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옻순장아찌

한국문인협회 로고 이종명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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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이 떠 있던 새하얀 조각구름마저 자취를 감췄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그토록 갈망하던 가을이 너무 반가워서다. 교외로 향하는 승용차에 풍요로움이 어린아이처럼 달려와 안긴다. 차창에 펼쳐지는 파노라마가 눈이 부신다. 한 컷도 버릴 것 없는 완성된 작품, 그 자체다. 잠시도 한눈을 팔 수가 없다.
서울 근교에서 작은 농장을 하는 지인이 올해 고추와 고구마가 잘 되었다고 전해왔다. 붉은 김장 고추를 따내고도 풋고추가 지천이란다. 고구마 줄기가 너무 무성해서 순을 따줘야 한다고도 했다. 언제 오겠냐는 얘기다. 작년에 같이 갔었던 또 다른 지인과 의기투합하여 날짜를 잡았다. 아내가 더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고기를 준비했다고 하여 아내와 마트에서 싱싱한 포도를 한 상자 샀다. 간선도로에서 농장에 진입하는 마을 길 양옆으로 두 팔 흔들며 반기는 옥수수들이 정겹다. 농장은 참나무 숲이 덮인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치 아씨방에 낮게 둘러쳐진 수줍은 병풍처럼. 고향이 아니라도 포근하고 아늑함이 느껴진다.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골의 막다른 곳이다. 볕 잘 드는 방향으로 작은 초막이라도 짓고 살고픈 마음이 든다. 지인은 두서넛 이웃과 그 골을 차지하여 부족함이 없는 농부 생활을 누리고 있다.
별로 말이 없는 지인은 우리가 도착하자 씨익 한 번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리고는 물어보지도 않고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만든 숯불 간이 화덕을 집 그늘에 설치한다. 여름 내 정인들을 기다리며 구석에서 거미줄과 먼지에 덮여 있다가 마침내 빛을 보는 순간이다. 숯이 벌겋게 달아오르자 준비해 간 고기에서 비곗덩이를 잘라 석쇠에 묻은 먼지들을 닦아낸다.
석쇠에 올려진 삼겹살에서 기름이 뚝뚝 떨어지면서 지글거리는 소리와 냄새가 오감을 자극한다. 지인이 냉장고에서 묵은김치와 봄에 담근 듯한 장아찌를 꺼내 온다. 미리 씻어둔 깻잎과 풋고추를 수돗가에서 소쿠리째 들고 온다. 고기를 먹더라도 밥을 안 먹으면 서운하다면서 작은 공기에 퍼주는 밥이 채 두 술도 안 된다. 길쭉한 장아찌를 툭툭 썰어 밥 공기에 올려준다. 잘 익은 묵은김치와도 궁합이 맞는 삼겹살이 장아찌와 먹으니 더욱 기가 막힌다. 옻순 장아찌라고 한다. 주위 야산에 참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난 것을 봄에 따서 담갔다고 했다. 야생에서 나는 새순 봄나물 중에 옻순이 최고라는 말은 들었어도 직접 먹어보기는 처음이다. 엄나무순, 두릅순도 독특한 향이 뭇사람의 입맛을 돋우지만, 옻순이 단연 최고인 것 같았다. 좀 부족한 듯한 고기는 두 술 밥으로 채웠지만, 옻순 장아찌는 미련이 남는다. 눈치 빠른 지인이 그 귀한 옻순 장아찌를 따로 챙겨주었다. 고구마순, 풋고추, 깻잎에다 애호박까지 차 트렁크가 그득해졌지만, 마음은 자꾸 옻순 장아찌에 쏠린다. 한 시간여 돌아오는 길이 즐거웠다.
다음 날, 아침부터 왠지 목 주변과 겨드랑이 부근이 근질거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김없이 아침 운동 삼아 다니던 산에 올랐다. 그런데 평소 오르던 곳까지 절반도 못 가서 난리가 났다. 갑자기 온몸에 붉은 발진이 생기고 열이 오르며 호흡이 가빠졌다. 급하게 발길을 돌려 겨우 집으로 내려왔는데 죽을 것만 같았다. 소파에 그대로 쓰러졌다. 옻이었다. 옻 두드러기가 무섭게 온몸을 뒤덮었다. 겨우 정신을 좀 추스르고 찬물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자 다시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전신에 가려움이 엄습했다. 급하게 가까운 피부과 병원에 진료 접수를 했다. 예약 환자가 아니라서 삼십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참을 수 없는 가려움으로 남의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몸을 벅벅 긁어댔다. 주사를 맞고 사흘치 먹는 약과 바르는 연고를 처방받았다. 우선 급한 조치는 했으니까 진행 경과를 지켜보고 후속 치료를 하자는 의사의 말이다. 한 차례 광풍이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이런 어이없는 일이 있을까? 기가 막힌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되지 않는다. 불가사의다. 다시 생각해 봐도 수수께끼다. 그건 옻 오른 것이 처음이 아니라는 거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한 번은 거의 이십여 년 전 장모님 팔순 생신 때였다. 모처럼 수하 중 스무여 명이 옻닭집에 모였다. 약을 먹으면 괜찮다며 준비해 온 큰처남의 말대로 알약을 두 개씩 미리 먹었다. 처음 먹는 옻닭이라 다소 긴장은 했지만 맛있게 먹었다. 구수하고 깊은 국물이 그전에 맛보지 못했던 닭곰탕이었다. 평소 복날에 먹던 삼계탕과는 차원이 다른 보약이었다. 그러나 그다음 날부터 어떤 고생을 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또 한 번은 채 2년이나 되었을까? 일 년에 한두 번은 부부 동반 여행을 하는 동기생 두 명과 세 쌍이 충주호반과 월악산 단풍여행을 갔다. 충주호 유람선에서 본 절경과 월악산 단풍에 흠씬 물든 가슴으로 수안보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멋진 자연과 어우러진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꿩 요리가 일품이었다. 옆 테이블 전골에서 데쳐지는 김을 타고 번지는 옻순 향이 미묘하게 코끝을 자극했다. 다음 날 귀가하는 차 안에서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기껏 해야 김을 좀 마셨을 뿐인데. 억울하지만 약을 먹었음에도, 향만 맡았음에도 보름씩이나 걸려 비싼 대가를 톡톡히 치른 경험이 있다.
이럴 수가 있을까? 아니, 아니, 이럴 수는 없다. 옻순을 직접 먹으면서 어찌 그 끔찍했던 고통의 기억들이 떠오르지 않았을까? 밤새 한 잠도 못 자고 온몸을 벅벅 긁어대다 찬물을 뒤집어썼던 일이 남의 이야기였던가? 손톱만 한 물집들이 터져 진물이 줄줄 흐르는 상처에 이를 악물었던 일들이 꿈속이었던가? 옻순 장아찌의 색다른 향이 그 모든 것을 잊어버릴 정도였나?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눈 정 때문이었나? 포근하게 감싸주는 고향의 그리움이었나? 불볕더위와 폭우를 잘 이겨낸 필부필부에게 시리도록 파란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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