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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인협회 로고 장수임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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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깜깜한 침실에 누워 오지 않는 잠을 청한다. 아침이 오려면 5시간이 넘게 남았고, 커튼 틈새로 길쭉하게 반짝이는 가로등 불빛이 일자로 서 있다. 밝은 빛 때문에 일률적인 벽지 무늬가 조금씩 뒤틀리고, 엉켜 유사성 없이 새로운 곡선을 만들어낸다. 그 모양이 나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눈을 감자 청각이 더 예민해져 이제는 정적을 뚫고 창문 밖으로 오가는 차량 소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시동을 거는 기계음, 묵직한 바퀴가 굴러가는 둔탁한 울림, 신호에 걸려 잠깐 멈춰 선 브레이크 마찰음. 전부 다 보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드물게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오가는데, 나도 모르게 그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사람 사는 이야기는 다 똑같다고 하지만, 가끔은 색다른 이야기도 들려온다. 거기엔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 감정도 있고, 그러기에 나는 적당한 말을 찾을 수 없어서 새로운 말이 필요할 때도 있다. 그와 동시에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함께 한다는 것도, 언제나처럼 모르는 일은 모르는 채로 지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일면식도 없는 타인의 비밀을 알아버린 나는 자꾸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더욱 불면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제 세상의 소음은 잊고 나에게 집중해 본다. 방 안의 공기는 시원하고 고요하다. 숨을 내쉬면 내 숨결이 고요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아 나는 돌아오는 내 숨소리를 들으려고 더 깊고 천천히 호흡한다.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나는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하지만 그런 기분을 언제 느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슬프기도 하고, 기억할 수 없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다른 무언가로 변한다. 예전에는 행복했었지만, 시간이 지나 생각해 보면 그러지 않은 순간도 있었다. 예전과 똑같은 감정일 수 없는 다른 무언가와 마주하며 겪어본 적 없는 기분을 느끼면 잠깐 감정이 마비된다. 그 순간엔 기억의 파도에 갇혀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꾸만 우울감에 잠식당한다. 그렇게 조각난 기억들은 뭔가 더 어두운 것으로 변질되어 나를 해칠 것만 같아서 이불을 끌어당겨 온기 속으로 숨는다.
불면은 생각에 통째로 잡아먹힌 사람처럼, 질문 하나에 대답을 마치기 전에 다음 질문이 떠오른다. 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있지만, 오늘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창밖을 바라보자 구름 사이로 아직 높은 둥근 달이 본인이 해야 할 일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오늘 밤은 모든 것이 이상하다. 항상 거기에 있는 달이지만, 그것을 보고 느끼고, 어둠을 두려워하는 나는 내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을 경험하며 배우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던 평범한 하루의 끝이 결코 평범하지 못하다. 모든 것을 지우고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인간의 감정이란 스스로 알 수 없을 만큼 오묘하고,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별이나 양을 수없이 새어 보아도 나의 시간은 영원히 멈춰 있고, 벽에 걸린 시곗바늘만 고고한 달빛에 박자를 맞춰 춤을 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집 안에 내려앉은 어둠을 헤치며 안방문을 조심스레 연다. 잠든 가족들이 깰까 봐 발가락에 힘을 주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체중이 실린 앞발은 가느다랗게 떨리다 발등 위로 핏줄을 드러내며 힘들다고 성을 낸다. 9년째 살고 있는 이 집은 내가 매일 영역을 정해 시도 때도 없이 청소한 덕에 빛이 없어도 어디든 갈 수 있는 공간이다. 모두가 잠든 순간에 혼자만 깨어 있는 내가 안쓰럽다가도 곤히 잠든 아들 얼굴을 보면 어느새 표정이 바뀐다.
40대 중반을 넘어서자 나는 희로애락에 둔감해졌다. 즐거운 일도 마냥 즐겁지 않고, 슬픈 일도 그다지 슬프지 않고, 분노하는 일도 줄어들고, 바라는 것들도 시들어졌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상실된 기분인데, 꽃은 피고 계절은 지나가고 세상은 멀쩡하게 잘 돌아갔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기 위해 병원을 갔더니 ‘갱년기’라고 했다. 나는 바라는 게 없이 살아왔는데, 인생은 늘 잃어버리는 것만 같다. 의사가 처방해 준 약 봉지를 뜯어 수면제 한 알을 삼킨다. 약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그 서늘한 감촉을 느끼며 새벽의 고요함 속으로 빠져든다.
밤은 모두에게 쉼을 허락하는 시간이다. 숙면에 빠진 이들은 하루의 고단함을 걷어내고 내일을 시작할 기운을 얻는다.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생체시계가 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온몸을 한 바퀴 돌아오는 시간, 들숨과 날숨이 되풀이되어 한 번의 호흡이 완성되는 시간, 매달 일정한 날짜에 맞춰 반복되는 월경(月經), 식사와 용변까지도 규칙적으로 순환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어떤 변화로 인해 다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할 때가 있다. 그래서 불면은 내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인생의 방향이 틀어졌으니, 너만의 고유한 규칙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갱년기는 앞으로 남은 세월을 잘 살기 위해서,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내 몸과 마음에 잠깐의 공백을 허락하는 시간이다. 세상에 있는 모든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절로 피고 지는 꽃처럼, 해가 지면 밤이 오듯이, 비가 지나간 자리에 새순이 돋아나듯 자연의 순리에 맞춰 겸손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내일 아침에는 해가 중천에 떠도 내 눈은 떠지지 않겠지만, 하루의 게으름은 앞으로 더 열심히 살아갈 나를 위한 적당한 위로라 생각하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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