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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꽃무릇

‘내 마음이 왜 이리 스산한가?’ 나직나직 <파우스트>의 아리아를 부르며 걷는 앞산 자락길 마른 낙엽들 흩날려 스산한데 계절을 역행한 꽃무릇이 회색으로 바랜 길섶을 생명의 빛깔로 채색한다. 꽃대마저 말라버린 10월의 어느 날 환생하여 만추의 한기에도 청청히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한다. 여린 몸이지만 살을 에는 동지섣달 칼바람도 꿋꿋이 버틴다.

  • 조준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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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봄의 절정에서

우리 동네는 온통 함박웃음이다 천변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벚꽃이 몽글몽글 찬란하게 웃고 복사꽃이 화사하게 웃고 황매화가 환하게 웃고 살구꽃이 활짝 웃고 개나리 민들레 제비꽃 등 함박웃음이 온통 지천이다 나는 이 웃음들을 차곡차곡 내 마음 속에 쌓아 두고 일 년 내내 꺼내 써야겠다 그러면 나의 일 년은 온통 함박웃음일게다

  • 김영미(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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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황혼일기

가진 것은 엄청난 시간과 약간의 뱃살이 객기 부리고 악산을 타고 놀던 다리는 무시로 경고장 난발하니 배짱 없어 자중하는 신세요 조석으로 헛기침하며 초근목피도 음미하던 치아 이젠 단체로 몽니 부리며 산해진미도 사양해 난감하오 이런저런 핑계로 나태한 일상 속에서 파뿌리는 모자로 변장하고 자식자랑 배추 잎 자랑에 경로당은 고슴도치 풍년이요 자동차 타이어는 하품하

  • 문희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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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024.6 664호 안동 제비원 미륵불

저 엄중한 바위 한 채, 어느 손에 다듬어졌을까? 꿈틀거리는 눈썹이며, 지긋한 눈매며 우뚝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 두둑한 귓밥 목에 걸린 염주까지 저녁노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장삼 자락 길게 바닥까지 펼쳐진 위로 한 손은 가슴에 또 한 손은 무릎에 어느 손길일까? 손가락 마디, 사이까지 세밀하다 촛불 밝혀놓고 절 올리고 있다 언제부터 이렇게 앉아계셨

  • 권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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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시선엔 보이지 않는 문이 있다 적막이 푸른 숲, 소리는 고향처럼 침묵울 찾아가고꽃잎은 잃어버린 길처럼 흩어진다 꽃들의 뒷모습이 활짝 핀다 그들의 고독은 진자(振子)처럼 왔다 갔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 오고가는 ‘운동방정식’을 풀고 있다 바람은 조용하면 죽는다 습관으로 길을 낸다 누군가, 화가의 물감처럼 여름을 짜내 숲에 바른다 여름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동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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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작법(作法)

맺어진 관계속에는 간극이 산다 이만큼에서 저만큼까지 다리를 걸치고 겹치거나 벌어진 거래를 한다 계산이 엇나 서로를 긁기가 일쑤이지만 고약이거나 붕대로 감싸는 치유는 거래하지 않는다 상대를 깁는 일을 용서라고 부른다 문장을 고치듯 사람 관계에서도 놓친 수순을 사과하는 기술이 거래다 내가 믿고 싶은 진실이 사실이 아니기를 거래한다 작법은 내민 나를 줄이거나 지

  • 김병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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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6 664호 소리 없는 말

입 다물고 말하기 어찌 생각하십니까 울림이 없을까요 지하철 출구는 지상으로 향하고 말 많은 사람 붐비는 발자국을 달고 밖으로 나옵니다 보험약관처럼 잘고 길어진 말 꼬리에 꼬리를 문 타인의 말 부딪힌 머리끼리 목소리를 키웠군요 마이크 좀 치워주세요 순간 잘린 말꼬리가 파닥거리고 방향을 등진 채 출구를 찾는 입놀림 광장은 소란합니다 신호등 눈빛은 세 마디 단순

  • 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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