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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생각의 깊이

생각이 미쳤다 상식에 젖은 내가 있는 곳에서 보면내 안에 내가 많아 언제부턴가 무척 달라진 그를 보았다 엉뚱한 말에 대수롭잖게 생각하며 무시도 했던 그가오늘은 마치 태양처럼 보인다 아니 보름달 같으다어디 무슨 한마딘들 다 꿰뚫고 있다 달관처럼날카로운 질문과 자답마다 어리둥절하다우물 밖의 크고도 굵은 한줄기 빛은 강렬하다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갔을까

  • 최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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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내가 살아 있음을

엄동설한 살을 에이는 가혹한 아픔을 참으며 눈 덮인 땅거죽에 육신을 묻고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함에그저 이 혹한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무엇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북풍한설과 맞서려니 참으로 혹독하고 가혹하다그래도 숨이 붙어있고 헐떡거릴 수 있는 약한 맥(脈)이라도 있으니 천만다행 아닌가이 또한 내가 살아가야 할 길이기에그저 참고

  • 이창원(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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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소리

아주 오래 전 窮민학교 때웅변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그때 원고의 내용은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소리가쌀독에서 바가지 긁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저녁을 준비하시던 어머니가쌀독에서 쌀을 푸시며푸념처럼 하시는 말이었다그 소리는 나뿐만 아니라우리 가족 모두에게 절망적인 소리였다 난 그 이후로쌀독을 열어보는 습관이 생겼다 바가지 긁는 소리가 나

  • 유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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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큰샘*

왕조실록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옛진성(鎭城)의 수호신이덮개도 다 열어젖히고버려진 배춧잎처럼 엎드려 있다큰 물동이 작은 물동이 항아리가 자리다툼 하고 온 마을 생명들이 매달리던 자리에지나가던 강아지가 투덜투덜 적막의 무게를 달고 길고양이가 긴 꼬리로 기다림의 깊이를 잰다그 옛날 포작선 타고까막만 불볕과 싸우고 돌아온 병사들, 뱃일 마

  • 성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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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커튼콜

밖을 보기 위해 커튼을 열자숲이 움직인다너는 새보다 뾰족한 부리도 없지만먹이를 찾듯 무작정 두리번거린다밖을 장식한 사물이 요람처럼너의 날숨을 재우고거듭 진정되지 못한 갈등을 일으키다너와의 거리는 변수가 있는 만큼 주춤거린다지척이다가 수만리 먼 곳까지산에서는 붉은 잎들이 아우성이지만내려와선 은행나무만큼 아늑한 빛깔도 없다옆으로 내려진 커튼 자락 보고 있다가&

  • 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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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목련화여

가난한 뜨락에 얼굴 내밀며마른 나뭇가지 끝에서 솜털 멍울 투욱 툭아직은 청량한 바람이 머물고 있는데솜털갑옷 하나 둘 벗어 내리더니어느 사이 명주드레스 입고나플나플 춤사위로 봄 향기 전하네하얀 손바닥 흔들며 봄꽃을 부르고그 부름의 손짓에 따라온 산야에 각색꽃들이 봄 향연 벌이고봄산또봄의마을에서 꽃 잔치 알리는데아 목련화여! 이제 시작인데 너는 떠나가고 있고나

  • 문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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