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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기다림

한국문인협회 로고 심옥이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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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왜 이제 왔어요?”
날카로운 질문으로 반짝이는 할아버지는 쥐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힘들었습니다. 쥐의 입술 주위는 원망과 저주의 침이 솟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할아버지의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하였습니다.
성군 고개 너머로 걸어오시면서 옛 집터라도 남아 있다면 어린 날의 풍경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찾아왔는데….
집은 허물어지고 없는 빈터, 세월의 흔적 더미에서 마주친 쥐의 앙칼진 질문에 할아버지는 당혹스러워 쥐에게 물었습니다.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냐?”
쥐는 비릿한 쉰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할아버지 집안에서 죽임당한 운잉손(雲仍孫)입니다.”
운잉손이라면 증손, 현손, 내손, 곤손, 잉손, 운손 7, 8대 손자를 이른다는 말인데, 할아버지는 손가락으로 헤아려 보았습니다.
“운잉손이라고…?”
“네. 운잉손입니다.”
“쥐가 어떻게 운잉손이란 어려운 말을 알아?”
쥐는 주저 없이 말을 받았습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서당집 수십 년을 살았으니 모를 리가 있겠어요?”
문득 할아버지의 조부께서 마을 서당 훈장을 지내셨다는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고, 어린 날 조부께서 읽으시던 낡은 한지 서첩을 찢어 제기를 만들었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엽전을 한지로 싸고 양 끝을 구멍에 꿰어 그 한지를 여러 갈래로 찢어서 균형을 잡도록 만들었습니 다. 지금 생각하니 대단히 과학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늙은 쥐 덕분에 형들과 제기치기로 즐거웠던 어린 날의 한 장면을 건져 올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쥐와 이야기하고 있는 자신이 몹시 우습고 난처하여 돌아서려다 살해당했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살해당했다고?”
“네. 우리 팔대 고조부가 할아버지 식구들에 의해 살해당했어요!”
살해당했다는 쥐의 말이 쥐가 할 수 있는 말인지 점점 의문이 들었습니다. 지금 서슬이 시퍼런 쥐의 태도를 보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무심하게 말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쥐의 눈에서 붉은 핏줄이 서는 것이 보였습니다. 원망과 원한의 실핏줄이 빨갛게 돋아났습니다. 갑자기 어릴 때 집에서 기르던 어미개의 눈에서 시뻘건 핏발이 솟든 일이 떠올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릴 적 부모님께서 개를 기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장에서 강아지를 사다가 마룻장 밑에 헌 옷가지로 개집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식사 때마다 식구들과 같이 음식을 챙겨주시며 정성으로 기르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학교에 갔다 올 때나 마을에서 놀다가 오면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뛰어올라 좋아서 난리였습니다. 강아지가 동네 형들에게 얻어맞기라도 하면 재빨리 형을 불러와 보호하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할아버지께서 5, 6학년이 되었을 무렵 개는 늙어 수명을 다했습니다.
그 후 할아버지 부모님께서는 대문간에 돼지는 길러도 개를 기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형이 용돈을 모아 강아지를 사서 또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개의 이름을 할아버지께서 지어 주셨습니다. 할아버지 형은 그 개를 엄청 좋아하여 늘 같이 붙어 다녔습니다.
그 개가 자라서 다섯 마리 강아지를 출산했습니다.

 

늦가을 토요일 오후 할아버지 형은 언덕 너머 작은아버지 집에 추수한 쌀을 가지러 갔었습니다.
그날 저녁 무렵 개가 좀 이상했습니다.
어미 개는 마루 밑 갓 낳은 강아지에게 한참이나 젖을 먹이고 나오더니 마당 구석구석을 돌다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듯 뒤꼍까지 한 바퀴 돌아 나오는 개를 할아버지 어머니께서 보시고
“아이고! 저거 죽은 쥐 먹었네!”
하시며 젖먹이 강아지를 측은한 눈빛으로 들여다보셨습니다.
어미 개는 집안 구석을 몇 번 더 컹컹거리며 돌다가 갑자기 눈에 불을 켜더니 뛰쳐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네 머슴들이 와서 말했다.
“아줌씨요, 이 집 개가 개골창에 처박혀 죽었는데 우리가 잘 모시겠심더.”
그때 할아버지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이시고 부엌으로 얼른 들어가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못 보셨지만, 동네 머슴들이 거창한 장례를 치러 주었다는 입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쥐가 사람 발에 밟힐 정도로 많고 극성스러워 농산물을 많이 축냈습니다. 정부에서는 대책을 세워 쥐 잡는 날을 정하였습니다. 초하루와 보름, 한 달에 두 번씩 동장이 집집마다 쥐약을 한 봉지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밥에 쥐약을 섞어 쥐가 다니는 곳에 놓아두라는 동장의 철저한 교육과 지시에 따라 시행됐습니다.
쥐 잡이 후에는 골목마다 죽은 쥐가 즐비했습니다. 집게로 집어 으슥한 곳에 묻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아마 그 쥐 잡이 때 죽은 쥐를 먹고 할아버지의 집 어미개가 죽었나 봅니다. 강아지 새끼를 두고 어미개는 눈에 불을 켜고 괴롭게 죽었습니다. 강아지들은 어미개를 다시 만나지 못하는 슬픈 날을 보냈습니다.

 

“그때 우리 집 개가 먹고 죽은 쥐가 너의 바로 팔대 고조부야?”
“그때 쥐약을 부엌문 앞에 두지 않았으면….”
쥐는 원망하는 투로 콧수염을 세우며 주절거렸습니다.
“정부는 많은 쥐를 소탕하기 위해 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거야.”
“할아버지의 어머니가 쥐약 넣은 밥에 참기름만 뿌리지 않았더라면….”
쥐의 말은 쥐약 섞은 밥에 참기름을 발라 쥐들이 먹도록 유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어머니께서 쥐약에 참기름을 뿌려 가며 쥐를 잡을 만큼 꾀가 없으신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주 순박한 시골 사람이었으니까요.
바로 그날인지 몰라도 어머니께서 참기름병을 실수로 깨뜨려 할아버지 아버지의 고함이 참기름 냄새에 섞여 온 식구가 숨죽여야 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깨뜨린 참기름을 쓸어 담고 남은 것을 쥐약 밥에 섞어 집 곳곳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그 책임을 따지려고 대대로 기다린 거야?”
“그로 인해 우리 쥐의 행복과 희망이 사라졌다고요!”
“쥐의 행복을 위해 사람들이 불행하라고? 너희의 속성을 생각해봐!”
쥐는 원망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씩씩거렸습니다.
참기름을 고의로 바르지 않았다는 것도 정성껏 쥐에게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참기름은 그 당시에 사람들이 먹는 것도 매우 소중한 기름이라 쥐약에 섞어 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쥐를 설득하기에는 쥐의 원한의 깊이가 쥐구멍보다 어둡고 깊었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오해로 원한을 품는 쥐가 쥐답게 어리석다고 생각하면서….
그때 조그마한 생쥐 한 마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할아버지 눈과 마주치자 거름 더미 속 쥐구멍으로 쏙 들어갔습니다.

 

늙은 쥐는 세월의 껍질도 벗지 못한 채 달아나다 뒤돌아보며 할아버지께 코를 쿵쿵거리며 말했습니다.
“그래도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요!”
할아버지는 어릴 때 잠자던 얼굴에 기어오른 생쥐가 떠오르고 스물한 느낌이 되살아나 몸서리쳐졌습니다. 전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거나 미안하지도 않았습니다.
할아버지는 길가에 돌멩이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찾았습니다.
구석진 곳에 주먹만 한 것이 보여 손을 내밀어 줍자 쥐는 재빨리 거름 무더기 구멍으로 사라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쥐였던 돌멩이를 놓아 버리자 쥐는 구멍에서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습니다.
“할아버지 후손을 또 기다려야 하나요?”
할아버지는 이미 그 골목을 벗어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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