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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나 그때 떨었습니다

1951년 1월 4일 그해 겨울 붉은 완장이 무서워 도망쳐 나오다 아홉 살 내가 돌아서서 산 너머 우리 동네 불바다 바라보고 나 그때 벌 벌 벌 떨었습니다 불타는 아픔보다 더 아픈 피비린내가 토해놓은 아픔 먹구름에 묻혀 산 넘어오는 아우성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무섭던지 나 그때 달 달 달 떨었습니다 나무기둥 붙잡고 숨죽여 우는데 그때 그 붉은 완장이 그때

  • 박영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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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겨울 조양강

남녘에선 봄꽃들이 히죽해죽 웃는 이월 하순 정선 덕천리 제장마을 앞 조양강 고꾸라질 듯 자빠질 듯 제 몸을 뒤집어가며 영월 동쪽 문희마을로 동강을 만나러 가다가 온몸에 붕대를 감은 듯 푸른 대리석을 깔아놓은 듯 단단히 얼어 버렸다 칠족령(漆足嶺)을 달려온 한파는 안개꽃 같은 잔설을 날려 내 가슴에 눈꽃 피워 올리고 강의 한쪽을 막아선 뼝대는 천둥소리로 휘청

  • 정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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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2024.6 664호 갯마을 사람들

사계절 내내 물때에 맞추어 사는 갯마을 사람들 초승달이 바다를 끌고 멀리 나가면 오라오라 손사래 치는 물결 따라 스멀스멀 끌려 나가는 갯마을 사람들 아득히 펼쳐진 십리 갯벌에 경운기 소달구지 앞세우고남녀노소 앞다투어 굽은 허리 펼 새 없이 내달리는 사람들 밀려나간 수평선 위에 고향집 부모 생각 아른거릴 때면 휘파람인 양 내 쉬는 평양 탈출 아줌마 안도의 숨

  • 편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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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비둘기 주검

창릉천 주변 자전거 길 영생을 달리던 목숨 하나 졌다.눈도, 부리도 조용하다. 허공에서 내려온 날갯짓도 조용하다. 나뭇가지 위에서 졸던 발톱도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아도 된다. 바람이 조용히 수습한다. 환장하게 꽃 피는 봄날에 길바닥 베고 평온이 잠들었다. 억새가 읽는 조문이 흔들거린다. 물이 허무를 말하며 비틀거린다. “만물은 정화로 소멸된다.” 창릉천 오

  • 이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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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강가에 선 우리는

때가 되면 인산인해 난무하는 정의로운 대인배, 잡배, 모리배 고른 숨은 제대로 쉬고 있는지희긋희긋하게 보이는 조약돌 몽돌된 흰머리카락이요어스름 담긴 묵은 골목길 황혼녁 짙은 검붉은 노을이요휑하니 비우며 담지 않으려 호젓한 강가로 그림자 하나 깃 세워 나 앉아 본다지금 우리는 허물어진 강둑 위에서 노도의 물결에 떠 밀리듯 신명난 광대 판에줄타기 한바탕하고 있

  • 강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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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오솔길

길이 열린다 나뭇가지를 흔들며 부산히 아침을 깨우는 산새들에 밤새 누웠던 들풀도 몸을 일으킨다아카시아 찔레꽃 밤꽃마저 어우러져 바람을 불러오면 산 그늘진 오솔길에 낙하하는 꽃 이파리 꽃길을 만들며 키 작은 나무 위로 또 다시 꽃을 피우고아침을 열어가는 길 오르고 내리고 또 오르고 나이만큼 함께였을 희노애락 그래도 꽃 지고 꽃으로 남아

  • 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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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재생(再生)

그대 그리운 날 호숫가에 앉아 있으면 쬐그만 내 몸에서 가느다란 물결이 일기 시작한다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경계 너머 그리움의 끄트머리 빗장으로 걸어잠근 그대 창가에 출렁이는 속삭임그대로부터 비롯한 물결 부서지면서도 눈부시게 살아 있는 흔적 흔들리면서도 빗나가지 않는 자전 환하게 열고 온다호숫가에 앉아 있으면 찌그러진 나는 피어오른다 둥글게 둥글게 젖으면서

  • 권오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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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기록시 1

H-6K 핵 폭격기 열여섯 대가 서해에서 미사일 투발 훈련을 하고 있었다 한낮의 그 눈부신 어둠 속에서 풀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등불 을 켜고 땅 밑으로 땅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앉은뱅이꽃들이 일어 서고 벙어리새들이 노래 부르는 환영(幻影)을 보면서 한국의 용산과 오산 기지, 평택 캠프 험프리, 대구 캠프 캐럴과 캠프 헨리, 부산, 어 쩌면 평양까지도 표적

  • 김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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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꿈속의 향연(饗宴)

나는 첩첩 산중 깊숙하게 뚫린 숲길온몸 소름 피는 긴장감으로 걷고 있었다아무도 없이 나 홀로만의 외로운 길조마조마 긴장된 숲길이지만어쩌면 내 어릴 적 그리움 피어나는고향길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이렇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내 나아가는 길 위에한줄기 실오리 같은 햇살이 눈이 부시게 내리고 있었다나는 재빨리 이 기적의 햇살 거머잡았고허공에 떠 올라 어느 새

  • 송동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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