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4년 10월 66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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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에 하늘을 보면 은하수가 훤히 나타나는 청정지역에서 나는 태어나고 자랐다. 책 읽기를 좋아해서 작은 학교의 도서관에 있는 책은 모조리 읽었으며 언제부터인가 나는 동네의 스토리텔러가 되었다. 우리 할머니의 친구분들로 구성된 그룹에서 나는 요즘의 아이돌처럼 사랑을 받았고 보답하듯이 도서관의 책들을 부지런히 날라다 읽어드렸으며 도시의 자녀들에게 편지도 대신 써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플란다스의 개」라는 동화를 읽던 중 결말 부분에서 한 할머니가 우셨다. 그러면서 여기저기로 울음소리가 전염되어 나는 참 난감했다. 그날을 계기로 이야기를 왜 이렇게 슬프게 끝내야만 했을까 하며 고민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뒷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상상하며 바꾸어보는 버릇이 생겼고 실제로 글로도 그렇게 써보고 싶어졌다. 내가 작가가 된 씨앗은 그날 뿌려졌다고 믿고 있으며「플란다스의 개」 주인공인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성당의 그림이 루벤스의 <3폭 제단화>인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고는 학부의‘문화예술사’ 시간이 남달리 감격스러웠다.
넘치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글 쓰는 것이 좋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살던 함양군의 천령문화제 백일장에서 초등부 장원을 하였고 이어 경상남도 대회로 마산에 가서도 은상을 타왔다. 그 후, 백일장이나 공모전에서 어렵사리 큰 상을 타곤 하여 나는 내가 글을 아주 잘 쓰는 줄 아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다.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 나보 다 훨씬 글을 잘 쓰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지에 실린 내 글이 좋다고 우리 반으로 찾아온 아이가 있었는데 처음엔 친구들 앞에서 그 기분을 우쭐하게 즐겼다. 그러나 그애와 친하게 지내면서 작품을 써서 내게 봐달라고하자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제법 묵직한『하얀 고백장』이라는 것을 내게 건네 주었는데 거기엔 예쁜 손글씨로 쓴 50여편의 자작시와 그 당시 보통 애들은 생각지도 못했던 소설까지 1편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어려워서 읽어내기가 편치 않을 만큼 수준도 높았다. 한학기가 더 지나자『여학생』잡지에 그녀의 시가 실렸고, 그것은 지역에서도 하나의 사건이었지만 내 문학의 존폐를 흔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글이 그때야 바로 보였다. 창피해서 땅속으로 폭삭 꺼지고 싶었다. 나는 꾸준히 쓰던 일기장마저 덮어버리고는 말하자면 붓을 꺾었다. 그 후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으며 백일장에도 나가지 않았고 그 친구와 멀어진 건 물론이고 아예 글과는 담을 쌓고 외면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의 얘기가 너무 장황한 까닭은 세상의 육지들이 바다 속의 땅들과 연결되어 있듯이 그런 일들이나 의 늦은 문학입문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서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바쁜 일상에서 짬을 내어 도자기를 만들고 문인화를 배우는 등 문학 밖에서만 겉돌았는데 결혼 6년만에 낳은 아들의 육아일기를 쓰게 되면서 작은 기록들이 모이고 쌓였다. 압력솥의 추는 압력이 가해지면 더 견디지 못해서 돈다. 내가 그랬다. 더 참으면 폭발할 것 같이 간절하게 글이 쓰고 싶어졌다. 남에게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쓴 것들이 제법되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은 가족신문을 만든다면서 사진을 오리고 붙이고 하더니 빈칸이 너무 많다고 도와 달라고 했다. 4면이나 되는 신문을 채 울것이 없어 4면 뒷부분에 내가 쓴 아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글,‘참잘 했어요’를 육필로 써넣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것을 학교 신문에다‘창 작동화’라고 쓴 큰 글씨 아래 실어주셨다. 다른 사람은 알아주지 않아 도 나는 그것이 나의 첫 등단이라고 여긴다. 읽을 만했을까, 갸우뚱하 고 있을 때, 당시 같은 초등학교 학부모이던 구리문협의 지부장이 그 글을 보고 나를 찾아왔고 구리에는 아동문학 분과가 없다면서 함께 문학의 길을 가자고 권유했다.그때 쯤엔 나보다 글 잘쓰는 사람이 많은 것을 나는 이미 알고도 남았고 이제는그런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나이가 되어 있었다.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글을 쓰고 싶어서 내친김에 5명의 팀을 만들어 동화작가인 이영 선생님께는 동화를, 서재환 선생님께는 동시를 배우기 시작하며 구리문협에도 아동문학분과를 만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작품 하나를『아동문예』에 보내신 이영 선생님은 박종현 이사장님과 약속을 잡고 구리에서 함께 만났다. 식사하는 동안 문학 전반적인 말씀들만 하시고 등단에 관한 얘기는 없었다. 일 년이라도 공부한 다음에 등단할 계획이었기때문에 그것이 등단절차인지 나는 모른 채 헤어 졌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내가 이영 선생님께 전화를 해서 오늘의 만남이 무엇이었냐고, 등단하는 거냐고 여쭤봤더 니 그건 아니라고 하셨다. 장난기가 많았던 선생님은 그날 그렇게 말씀 하시더니 다음 날 등단 소감을 써서 출판사로 보내라고 하셨다. 아니라고 하시지 않았냐며, 나는 그렇게는 등단을 하지 않겠다고 뻗댔다. 출판사에서는 독촉 전화가 오고 다시 시작한 글쓰기가 등단앞에서 또 좌초되는구나, 고민하면서 나는 연락을 끊고 며칠을 앓았다. 그동안 바깥 활동을 하면서 혁명 같은 사건들이 터지고 쟁취하며 문학으로 돌진했는데 무시를 당한것 같은 마음이 떨쳐지지가않았다. 당선 소감이 급해지자 이영 선생님은 장난이 지나쳤다고 내게 사과를 하면서 곤혹을 치루셨다. 이제는 10대 소녀가 아닌 나는 붓을 다시 꺾지는 않았지만 아주 임박해서야 소감을 써내면서 소심한 대처를 했다.
철없던 시절, 그런 해프닝을 겪으면서 나는 멋모르고 2004년 9월호에 당시 월간이었던『아동문예』에 동화로 등단했다. 나는 그렇게 문단에 발을 디뎠고 작가들을 귀하! 라고 호명하며 존중해 주시던『아동문예』 의 고 박종현 이사장님을 존경하고 출판사에도 애정을 가졌다. 고집은 피우시지만 지나고 보면 그 판단이 항상 옳으셨다고 지금의 이사장인 안종완 선생님은 박종현 선생님을 두고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말년에 뇌경색 재발로 사람도 못 알아보시고 해맑은 소년이 되어 웃기만 하셨던 이영 선생님도 박종현 선생님과 비슷한 시기에 유명을 달리하셨다.그분들의 한창 때이던 20년전 나의 등단 시절이 옛이야기가 되어 이렇게 반추될 줄 몰랐다. 그것만으로도 숙연해지며 그분들이 그립다.
그리고 3년 뒤, 아무도 몰래『월간문학』에 응모했던 청소년소설이 당선되어 나는 등단의 폭을 넓혔다. 당시 한국문협의 이사장이시던 신세훈 선생님께서 뽑아주셨으며 십여 년 후,『자유문학』에 나의 청소년소설 단편들을 2년간 연재하고 기획으로 책도 출간해 주신 것은 감사하다는 말로는 모자라다. 그래서 말하자면 나는 세 번(학교신문,『아동문 예』,『월간문학』) 등단했고 다시 한번 더 발돋움을 하려고 지금도 연단 중이다. 늘 생업과 병행하며 치열하게 살았던 터라 시간에 쫓기면서 귀 한 휴가처럼 애용했던 문학은 늘 아쉬움 속에 있었고 짝사랑으로 일관했다. 그러다가 작년부터 온전한 시간이 내게 주어져서 현재는 소설에 관심을 쏟으며 정진하고 있음에 감사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내 마음속 내비게이션은 이미 목적지가 문학에 맞춰져 있었던 것을 스스로도 모른 채 겉돌았던 것 같다. 아무리 피하고, 돌고 돌아도 결국 내비게이션은 목적지에 닿게 마련이다.
드라마에서 본 운명과 숙명의 차이점에 대해 말한다면 좀 더 구체적 일 것 같다. 운명은 앞에서 오는 것이어서 강하게 온다고 하여도 조금 은 피할 수도 수정할 수도 있는 반면, 숙명은 뒤에서 오는 것이고 뒤에 는 눈이 없기 때문에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렇게 목적지가 맞춰진 것에 따라갈 수 밖에 없는 문학을 향해 운명을 넘어 숙명으로 다시 만나서 동행하고 있다고 나는 말하곤 한다. 그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지금껏 사는 동안 끊어질 듯하면서도 이어져 온 초라한 결과물 인나의 문학이 어느새 내게 든든한 동아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너무 과하지는 않게 큰 욕심 없이 이제는 내가 진정 좋아하는 것을 하며 사는 것에 가치를 두고 시간과 열정을 쏟으며 이 줄을 놓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