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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호찬

수필가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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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생 시절의 서리는 주로 배고픈 시골 농촌의 아이들이 남의 밭에서 콩이나 감, 수박, 고구마 등을 몰래 가져다 먹는 정도였고, 심각한 손해를 입히는 도둑질과는 다른 것으로 서리를 당한 쪽에서도 아이들의 장난으로 보아 대개 그냥 모른 척 넘어갔다.
그 시절 농촌 마을의 집들은 부유한 몇 집 외에는 대개가 초가지붕이어서 추수가 끝나면, 초가지붕의 썩은 이엉은 벗기고 새 짚으로 엮은 이엉을 덮고는 바람에 날리지 않게 새끼줄로 엮어 매야 했다. 그때 쓸 새끼를 저녁을 먹은 후 밤에 꼬게 되는데, 한참 새끼를 꼬고 나면 배가 출출해지기 시작한다. 이때 동네 친구들이 모여 한창 익어 단맛이 오른 단감을 따서 허기진 배를 채울 의논을 하게 된다.
우리 동네에서 약 2㎞ 정도 떨어진 곳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 공동묘지 옆에 단감나무 과수원이 있어서 감 서리를 갔다. 나는 겁이 많아 과수원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누가 오는지 망을 보기로 하고, 다른 친구들은 과수원에 들어가 단감을 따기 시작하였다. 나는 공동묘지와 과수원 사이에 서서 누가 오는지 망을 보고 있는데, 공동묘지의 많은 무덤에서 귀신들이 나와 나를 나무라며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아 너무 무서워서 친구 이름을 부르며 빨리 나오라고 독촉했다. 그래도 감 서리하는 친구들은 나오지 않았고, 나는 귀신이 나를 덮칠 것만 같아 또 한 번 크게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빨리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때야 친구들이 감을 따서 옷 주머니마다 채우고 나와서는, 망보는 나의 고함 소리 때문에 감을 더 못 땄다고 투덜대며, 우리 집 사랑방으로 서리한 감을 가져와 맛있게 배불리 먹고는 헤어졌다.
또 어느 날이었다. 우리 동네 우물가 병근 형 집에 감나무가 있어 동네 친구들과 같이 담벼락에 올라서서 차근차근 감을 많이도 따 왔다. 그날 밤 실컷 먹고 기분 좋게 자고 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병근 형이 온 동네로 다니면서 어젯밤 감도둑이 들었다고 소문을 내며, 감도둑을 잡으려고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그 감도둑은 지금껏 잡히지 않고 그냥 세월이 흘러갔다.
콩서리는 거의 다 익은 콩을 몇 포기 뽑아 와서 썩은 나뭇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 콩을 구워 먹는 것으로 아이들의 서리 중 하나다. 그때는 배가 고픈 시절이라 콩 농사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몇 포기 뽑아 구워 먹는 정도는 콩밭 주인도 이해하면서 문제 삼지 않았다. 산이나 들로 소 먹이러 나가 친구들과 어울려 함께 서리한 콩을 구울 때 탄 콩깍지를 까서 먹다 보면 손이나 얼굴 입 모두 검댕 범벅이 된다. 친구들은 검댕 묻은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얼굴이야 어떻든 구운 콩의 구수한 맛이 너무 좋았다. 지금도 그때의 콩서리하던 일을 상상만 해도 즐겁다.
저녁 먹은 후 우리 집 사랑방에 동네 친구들 몇이 모여 조금 놀다 보면 배가 고프다. 그때 의논 끝에 고구마 서리를 하기로 하고, 친구 서너 명이 고구마밭으로 가서 고구마를 대여섯 개쯤 캐어 사랑방으로 돌아와 생고구마를 그대로 먹었다. 한참 배고픈 때라 맛있게 먹고는 조금 놀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다음 날 고구마밭 주인이 고구마를 캔 아이들을 잡으려고 온 동네 아이들을 탐문하고 있었는데, 생고구마를 먹은 한 아이의 입이 시커멓게 된 것을 보고는 고구마 서리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 고구마밭 주인은 아이들이 배가 고파 고구마 몇 개 캐먹은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고구마 넝쿨을 당기는 바람에 그 고구마 줄기 전체가 말라 죽게 되어 고구마 농사를 망쳤다는 것이었다. 그 뒤 아이들의 부모가 그 고구마밭 주인과 친구였기 때문에 잘 마무리는 되었으나, 그 아이들은 아버지들께 심한 꾸중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고구마 서리는 하면 안 된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내가 강원도 김화대대 정문에서 보초 근무를 서고 있을 때의 일이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초병 서너 명이 수박 서리를 하겠다고 하여 극구 말렸으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어 그냥 묵인하였다. 조금 후 초소 근처 수박밭에 들어가 수박 두 덩어리를 서리해 와서는 대검으로 쪼개어 먹고는 그날은 무사히 지나갔다. 그다음 날 내가 초소 근무를 서고 있는데 수박 임자가 찾아와 어젯밤 수박 서리한 사병을 찾으러 왔다고 하면서 서리한 군인을 지명하라고 했다. 만약 지명하지 않으면 대대장에게 알려 기어이 서리꾼을 찾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그때가 바로 군사혁명이 일어난 1961년 여름 말미이므로 군인들은 모두 모범을 보여야 하고, 우리 국민의 타성을 뿌리 뽑으려는 혁명공약이 있었던 때인 만큼, 만약 대대장을 찾아가 서리꾼을 찾아달라고 한다면 그 시간 내가 초병 근무였으므로 가담하지 않았더라도 묵인했다면 바로 군사재판을 받아 형을 살아야 했다. 나의 모든 꿈과 희망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그 주인에게 빌면서 애원하였다. 제발 용서해 달라고…. 그때 초소 바로 옆에 먹고 남은 수박 껍질을 농장 주인이 보았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어 그저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돈이 있었다면 변상해 주었을 텐데 그런 형편이 못 되었고, 수박 서리한 병사들은 나와 같이 근무한 초병이므로 그들을 고발할 수도 없어 그저 비는 수밖에 없었다. 울면서 애원하며 빌다 보니 그 주인도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물러서 주었고, 나는 지금도 그 농장 주인의 고마움을 잊을 수가 없다. 이제는 돌아가셨겠지만, 그 후손이라도 알게 되면 몇 배로 보상하면서 그 농장 주인의 고마움에 감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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