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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재래시장 옛 풍경을 생각하며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호석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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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군생활을 한 5여 년을 제외한 70평생을 고향 합천에서 살고 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변화가 있어 가끔 어릴 적 풍경을 생각하면 마치 타향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내가 청소년 시절인 1960년대 초, 고향 재래시장의 풍경을 추억 속에서 더듬어 본다. 나는 읍소재지에서 오리길 떨어진 마을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는 이러한 시장이 있는지도 몰랐다.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일제강점기 때부터 합천읍 소재지, 지금의 천주교 앞을 가로지르는 도로 변 저지대에 재래시장이 있었다는 것과 1954년경 그 시장을 지금의 합천여중·고등학교가 있는 그 앞 부근으로 이전하였다는 얘기를 들었을 뿐이다.
내가 이 시장에 처음 가본 것은 읍소재지에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3학년 때 같은 반 친구를 따라갔을 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는 시장의 모습이 그저 신기하고 놀라웠다.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온갖 물건을 팔고 있었고, 여기저기 먹거리를 파는 가게도 많았지만, 돈이 없어 구경하고 침만 넘기다 돌아왔다.
집에서 학교에 다니는 도로는 진주에서 합천을 거쳐 대구를 왕래하는 국도였다. 자갈길 비포장도로로 가끔 자동차가 지나가면 흙먼지를 뽀얗게 둘러쓰고 걸어 다녀야 했다.
1958년, 내가 4학년 때쯤으로 생각된다. 지금 합천 재래시장이 있는 그곳 옆으로 학교를 왕래하는 도로가 있었고, 그 일대는 일 년 내 물이 고여 있는 논이었다. 어느 날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보니 화물차 서너 대가 모래를 실어 날랐고, 한쪽에서는 인부들이 지게로 그 모래를 저다가 논을 메우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자동차가 귀할 때라 마을 친구들과 그곳을 지날 때마다 주위에서 잠시 구경하다가 돌아왔다. 옆에 있는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이곳에 재래시장을 짓기 위해서 터를 돋운다고 했다.
두어 달 정도 걸려 터 돋기가 끝나고 한쪽에는 시장 가게가 될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건물 사이로 리어카가 다닐 정도의 좁은 간격을 띄우고 가게 건물을 줄지어 지었다. 시멘트 콘크리트로 만든 기초석 위에 사각 나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은 함석으로 덮었다. 가게 한 칸의 넓이는 4∼5평 될 정도였고 벽은 없고 사방이 트여 있었다. 넓은 지역에 같은 건물을 길게 짓는 게 신기하여 그곳을 지나올 때마다 한참을 서서 구경하였다.
일부 지역에는 가게가 줄지어 건립되었고, 어떤 부분은 넓은 공지(空地) 그대로 있었다. 서너 달이 걸려 시장의 형태가 갖추어졌고, 매월 3일과 8일, 5일 시장이 개장되었다. 시장 안 가게에서는 주로 옷, 잡화, 곡물, 어물 판매점과 음식점 등이 있었고, 농기구를 벼루는 대장(풀무)간도 두어 곳 있었다. 개장 후 둘러보니 건물 없는 넓은 공지 한편은 옹기 전이었다. 옹기를 파는 곳은 자리를 많이 차지하기도 하고 옮기기가 쉽지 않아 평일에도 크고 작은 예쁜 옹기들을 많이 쌓아 놓고 있어 지나 다니는 사람들의 볼거리가 되었다.
공지의 다른 한편에서는 인근 산골짜기에서 해오는 땔감 나무를 파는 곳이었다. 당시는 읍소재지 일부 가정에서만 연탄을 때었고, 대다수 가정에서는 직접 인근 골짜기를 다니며 나무를 해와 땔감으로 사용하였고, 조금 여유가 있는 일부 가정에서는 먼 거리 산골에서 팔러 오는 나무를 사서 때기도 하였다. 시장에 나오는 나무는 주로 솔갈비와 여러 가지 나무를 잘게 쪼개어 말린 장작이었다. 나무전에 나무를 사러 나오는 사람은 주로 아주머니들이었다. 나무지게를 세워둔 채로 흥정이 끝나면 나무 팔러 온 사람이 나무지게를 지고 아주머니 집까지 져다 주어야 했다.
넓은 공지 한편에는 가끔 서커스단이 들어와 대형 천막을 쳐놓고 그 안에서 며칠간씩 서커스를 하였다. 구경거리가 귀하던 시절이라 처음 보는 서커스는 너무나 황홀하고 신기하여 관람객들의 탄성과 박수를 많이 받았다. 가끔 읍내 고등학생 또래들이 천막 틈새로 몰래 들어가 구경하다가 싸움이 벌어져 시끄럽기도 하였다.
또 장날이면 빈 공지에 어디서 오는지 5∼6명 한 팀이 되어 약장수들이 와서 노래와 구수한 입담으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온갖 약을 만병통치약처럼 팔았다. 약장사들의 행각이 재미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약도 제법 많이 팔았다.
가게가 있는 시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별도의 가축시장이 있었다. 각 가정에서 기르는 소, 돼지, 개, 닭 등 갖가지 가축을 몰고 나오거나 리어카에 싣고 와서 팔았다. 그때는 읍소재지 변두리는 물론 농촌 농가에는 소 한두 마리와 돼지 몇 마리, 닭, 개 등 가축을 길렀다. 이 가축들을 수시로 팔아서 그 돈으로 농사 비용도 하고 가용으로 썼다.
그 당시 5일 재래시장은 또 다른 재미와 풍경이 많았다. 이 골짝 저 골짝 떨어져 살던 바깥사돈들의 술자리가 되어 즐겼고, 안사돈들은 주로 국밥집에서 만나 요기를 하며 친분을 쌓기도 하고 사위와 딸들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자리가 된다. 시장에 나온 사람들은 식사 때가 되면 시장 곳곳에 있는 국밥집을 찾아가지만, 일부는 시장 이곳저곳에 있는 국화빵집을 찾아가 끼니를 때우기도 하였다. 특히 학교 공부를 마치고 시장에 들른 학생들은 할머니나 부모님을 만나 단팥죽 뿌린 국화빵을 사주면 최고의 먹거리였고 신바람이 났다.
해가 서산에 걸릴 무렵이면 북적이던 시장은 한산해지고 파장이 된다. 시장 곳곳에는 술에 취해 흔들거리며 흥얼거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무나 농작물을 팔러 왔던 사람들은 그것을 판 돈으로 갈치 몇 마리씩 사서 짚으로 지게 가지에 매달고 집으로 향한다. 그 시간쯤 비포장도로를 따라 집으로 가다 보면 술에 취해 도로변 가로수에 갈치가 매달린 지게를 기대 놓고 그 옆 비탈 먼지 구덩이에서 코를 골며 자는 사람도 가끔 볼 수 있었다. 또 해가 지고 어둑해지면 시장에 왔다가 그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어 가족들이 등불을 들고 마중 나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가장과 실랑이하며 분주한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당시 재래시장은 오는 남정네 대부분이 평소 가난으로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농촌 사람들이라 친구나 사돈을 만나 막걸리 두어 잔만 마셔도 금방 취하여 흥얼거렸다. 농사로 고된 삶을 잠시 잊고 즐겁게 하루를 보내는 순박한 사람들이 만나는 광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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