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401
1
나오는 사람들_ 방귀만|골통수|오작녀|노나팔|한영호
때_ 현대
장소_ 지하철 종점 등산로 산자락 공원이다
객석의 불 꺼지고 무대 밝아지면, 70대 중반의 등산복 차림 방귀만과 골통수가 공원 벤치 의자에 앉아 있다.
방귀만 어때? 오늘 날씨도 좋은 데다 소요산이나 용문산보다 사람들도 적고 조용해서 참 좋지? 안 그래, 골통수?
골통수 방귀만, 너 파고다 공원이 시내 가까워 좋다 할 땐 언제고, 요즘도 여차하면 사람 냄새가 그립다니 어쩌니 노래하면서 동묘 풍물시장도 혼자 자주 찾곤 하잖아?
방귀만 이것도 나이라고 여기저기 안 아픈 데가 없는 우리들 아닌가. 진짜 큰 병 나서 아파 들어눕기 전에 한강변 걷기 운동도 하고, 이렇게 야트막한 산이나마 등산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골통수 또 그 운동 타령, 와사보생(臥死步生)!
방귀만 암, 그렇지. 집 안에 누워만 있으면 빨리 죽고 밖에 나와 걷기라도 하면… 지공거사(地空居士), 기왕 공짜배기 전철 타는 거 오늘처럼 종점까지 좀 멀리 와서 말씀이야. 여기 오니 우리 고향 뒷동산 생각 안 나? 저 앞에 흐르는 강물은 남해 바다 같고… 어쩌다 한번 와 보고 너와 함께 다시 오고 싶더라니까. 우리야말로 서울까지 이사를 하면서 연락 안 끊고 지금까지 살아온 단짝 죽마고우, 본명보다 별명을 자연스레 쓰는 부랄 친구 아냐?
골통수 나도 여기 소문은 좀 들은 것 같아. 우리 같은 노땅들이 많이 찾는 데라 한 노인 전용 식당엔 점심때 밥 먹으며 술독에 가득 찬 탁배기 한 사발씩 박치기, 이 또한 공짜로 퍼 마셔도 좋다고… 65세 이상이라던가?
방귀만 주인이 멋쟁일세. 근데 65세도 노땅에 드는 감?
골통수 글쎄다 말씀이야, 우리처럼 70 중반쯤은 돼야….
방귀만 (짐짓 골통수의 어깨를 치며) 언제 우리가 벌써 그 나이가 됐어?
골통수 (어깨 친 그 손을 잡으며 우스꽝스레) 너 날 쳤어?
방귀만 (금세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듯) 쳤다, 어쩔래? 아직도 자네가 어릴 적 그 골당수인 줄 아는 감? 너 앞에서는 골당수라 했지만 너 없을 땐 우리 모두 처음부터 꼴통수라 불렀어. 무슨 정당 당수가 아니라 머리가 텅 빈 꼴통, 꼴통수!
골통수 나도 알고 있었어, 짜샤! 그래서 내 자신을 알고 하루아침에 골당수를 미련 없이 버리고 꼴통수 아닌 골통수라 선언했었잖아. 친구들의 뜻을 알고 존중해서 본래의 내 모습을 되찾았다고나 할까? 그만하면 이 몸 좀 큰 그릇 아닌가?
방귀만 ‘천방지축마골피’ 중 지금은 없어진 골씨를 살려내겠다고 스스로 골씨라 자칭하며 우리를 괴롭히던 이 동네 꼬맹이 청소년들 왕초 놈, 너는 진짜 골빈당 당수 골당수가 아닌 꼴통수가 딱 맞아! 그런데도 우리들이 너 또 다른 그 깊은 뜻을 헤아려 골통수라 불러준 거 고맙다고 생각해, 이 꼴통수야!
골통수 어허, 골통수! 그땐 벌벌 기던 놈이 이젠 컸다고 맞먹어?
방귀만 그래, 이렇게 늙도록 다 컸다, 왜? 그나저나 벌벌 기던 똘마니가 한 번 물어보자. 천방지축마골피는 어떻게 알았어?
골통수 고아원엔 똑똑한 형, 누나들이 많잖아.
방귀만 천한 성씨로 알려진 그건 다 낭설이고 루머야. 근대화 이후쯤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제법 오래된 속어라고 핸드폰 치면 다 나와요. 가운데가 축이 아닌 추라고 알려져 있다는 말까지.
골통수 지금 와서 우리가 그걸 따져 뭐해. 내게 중요한 건 그 일곱 개 성 중 골씨가 빠져 고아가 됐다기에 고아인 내가 그 골씨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나 진짜 골통수 맞지?
방귀만 (손을 잡아주며) 그래 맞다, 골통수야!
골통수 그래도 한평생 우리 같이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드물 거야. 나만 성까지 아예 바꿔 골통수가 됐지만, 그래도 넌 방씨 성을 지켜줬잖아. 방귀를 뽕뽕 잘 뀐다고, 방귀만! 아마 방씨가 아니었으면 너 성도 바뀌었을지 몰라. 아니지, 다들 성만은 지켜줬어. 그땐 친구들에게 내가 대빵으로서 별명을 하나씩 공짜로 선물해줬으니까. (으스대듯 어깨에 힘을 주며) 으흠!
방귀만 (새삼 추억에 젖어들듯) 그때를 생각하면… 우리 다들 6·25 전쟁둥이잖아. 한반도 남북 동족상잔 전쟁통에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우리는 고고의 성을 터뜨리며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골통수 그래도 자네는 부모 밑에서 컸지만 나는 부모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나 고아원에서….
방귀만 (자기 입술을 때리며)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내가 괜한 출생 이야기 또 꺼내 너를 마음 아프게 했다면 용서하시게, 친구야.
골통수 아냐, 내가 고아원에 있었기 때문에 골통수가 됐잖아. 그래서 너희들이 고아원에 사는 나한테 지레 겁먹고 꼼짝 못했고, 자동적으로 우리 동네 왕초가 된 거랄까?
방귀만 좌우당간 너는 스스로 골씨가 되어 우리 친구들의 대빵이었지만, 나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한텐 별명을 붙여줘도 본성(本姓)만은 지켜준 거 지금 생각해도 어린 게 참 기특했어. 그 나이에 어찌 그런 생각을 했는지… 여태껏 너를 만나며 살아왔지만 (엄지척을 해주며) 일생일대 네가 제일 잘한 일 중 하나야.
골통수 (내심 뽐내듯) 누구는 별명 없이 본명 그대로 불러준 친구도 있었을 걸?
방귀만 그래, 생각난다 한영호….
골통수 그는 부모가 전쟁통에 월남해 내려온 피난민이었잖아. 특별히 봐준 거지.
방귀만 (비아냥대듯) 어쭈, 그랬어? 요즘 어디서 뭐하며 살고 있을까? 죽지나 않았는지….
골통수 우리 연락 닿는 친구들 다 함께 모여 동창회라도 한 번쯤 열었으면 좋으련만.
방귀만 남쪽 바닷가 우리네 고향 뒷산에서 그 옛날엔 봄날 동네 사람들이 성씨별로 한데 모여 회식 잔치를 벌이곤 하던 정겨운 풍경들이 눈에 선하네.
골통수 전쟁은 남북으로 두 동강이 난 채 끝났다지만, 전후 우리가 자랄 땐 참으로 비참했지. 차라리 나처럼 전쟁고아로서 고아원 생활한 게 더 낫겠다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너나 할 것 없이 보릿고개에 쌀밥은커녕 보리밥에 쑥떡, 개떡만 배불리 먹어도 행복했던 시절 아니었던가?
방귀만 우리도 여자애들과 어울려 산나물 캐러 다니고… 그땐 먹고 죽지 않는 거라면 다 먹었잖아. 지금은 그 당시 우리가 굶주리며 먹던 그 음식들이 다 웰빙 건강식이라나 뭐라나, 비싸다네요. 쌀밥이 그중 제일 싼 세상이니… 지금도 기억나는 게 난 할아버지 밥에 쌀이 쬐끔 섞인 것을 노려 할아버지가 숟가락 놓을 때까지 버티다가 결국 그걸 차지해 먹으며 신이 났었다니까. 우리 집에선 할아버지한테만 쌀이 섞인 밥상을 올렸는데, 할아버진 손자 마음을 알고 일부러 꼭 몇 술 남기셨던 거야.
골통수 그래, 누구네 생활환경이 좋고 나쁘고 따질 것 없이 우리네 모든 전쟁둥이들의 공동운명체라고나 할까? 국민학교, 아니 요즘은 초등학교지. 거기도 다니다 만 친구들도 있고, 가정형편상 아예 못 들어가고 남의 집 농사일 돕는 ‘새끼 머슴살이’한 친구도 있었으니까. 내가 국민학교인가 중학교 다닐 땐데, 고구마를 점심 도시락에 싸다니는 친구도 가끔….
이때쯤 오작녀가 커피병을 들고 나타난다.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기라도 하듯 관심을 보이며 짐짓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온다. 이따금 유심히 바라보는 게 어디서 본 듯도 하다는 분위기다.
골통수 그것도 못 싸 와서 점심시간에 혼자 몰래 교실을 빠져나와 우물물로 점심을 때우던 친구도 봤다니까.
오작녀 물로 점심을 때우던 시절 이야긴가 봐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누가 그 말을 믿겠어요? 나중엔 미국에서 보내온 구호물자로 점심을 굶는 친구들에겐 학교에서 아동급식 먹거리를 나눠주기도 했었죠.
방귀만 (그런 걸 알 만한 나이만큼 늙어 보이지 않는다고) 아줌마도 아세요?
오작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을 유심히 뜯어보며 붙임성 있게) 여기 가끔 나오세요? 얼굴들이 본 듯도 해서…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커피잔을 내밀며) 단짝 친구분 같은데, 커피 한잔씩 마시며 이야기 나누세요. 공기 맑고 경치도 좋잖아요.
골통수 마치 공짜로 주듯 말하시네?
방귀만 이 친구야,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골통수 그래, 공짜 좋아하다간 큰코 다치지. 이런 데서 커피 팔아 생활하는 아줌마한테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오작녀가 두 남자를 새삼 빤히 쳐다보더니 뭔가 떠오른 듯.
오작녀 좋시다, 커피 두 잔 공짜요. 그대신….
골통수 그대신이라니? 커피는 부업, 미낀가? 예쁜 색시라도 붙여주고 돈 뜯어내는 아줌마 아냐?
오작녀 (남자들을 가지고 놀듯 커피를 따라주며) 그런 건 나중에 보면 아실 테고… 색시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보내면 되니까요. 대신에 그땐 노신사답게 커피값은 주셔야겠지요. 어때요? 밑지는 장사 아니죠?
골통수 (곁눈질하며) 너 여기 온 속셈이 따로 있은 거 아냐?
방귀만 짜식, 은근히 더 좋아하는 쪽이 누군데? 마음속으로 한 번쯤 바라던 거 아냐?
골통수 나는 독거노인 홀로 신세지만 너는 엄연히 마누라가 있잖아.
오작녀 남자들이란 젊으나 늙으나… (진행을 서두르듯) 그럼 좋아요. 일단 색시 불러볼 테니 얼굴 보고 정해요. (무언가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차서) 마음에 안 들면 퇴자 놓아도 된다 말했잖아요.
방귀만 세상에 이런 착한 꽃뱀 바람잡이도 다 있네. 그럼 하나만 불러봐요. 아가씨가 마음에 들면 이 친구한테 선물로 양보하고, 난 아줌마와 데이트 즐기면 되니까.
오작녀 (살짝 안기는 시늉을 보이고) 사람 볼 줄 아는 할배네.
방귀만 할배라니?
오작녀 몸은 늙어도 마음은 청춘이다?
골통수 (넋두리하듯) 늙으면 다 소용없고 청춘이 그리울 뿐일세. (노래로) 청춘을 돌려다오∼.
오작녀 그럼 청춘타령으로 커피 마시며 잠시만 기다리세요. 전화해서 그중 제일 예쁜 애를 불러내 볼 테니까.
오작녀가 저만큼 떨어져 어디론가 핸드폰으로 속삭이듯 전화를 건다.
골통수 너 처음부터 이러려고 여기에 오자고 한 거 아냐?
방귀만 (먼 산 바라기를 하며 의미심장하게) 이유야 여러 가지로 많지. 헌데, 자네 대책 없이 너무 좋아하는 것 같은데?
골통수 불러주는 색시가 마음에 안 들면 돌려보내고 커피값만 달랬잖아. 커피값은 내가 줄게요, 염려 붙들어 매시게. 얼씨구, 나타난 색시가 예쁘면 너도 하나 더 불러달라고 할 것 같은데? 네 얼굴에 씌어 있어, 임마.
방귀만 (딴 속셈이 있는 듯) 글쎄, 그럴까? 암튼 그때 가서 보자고.
골통수 그럼 저 착한 아줌마는 어떡하구?
오작녀 (골통수의 목소리를 듣고 다가와 방귀만을 꼬집듯) 그새 마음이 변해 나를 차버린 겁니까? (골통수를 보고) 아가씨 곧 도착한답니다.
방귀만 그렇게 빨리? (의미심장하게) 아줌마,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오작녀 뭔데요?
방귀만 (손목시계를 보며) 혹시, 공원에 매일 나와 분다는 색소폰 연주자 몇 시쯤에….
오작녀 (말을 자르듯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짓말처럼) 저기 시간 맞춰 나오잖아요.
때마침 색소폰을 목에 걸고 나타난 노나팔이다. 방귀만이 벌떡 일어나 골통수의 손을 잡아 이끌고 노나팔을 조심스레 살피며 다가간다.
골통수 아가씨 아니잖아. 아니, 저 친구는… 가만… 어디서 많이 본 듯도 싶은데! 맞다!
방귀만 맞아, 노나팔이야. (큰소리로) 노나팔!
골통수 노나팔 친구야!
노나팔 (서로 끌어안으며) 오랜만이다, 친구들아!
그들의 만남을 바라보는 오작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소 짓고 손뼉을 치는 게 관객 입장에선 선뜻 이해가 안 갈 정도다.
오작녀 (혼잣말처럼) 내 짐작이 맞았네! 아참!
문득 생각났다는 듯 돌아서 떨어지며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관객들에겐 들리지 않지만, 꽃제비 취소 전화가 아닐까 싶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연기다. 오작녀가 전화 거는 사이에도 세 친구는 오랜만에 만난 기쁨을 어깨동무 내 동무 하고 동심으로 돌아간 듯 아이들처럼 껑충껑충 뛰며 좋아들 한다.
노나팔 반갑네 친구들아, 정말 반갑다. 아까 오작녀한테 전화 받고 너희들이 와 있는 줄 알았어.
골통수 오작녀라니? 그 유명했던 너 첫사랑 오작녀?
노나팔 이 친구가 지금이 언젠데 옛날 이야길 하고 있어. 오작녀가 날 차버리고 한영호 품에 안겼잖아. 처녀 총각 둘이 손잡고 서울로 도망가 절에서 스님 모시고 남몰래 결혼식을 올렸다나 어쨌다 나, 이야기 못 들었어? 그 후 우리 동창 친구들한테 얼굴조차 안 보이고 거의 숨어 살다시피 했거든.
방귀만 나야 귀동냥으로 들은 적은 있다만, 방금 뭐랬어? 그 오작녀가 노나팔 너한테 무슨 전화를 했다는 거야?
골통수 (헷갈려 혼란스러운 듯) 무슨 말인지 난 도대체….
오작녀 (나서며) 오작녀, 바로 나야!
방귀만과 골당수 놀라서 자빠질 듯 거의 기절할 뻔한다.
골통수 (가만히 살펴보며) 오작녀라니, 너 얼굴이 왜 그래?
방귀만 너 오작녀 아닌데? 우릴 끝까지 가지고 놀 거야?
노나팔 (다 안다는 듯) 사연이 많지.
방귀만 그럼 얼굴을 뜯어고쳤다는 거야?
골통수 성형수술?
노나팔 우선 어디 가서 좀 앉자. 오랜만에 만났으니 내가 오작녀 대신 천천히 이야기 다 해줄 테니까. 본인한테보다 첫사랑 나한테 듣는 게 더 재밌을 거야.
오작녀 그래, 우리가 앉았던 벤치로 다시 가자.
그들은 벤치로 가서 오작녀를 가운데로 셋이 앉고, 노나팔이 서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노나팔 (남의 이야기하듯) 한영호가 결혼하기 전에 그랬다는 거야. 너 마음은 물론 얼굴까지 완전하게 새 걸로 바꿔서 시집 오라고… 얼굴 성형비까지 주면서… 그때 얼굴은 노나팔 거지 자기 게 아니라는 말씀 아니겠어? 결국 오작녀가 택한 건 허풍선 떠돌이 딴 따라 나팔수 노나팔보다는 한영호를 결혼상대로 마음에 담고 있었다는 거지. 그만큼 좋았다는 이야기기가 아닐까? 첫사랑은 첫사랑일 뿐이야. 첫사랑도 부부도 좋지만, 우리 나이가 되면 언제라도 만나 이렇게 무슨 이야기라도 다 털어놓고 허물없이 나눌 수 있는 동창생이 제일 좋지 않을까 싶다네.
오작녀 그래, 친구들아. 우리 나이에 동창생만큼 더 정겹고 좋은 사이가 또 어딨겠어. 사실 난 우리 애 아빠가 피난민 아들이라는 게 어릴 때부터 마음이 아팠어. 여성적 값싼 동정심일까?
골통수 난 고안데?
오작녀 넌 고아원을 등에 업고 우리들 학용품, 맛난 거 다 뺏어먹고 괴롭히며 때리는 주먹대장 골칫거리 꼴통이었잖아. 우리 전쟁둥이들은 같은 학년이라도 나이가 한두 살 많은 애들이 있어 다른 착한 친구들을 주먹으로 많이 괴롭히곤 했었지.
방귀만 바로 골통수 너였잖아!
골통수 너 헛방귀 뀌는 소리 그만해, 방귀만! 내가 오작녀를 오작녀라고 부르기 시작한 건 주변에 남자 친구도 많은데다, 나만 유독 멀리해 질투심에서 성질이 났던 거지. 노나팔을 유난히 따르고! 그래서 우리 친구 모두를 다리 놓는 오작교가 됐으면 해서….
방귀만 우리가 봐도 악기 없이 맨입으로 나팔 소리를 내는 나팔수, 노나팔이 그렇게 멋질 수가 없었지. 여자애들이 반할 만한 재주였잖아. 지금도 그 나팔 소리가 귀에 들리듯 그리운데 한번 들을 수 없어?
노나팔 이빨이 안 좋아져 나팔 소리는 때려치우고 색소폰으로 바뀐 지가 꽤 오래 됐다네. 아마도 오작녀가 시집간 후였을 거야.
오작녀 첫사랑 노나팔과 주변 남자 친구들 다 버리고 한영호가 서울 가서 결혼해 살자는 순진한 사랑고백 한마디에 홀라당 넘어간 셈이지. 그땐 바람난 촌년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었어. 서울 가면 모든 거 다 잊고 멋있게 잘살 줄 알았거든.
방귀만 그러니까 우린 너 얼굴 고친 후 처음 본다는 이야긴데, 아직도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여. 오늘 커피 사건은 영원한 비밀이야. 그것 때문에 노나팔 앞에서 잠시 혼란을 겪었잖아.
오작녀 나는 두 사람 처음 보는 순간부터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이라 유심히 살펴봤지. 그때 노나팔 생각이 떠올랐어. 시간이 되면 나타날 텐데, 그가 나타나면 모든 게 다 확실히 밝혀질 거니까.
방귀만 (골통수를 보고) 사실 나도 골통수를 불러 함께 노나팔을 보러 온 셈일세. 고향 후배가 우연히 여길 지나다가 거리에서 색소폰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긴가민가해서 나더러 한번 찾아가 확인해 보라는 거야. 그래서 만만하게 자주 만나는 골통수를 꼬셔 함께 온 거지. 골통수에게 노나팔 이야기를 미리 안 한 건, 행여 사실이 아니면 어쩔까 싶어 잠시 숨긴 거지. 미안해. 나는 깜짝쇼를 좋아하잖아!
골통수 그래, 뭔가 이상하다 싶긴 했지만 이런 깜짝쇼가 또 어딨어? 역시 교사 출신은 달라요. 아참 방귀만이 교대 나와 우리 모교를 비롯해 교사 생활한 거 알지? 우리 땐 학비 안 드는 교대나 육사 지망생이 많았는데, 난 육사 시험 쳐 떨어졌지 뭐.
방귀만 그래도 나중엔 일병으로 월남 참전용사에, 제대 후엔 중동 근로자로 나라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국민일꾼이 아니던가?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다 골통수 같은 친구 덕분이라고 봐야지. (오작녀를 보고) 아참, 서방님은 잘 있겠지?
오작녀 거참, 일찍도 물어보네.
노나팔 (오작녀를 대변하듯) 응, 요양병원에 있어. 너희들 만났으니 저녁 때쯤 오작녀 따라 병문안 함께 감세.
방귀만 (고개를 끄덕이며) 몸이 안 좋은가 봐?
골통수 젊었을 땐 건강했는데….
노나팔 여기서 가까워. 전철역에 가면 보일 정도니까. 그래서 오여사, 아니 오작녀가 남편을 보살피면서 운동 삼아 여기서 커피도 팔고….
골통수 뭐야, 현대판 낭만파 할매 오작녀가 다 늙어서 첫사랑과 신랑을 양손에 들고 갖고 노는 거야?
오작녀 (골통수와 방귀만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갖고 논 건, 내가 아까 잠시 너희들 둘 가지고 논 거야. 아가씨 소개는 절대 안 해! 이 공원에선 꽃뱀 같은 거 안 키우거든.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은 (건성으로 노나팔 눈치를 힐끔 보며) 남들한텐 다 비밀이야. 알았지?
방귀만 (만원짜리 한 장을 노나팔 몰래 오작녀에게 찔러주며) 그렇다면 커피 값은 받아야지. 약속은 약속이니까.
노나팔 커피 마셨어?
오작녀 (노나팔을 의식하듯 돈을 얼른 받아 넣으며) 사연이 있어.
방귀만 (오작녀가 했던 말투 그대로 흉내 내듯) 약속은 약속이니까, 비밀이야. 알았지?
골통수 (오작녀에게) 맞어, 너가 우릴 완전히 가지고 놀았어. 지금까지도 가지고 놀고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걸. 젊은 날부터 오작녀 너 남자 친구들 많이 갖고 놀았잖어?
방귀만 오죽했으면 골통수가 오작녀란 별명을 붙여줬을까?
골통수 나를 가지고 논 건 방귀만 너도 마찬가지야. 그나저나 첫사랑 너희 둘은 어떻게 또다시 만났어?
방귀만 운명인가?
오작녀 내가 여기서 커피를 열심히 팔러 다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색소폰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이상한 예감에 이끌려 살금살금 다가가보니 글쎄, 젊은 날 내가 버린 첫사랑 노나팔 아니겠어. 세상에 죄짓고는 못 사는가 싶더군.
노나팔 이 몸 노익장 노나팔, 오랜 세월 색소폰 하나만 메고 돌아다니다 보니 나를 버리고 떠난 첫사랑도 만나고… 이젠 입으로 나팔 소리를 내어 첫눈에 반하게 한 첫사랑이 아니라 고향 초등학교 동창생, 우리네 젊은 날 청춘대학 동창생으로 관계 정리해 새로운 친구로 자리 잡아서 거듭났다고나 할까?
노나팔이 자신도 모르게 감상에 젖어 색소폰을 분다. <청춘을 돌려다 오> 대중가요가 좋겠다. 노나팔이 색소폰 연주를 시작하자 기다렸답시고 오작녀가 화장실에라도 가듯 슬그머니 사라진다. 노나팔은 1절만 연주하는데, 마지막 소절은 노나팔도 색소폰에서 입을 떼고 세 친구가 입을 모아 함께 목이 터져라 외치듯 부른다.
다함께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그때 다시 나타난 오작녀다. 그녀가 손잡고 온 노인은 환자복 차림에 지팡이까지 짚은 한영호다.
한영호 (손을 번쩍 들며) 가긴 어딜 가, 청춘 여기 왔도다! 우리 청춘 친구들아!
방귀만 친구야, 우리가 요양병원에 병문안 가려던 참인데! (느닷없이 방귀를 낀다)
한영호 아직도 방귀 뽕뽕거리냐?
골통수 너를 보니까 옛날 방귀까지 반기려 나오나 봐.
노나팔 (한영호의 손을 잡으며) 진짜 우리가 가면 되는데 여기까지….
오작녀 이 좋은 공원에서 동창생 여러분들을 만나야 즉흥 임시 동창회라도 연다나 어쩐다나….
방귀만 그러고 보면 오작녀 머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참 잘 돌아가. 우리가 오늘 여기 이 자리까지 오는데도 오작교 아닌 오작녀가 다리 역할을… 골통수가 별명 하나는 골고루 잘 지어줬어요!
오작녀 너희들이 무슨 견우직녀냐?
노나팔 우리 다섯 친구를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건 너, 오작녀 아니냐. (골통수에게) 난 노씨라 그냥 노나팔 별명 짓기 쉬웠지?
골통수 그래, 넌 나팔 없이 입으로만 나팔 분다고 노나팔인데, 성씨까지 노씨라 쉽게 지은 건 맞어. 노나팔 색소폰까지 구색을 맞췄으니 우리 한 동네에서 파릇파릇한 청춘을 함께 보낸 청춘대학 동창생들, 번개팅 동창회가 벌어지네요.
오작녀 사실은 우리끼리 만나는 데는 요양병원보다 여기가 좋을 듯싶어 신경 좀 썼지. 요양병원 측에 사정 이야기를 하고 차까지 부탁해서… 요양병원이 가깝다 보니 공원 입구 전철역 앞 큰길까지 이 사람 태워준 걸, 내가 너희들 노래 부르고 놀 때 잠시 가서 데리고 온 거야.
한영호 마누라 전화 받고 내가 여길 오겠다고 했어. 오작녀에 대해 여러분들 이 잘못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여러분들을 직접 찾아 말하고 싶었던 거지. 노나팔이야 벌써 만나 다 풀었지만, 다른 친구들은 만날 기회조차 없었으니 이런 좋은 기적의 만남이 언제 또 있겠나?
골통수 무슨 이야긴데, 서론이 좀 길다?
한영호 서울에 살고 싶은 오작녀가 한영호를 꼬셔 둘이 야반도주하듯 상경해 결혼식도 몰래 했다느니, 하지만… 그래, 절에서 간단히 결혼식한 것과 얼굴을 성형해 새 얼굴로 바꾼 건 맞지만, 서울이 좋아서 무조건 나를 따라온 건 아니거든.
골통수 친구야, 오랜만에 만나자마자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
한영호 조금만 더 들어 봐. 그때 아버지가 서울 병원에 입원해 있었어. 병도 부전자전인지 나도 지금 아버지 그 병을 앓고 있지만… 어머니는 먼저 돌아가셔서 혼자인 아버지 병 수발하러 나를 따라 온 거야. 오작녀를 저 노나팔 첫사랑을 버리고 이 남자 저 남자 기웃거리는 여자쯤으로 치부하는 친구들도 있었겠지만, 우리 아버지를 위해서… 아버지는 자기의 운명을 예감했는지 오작녀를 보자마자 우리 결혼을 재촉했고, 살아생전 하루라도 빨리 손자를 그렇게 보고 싶어했어. 손자가 태어나면 할아버지 이북 고향을 꼭 알려주고 가능한 고향과 가까운 서울에서 쭉 살아주었으면 좋겠다고… 당신께서 눈을 감으시면서 자신의 유해를 보관했다가 통일되면 고향 선산을 찾아 제일 크고 오래된 나무에 분골 수목장을 해달라는 유언까지….
오작녀 (눈물이라도 날 듯) 잠시 피난 내려와서 전쟁 끝나면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실 줄 아셨던 아버님! 그래서 당신한테만은 골통수가 별명을 안 지어주고 본명을 지켜준 거야.
한영호 (골통수의 손을 잡아주고) 아버진 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손자 이름까지 미리 지어 놓고 그렇게 좋아하시더니, 그 후 며칠 안 돼 눈을 감으셨지. 난 이런 말을 왠지 어릴 적 고향 친구들에게 꼭 하고 싶었어.
오작녀 (분위기가 잠시 가라앉은 듯하자 북돋우듯) 내가 이런 여자야! (한영호와 노나팔을 이끌어 손을 맞잡게 하고) 너희 둘은 소싯적 사춘기 라이벌 연적이 아니라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함께 다닌 친구야.
노나팔 자네들은 내가 노총각 신세로 색소폰과 결혼해서 전국 유람 떠도는 팔자, 결국엔 첫사랑 곁을 맴도는 늙다리로 보이는감?
오작녀 지금은 여기서 색소폰 불고 커피 팔이하며 우리 함께 청춘을 노래하는 낭만파 공원 지킴이 벗!
방귀만 그래, 친구들 이렇게 만난 김에 임시 동창회, 즉석 작은 동창회라 생각하고 공원 관리인이 시끄럽다 쫓아낼 때까지 맘껏 한번 놀아보자.
오작녀 내 신랑과 첫사랑이 이렇게 어울려 노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해. 호호호!
골통수 우린 전쟁둥이 죽마고우 부랄 친구들!
오작녀 난 부랄 없는뎅, 각자도생? 인생은 어차피 혼자, 1인극 모노드라마라는 말도 있더라만….
방귀만 무슨 소리야, 우린 무엇보다 청춘대학 동창생인데!
한영호 이렇게 너희들 만나니 내 병이 다 날아가버린 것 같네. 요즘 세상에 요양병원을 고려장이나 저승 대기실쯤으로 말한다고들 하던데, 나는 아내와 아들 내외가 가까이서 잘 보살펴주어 참 좋아요.
방귀만 (한영호를 껴안아주고) 건강 으뜸!
골통수 여기 어디 노인 전용 주막도 있다면서?
오작녀 이 친구야, 늙어서 더 좋은 건 술보다 친구야. 그나저나 은근히 기다렸는데, 아버님이 유언으로 남긴 우리 아들 이름 안 궁금한가 봐. 사실은 남북 통일되면 할아버지 유언을 지키려고 유골함을 보관해 모시고 사는 아들 이름을 더 자랑하고 싶어서 내 남편이 어렵사리 입을 뗀 것 같은데?
노나팔 나야 알지, 통일! 한 통일!
방귀만 피난민의 손자다운 이름일세. 전쟁둥이 아들다운 이름이야.
골통수 통일은 우리 전쟁둥이 청춘 동창생들 모두의 아들이 아닐까? 나도 골통수를 조통수로 바꿀까 보다. 조국통일 나팔수!
다함께 (박수를 치며 자연스럽게 한 목소리로) 통일 만세!
노나팔이 색소폰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맛보기 한두 소절도 다 채워 불기 전에 자연스럽게 ‘청춘을 돌려다오∼’로 이어져 넘어간다. 이번에는 첫 두 소절과 마지막 두 소절, 모두 네 소절만 간추려 색소폰 연주에 따라 모두 노래 부른다.
다함께 청춘을 돌려다오∼ 젊음을 다오∼ 청춘아, 내 청춘아∼ 어딜 가느냐∼. (어깨동무를 하고 춤추듯 노래하다가 마지막으로 주먹을 불끈 쥐고 다함께 하나 되어 외친다) 우리는 전쟁둥이, 청춘대학 졸업 청춘 동창회, 청춘 동창생!
—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