 입어 도 모자랄 판에 검정색이 뭐야! 그런 옷은 니 엄마 죽을 때나 입어라!
소영 엄마!
성자 (귀찮다) 왜! 왜 자꾸 불러대는데!
성자, 소영을 향해 돌아보자 막상 할 말이 없는 소영, 머뭇거린다.
성자 (애써 모르는 척 딴 소리하듯) 너, 또 꿈꿨지?
소영 꿈?
성자 내가 널 몰라! 니가 지금 딱 악몽 꾼 날 보이는 행태네! 그러니까 니가 아직도 덜 자랐다는 거야! 꿈은 그냥 꿈일 뿐이지 그걸 갖고 아침부터 오줌까지 지리고 쯧쯧.
소영 (자신의 몸을 훑는다) 아닌데? 오줌 안 지렸는데?
성자 여태 오줌까지 지렸으면 니 등짝이 남아 있겠니! 나한테 확 두들겨맞지!
성자, 개킨 옷가지를 소파에 가지런히 놓는다. 여전히 멀뚱거리고 서 있는 소영. 성자, 지나가려다가 소영을 보며 불만스럽게 쳐다본다.
성자 개켜 놓은 것도 못 갖다 넣어?
그러자 소영, 개켜진 옷들을 들고 서랍장 있는 무대 우측 뒤쪽으로 이동한 다. 성자, 부엌에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하면서 옷 방에 간 소영을 향해 잔소리를 한다. 보이지 않아도 보이는 듯 시작되는 잔소리.
성자 귀찮다고 한칸에 밀어 넣지 말어! 나중에 찾기 쉽게하려면 정리 할 때 분리하는 게 좋아! 속옷은 첫째 칸에 넣고, 상의 두께에 따라 둘째, 셋째 칸에 나눠 넣어, 맨 마지막 칸엔 바지나 치마 같은 하의 넣구. 기준 없이 대충 쑤셔 넣기 시작하면 나중엔 대책 없어. 처음에 기준을 세우면 어려울 게 없지. 그래서 매사 기준을 세워 야 하는 거다. 참! 양말은 행거 아래 있는 바구니에 따로 넣고! 그 리고, 너 입고 있는 칙칙한 옷 당장 벗고 화사한 옷으로 입어. (혼 잣말처럼) 이럴 때 일수록 화사해져야 돼. (밥상 차리다 한숨 쉬며) 세상 남자가 어디 그놈 한 놈뿐이라니! 겨우 남자와 헤어진 거 갖고 세상 무너지는 꼴로 다니니… (속상하다 혀 끝 차며) 으이구!
이때, 옷 갈아입고 나오는 소영. 집에서 입는 환하고 편한 복장이다. 소영, 투덜거리며 밥상 차리고 있는 성자의 뒷모습 보며 배시시 웃음난다. 엄마의 잔소리와 시작되는 아침, 여느 아침과 똑같은 하루의 시작이다. 소영, 성자의 모습을 담아두려는 듯 빤히 쳐다보고 서 있다. 그런 소영의 모습을 보던 성자.
성자 왜그래?
소영 (빤히 쳐다본다)
성자 (마주보다가 얼굴 매만지며) 왜? 뭐 묻었어?
소영 (고개 저으며) 아니…. 쉬는 날이라서.
성자 웬일이래? 에미 생일날에도 출근하던 회사를 다 쉬고!
소영, 기분 좋게 침대에 몸을 던지며 눕는다.
소영 이런 날도 있어야지!
성자, 소영의 행동에 뭔가 꺼름직한 듯 조심스럽게 묻는다.
성자 다시 만나기로 했니?
소영 (고개 외면하며) 아, 니!
성자 (넌지시) 걔네 집에선 별 얘기 없는 거야?
소영 무슨 얘기?
성자 아니 뭐, 나처럼 반대할 수도 있는 거고….
소영 날 반대하는 집으로 시집가기를 바라?
성자 누가 그렇대? 암튼! 걘, 애저녁에 글른 놈이야. 잘못했다는 얘기도 안 하겠지만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말어.
소영 (아무런 반응 없다)
성자 (그런 소영의 태도가 불안스러워) 어?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소영 (침대에 누워 있는 채로) 싫다는 이유가 뭐야? 처음엔 좋다고 했잖아. 성자 (할 말이 딱히 없다. 외면하며) 뭐, 좋아하는데 이유 없다며? 싫어하
는 것도 마찬가지야.
소영 명확한 이유 없으면 주장하지 마. 선택은 내 몫이야. 같이 살아도 내가 하고 결혼을 해도 내가 해.
성자 이유가 있으면 엄마 말 들을 거야?
소영 (자신 없다) 아니. 어쩌면, 아마도. (발끈) 시집가라고 재촉했던 건 엄마야. 별 놈 없다고 세상남자 다 거기서 거기라고 아무 놈 잡아 서 시집가라고 할 땐 언제고!
성자 나이가 적당히 찬 놈으로 고르랬지 언제 어린 놈 데려오랬니? 소영 고작 2살이야.
성자 정신연령이 어리잖아. 다 합치면 열 살은 족히 어리겠더만. 애 키 울래? 다 큰 성인 남자애? 그거 고역이다.
소영 열살 정돈 아니야.
성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른이 묻는 말에 대뜸 엄마한테 물어봐야 한다니! 그 얘기가 그렇게 쉽게 나온대니!
소영 그거야, 엄마가 장모 모시고 살 수 있냐고 물었으니까….
성자 그래, 물었어! 물어봤어! 어떤 놈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 놈인지 볼라고! 그러니까 텄다고! 자기 생각도 기준도 없고 책임부터 떠 넘기는 모자란 놈. 뜯어먹고 살건 얼굴뿐인 놈, 무슨 미련으로 정리를 못해?
소영 엄마가 반대하는 이유가 그게 아닌 거 같으니까.
성자 (머뭇거리다가) 학력도 떨어지고 집안도 떨어지고 다니는 회사도 후져.
소영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앉으며) 엄마!
성자 걔, 너 대기업 다니는 거 때문에 붙잡으려고 그러는 거야! 몰라? 소영 알아. 그게 나빠? 내 노력으로 얻은 내 백그라운드, 그걸 좋아해주고 선택하는 게 어때서?
성자 후져. 다 후져. 직업도 인물도 인간도 걔네 부모도!
소영 남들이 보면 우리 집이 더 후져.
성자 아니! 그래도 우린 떳떳해. 없이 살았어도 너 공부 시킬 만큼 시켰고 남들한테 손가락질 안 받게 키웠어. 남의 꺼 뺏어가며 풍족하게 살지 않았다고.
소영 (보면)
멈칫하는 성자, 애써 소영의 시선을 피한다. 소영, 침대에서 일어나 식탁 쪽으로 걸어온다.
소영 아빠…지? 아빠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성자 니 아빠 죽은 게 언젠데 아빠를, 들먹여….
소영 상견례하고부터 엄마이랬어. 처음부터 성근이가 문제였다면 상견례까지 가지도 않았을 거잖아.
성자 (못 듣는 척 딴짓하며) 가만 있어 보자, 양파 사온 걸 어디다 뒀더라….
성자, 황급히 다목적실로 간다. 퇴장. 소영은 성자의 태도에 화가 치민다.
소영 매사 이런 식이야! 엄마는 엄마 하고 싶은 말만 늘어놓으면 다 끝 난다고 생각해! 내가 쓰레기통이야? 엄마 감정과 생각을 받아내는 쓰레기통이냐고! 그저 세상을 먼저 살아봤다는 이유로 다 아는 척 정답지를 내밀지만 정작 엄만 성공자가 아니잖아. 엄마도 나와 똑같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인데 왜 자꾸 엄마 정답지에 맞춰 살래? 채점해보면 오류투성인 엄마 삶을!
이때, 다목적실에서 양파 들고 나오는 성자. 소영의 외침에도 개의치 않고 싱크대로 가서는 양파를 다듬는다.
성자 그러니까! 똑같은 오류, 너는 반복하지 말라고.
소영 어차피 정답지는 각자 몫이야.
성자 그런 생각이 똑같은 오답을 쓰게 만들어. 에미 팔자 딸이 닮게 된 다는 말처럼.
소영 (성자를 빤히 쳐다보며) 엄마와 난 달라.
성자 나와는 다르게 살라고 널 공부시켰다.
소영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살았어.
성자 그럴 거면 에미를 기준으로 잡지 말았어야지. 기준부터 바꿔. 소영 엄마 생각대로 사는 거 답답해. 갑갑하고 지긋지긋하다고! 언제까지 좁아터진 그곳에서 살라는 거야? 그 생각만 하면 두통부터 밀려온다고!
성자 나도 너 생각만 하면 가슴부터 답답해진다. 그러니까 우린 도찐 개찐이야.
소영 엄마!
성자 (소영 보며) 딱, 너 같은 딸 낳아 키워라. 그럼 알게 되겠지!
소영 날 언제까지 애처럼 다룰 건데?
성자 니가 내 새끼로 남아 있는 날까지.
소영 내가 아직도 아빠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생각해?
소영의 얘기에 가슴 철렁한 성자, 애써 티내지 않고 하던 일마저 한다.
소영 아빠가 원양어선 탔고, 큰 바다에서 사고 나서 돌아가셨다는 거 다 거짓말이잖아.
성자 (멈칫)
소영 초등학교 4학년 때 나, 아빠 만난 적 있어. 성자 …….
소영 아빤, 하루 종일 바다일 하는 사람처럼 새까맣게 그을리지도 않았고, 가난한 사람 같지도 않았어. 말하는 모습이 선생님처럼 부드러웠고 많이 배운 사람처럼 보였고, 잘생겼고 말끔했고 젠틀했어. 아빤 그때 멋진 차도 타고 있었고 엄마가 얘기한 것과는 완전 다른 모습이었다고.
성자 지가 애비라고 하든?
소영 그렇게 느꼈어.
성자 (대수롭지 않게) 멀쩡하고 번듯해 보이는 외모에 아빠 없는 설움이 풀렸으면 그것으로 됐어. 그건, 아빠였으면 하는 바람이 만든 너의 공상이고 상상이고 허상이야. 니 아빤 죽었어.
소영 엄마!
성자 모든 진실이 다 힘이 되고 득이 되는 건 아니야. 살아 있는 게 죽어있는것만못할때도있어.
소영 결국 아빠라는 얘기네.
성자 …….
소영 난, 아빠 손잡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거야.
성자 기어코 반대하는 결혼을 하겠다는 거야?
소영 말했잖아! 결혼을 해도 내가 하는 거고 정답지를 써도 내가 쓰는 거라고.
성자 그럼 에미 없는 결혼식 치러. 삼십년 넘게 널 품은 에미가 안 된 대도 기어코 하겠다는 결혼이면!
소영 엄마!
성자 니 아빠가 여전히 멋질 거 같애? 네가 결혼식 한다고 와주십사 하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올 거 같냐고? 그런 인간이면 지금까지 이렇게 살지 않았어.
소영 지금부터 달라지면 되잖아.
성자 네가 이 모양이니까 내가 잔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도 세상이 네 믿음대로 바람대로 돌아갈 거 같애? 언제까지 그런 애 같은 생각 에서 살 거야?
소영 믿고 싶은 대로 믿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가르친 건 엄마야! 성자 그래서? 지금 우리 대화가, 우리가 사는 게 네 믿음대로 사는 거
니? 이런걸네가꿈꾼거야?
소영 …….
성자 너 편한 대로 갖다 붙여 놓고선 나보고 책임져라 하지 마. 네 말처럼 나도 오답지 맞춰가는 사람들 중 하나니까.
소영 (지겹다) 그냥 좀! 솔직해지면 안 돼? 아닌 척, 괜찮은 척, 쿨한 척 마음하고 다르게 하지 말고 이젠 좀 얘기해 줄 수도 있잖아. 내가 알아도 되는 거 아니야? 내 부모가 왜 같이 살지 않는지, 왜 증오 하며 사는지…!
성자 자식이라도 부모의 모든 걸 다 공유할 이유는 없어. 그럴 권리까지 너한테 있는 건 아니야!
성자, 퇴장한다. 말이 통하지 않는 엄마에게 화나고 분통터지는 소영. 소리와 감정을 발산하지 못한 채 주저앉는다. 꾹꾹 감정을 누르며 가슴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는 소영. 몸을 움츠린다.
소영 엄마의 인형놀이 속 인형이 된 기분이야. 옷이 흐트러지면 안되고 걸음걸이가 삐뚤면 안 되고 자세는 늘 올바르고 말은 또박또박하게. 어른들에게는 늘 웃으면서 먼저 인사했고 교통질서, 학교 규율은 반드시 지켜야 했어. 때론 부당한 요구를 강요받아도 남들이 본다는 이유로 난 양보해야 했지. 늘 안 되는 거 투성이었어. 왜냐면 난 아빠 없는 아이였으니까. 그게 늘 내 이름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기억되었으니까. (씁쓸) 늘 남들보다 더 바르고 착 하고 똑똑해야만 친구가 될 수 있는 최소 요건을 갖출 수 있었지. 친구들과 똑같이 내 기분, 내 생각을 표현하면 반항이라 했고, 모 든 이유에‘아빠 없는 애’가 된다는 걸 알면서부터는 멈췄어. 그 냥 엄마가 하라는 대로 좋아하는 대로만 하니까 엄마도 사람들도 날 칭찬했지. 내 마음이 어떤지 중요하지 않았던 거야. 그들이 보고 싶은 대로 재단하고 판단했던 거지. 그래도 엄마는 다를 거라고 생각했어. 엄마가 하라는 대로 엄마가 원하는 말, 좋아하는 대로 해주길 바래. 그게 내 역할인 거야. 엄마의 잔소리에 맞춰 그 대로 행하는 인형.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깨달아도 익히지 못 해 끊임없이 들어야 하는 잔소리. 구구절절 맞는 말뿐이라서 듣기 싫다. 진리가 책을 통하면 명언이지만 엄마를 통하면 잔소리 가 되는 이유다. (사이) 엄마는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알까…?
성자, 뚝배기 들고 등장한다. 밥상을 차리는 성자, 평상시와 같은 분위기 다. 멀뚱히 앉아 있는 소영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성자 뭐해! 출근 준비 안 해? 에미 생일상 차려줄 시간 없이 바쁘다는 애가 오늘은 왜 이렇게 늘어져 있는 건데!
소영, 성자를 돌아보다가 조용히 일어선다. 화장실로 이동하려 한다.
성자 밥 먹구 씻어! 먹구 씻으면 이빨 닦기에도 좋잖아. 소영 아침 안 먹는 거 알잖아.
성자 바꿔! 커피, 그게 어디 밥이야! 물이지.
소영 밥 먹으면 부대껴.
성자 커피 마시면 속 버려. 빈속에 약되는 건 밥밖에 없어!
소영 아침 먹으면 점심 안 먹히고 하루 내내 불편해.
성자 습관 들면 괜찮아. 일주일만 지나 봐. 안 먹으면 허하지.
소영 (한숨 쉬며 피곤하다는 듯 인상 쓴다)
성자 너, 나 못 이겨. 그니까 밥 먹어.
결국, 식탁에 앉는 소영. 마주 앉아 있는 모녀. 성자, 소영의 앞으로 뚝배기를 내민다.
성자 자! 너 좋아하는 된장찌개.
소영, 성자를 빤히 본다. 그러자 성자, 얼른 먹으라고 독촉한다.
소영 (밥 먹으며) 난 김치찌개가 더 좋아.
성자 김치찌개 그거 순 돼지고기 맛이지! 된장이 더 좋은 거야. 이번 된장은 메주가 아주 제대로 삭혀진 걸로 만들어진건데….
소영 엄마 먹어! 그렇게 좋은 건 엄마가 다! (밥과 김 먹는다)
성자 (소영 보며 화제 돌린다) 아침은 늘 간단하게라도 꼭 챙겨 먹어. 밥 에 김만 두어 번 싸먹어도 든든하지.
소영 …….
성자, 투덜투덜 하면서도 밥 먹고 있는 소영을 예쁘게 바라본다.
성자 냉동실에 찌개 종류 별로 얼려 있어. 하나씩 꺼내 데우기만 하면 돼. 시간 날 때마다 만들어서 냉동실에 얼려둬. 바쁠 때 시간 절약되고 남아서 버리지 않아서 좋아. 시골 삼촌한테 연락하면 육종마늘 껍질 까서 택배로 붙여 줄 거다. 받아서 썩히지 말고 믹서 기로 다져서 냉동실에 넣어둬. 필요할 때마다 톡톡 잘라 쓸 수 있게 납작하게 얼려야 해. 칼집 넣는 거 잊지 말고.
소영 (성자 보면서) 어디 가?
성자 널 훈련시켜 놔야 언제든 맘 편히 갈 수 있지.
소영 (밥 먹으며) 닥치면다한대. 걱정말고가고싶은데있음가. 성자 (조금 서운한 듯) 진짜…? 우리 딸 닥치면 다 할 수 있어?
소영 엄마 말대로 내 나이가 몇인데? 예전 같으면 자식 서넛은 낳았을 나이라며! (수저 놓고 밥공기 내보이며) 세 숟갈 먹었어. 됐지?
소영,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퇴장. 성자, 조용히 밥상을 치운다.
식탁 의자에 다소곳이 앉는 성자. 화장실에서 씻고 있는 소영을 기다리는 모양새다. 이때, 머리 감은 듯 길게 늘어뜨리고 나오는 소영.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웃고 있는 낯선 성자를 본다. 평소 성자의 말투와 행동이 사뭇 다르다 는 느낌에 짐짓 당황한다.
성자 아침 10분 일찍 일어나면 하루를 길게 쓸 수 있어. 꼭 5분, 10분 늦게 일어나서 쫓기는 거야. 설거지는 그때그때 해. 늘 뒷손 안 닿게 한 번 할 때 깔끔하게 하고. 행주도 깨끗이 빨아 널고 이틀 에 한 번은 꼭 삶아야 해!
소영 지금 가려고?
성자 (고개 끄덕이며) 왜? 간다니까 아쉬워?
소영 (이상하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누가 아쉽대…. 가서 재밌게 놀아.
성자 그래. 그래야지. (일어서며) 구구절절 할 말이 많을 거 같더니…
(고해성사 하듯 머쓱하게 웃으며) 그때 좀 찔렸었어.
소영 (보면)
성자 니가 그랬잖아. 자식이 무슨 보험증서냐고! 그거 쥐고 흔들지 말라고 대들었을 때, 실은 진짜 그랬거든. 내가 쥔 마지막 보루, 나한텐 늘 너였어. 두고두고 흔들고 싶었던.
소영 (미안스럽다) 그건 그냥, 내가 홧김에 한 말이지. 뭘 그걸 마음에 두고….
성자 엄마는 자식 말을 가슴에 남기게 마련이다. 아무리 할퀴는 말이라도 내 새끼 말이니까 다시 보고 다시 곱씹어.
소영 엄마, 용돈 필요해? (지갑 찾다가) 나중에 회사 가서 송금할게. 성자 (환하게 웃으며) 그래! 많이 보내. 티 나게 돈 좀 써 볼란다.
소영 알았어.
성자 (기분 좋게 웃으며 가다가 돌아보며) 늘 고마웠고 그래서 좀 창피했다. 너한테 멋진 엄마가 되고 싶었는데… 나도 아빠도, 네게 걸림돌이 된 건 아닌지.
소영 …….
성자 선택은 네 몫이지만 가끔은 엄마 얘기 잊지 마. 늘 옳지 않아도 긴히 필요할 때도 있을 거야.
성자, 조용히 문 밖으로 나간다. 퇴장. 성자의 모습을 먹먹하게 바라보고 서 있던 소영. 이상한 생각에 뒤따라 나간다.
소영 엄마, 엄마!
성자를 부르며 뒤따라 나가는 소영. 퇴장. 소영에게 쉼 없이 얘기하던 성자의 목소리, 잔소리가 울린다.
성자 (목소리) 벗어놓기만 하면 빨래가 되는 줄 알지! 시집을 가야지 에미 손 귀한 걸 알지…. 귀찮다고 한 칸에 밀어 넣지 말어! 나중에 찾기 쉽게 하려면 정리할 때 분리하는 게 좋아! 이럴 때일수록 화사해져야 돼. 세상 남자가 어디 그놈 한 놈뿐이라니! 커피 마시면 속 버려. 빈속에 약되는 건 밥밖에 없어! 시골 삼촌한테 연락하면 육종마늘 껍질 까서 택배로 붙여 줄거다. 받아서 썩히지 말고 믹서기로 다져서 냉동실에 넣어둬. 필요할 때마다 톡톡 잘라쓸수있게납작하게 얼려야 해. 칼집 넣는 거 잊지 말고. 행주도 깨끗이 빨아 널고 이틀에 한 번은 꼭 삶아야 해! 늘 뒷손 안 닿게 한 번 할 때 깔끔하게 하고. 아침 10분 일찍 일어나면 하루를 길게 쓸 수 있어. 꼭 5분, 10분 늦게 일어나서 쫓기는 거야….
집 안으로 다시 들어오는 소영. 무겁고 묵직한 걸음이다. 엄마의 잔소리가 곳곳에 묻어 있는 집 안. 엄마는 없고 잔소리만 남겨진 집에 소영만 혼자 덩 그러니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