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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세월·Ⅶ

깊어 가는 가을, 코발트 빛으로 투명해진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이따금 그려진다.눈썹이 참숯처럼 짙고 눈동자가 가을 별빛같이 맑았던 H선생님의 모습이.선생님은 내가 초등학교 육 학년 시절의 담임이었다.다섯 자 오 푼이 될까 말까 한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소년티가 풍기는 때 묻지 않은 얼굴 모습, 그리고 은방울처럼 낭랑한 목소리를 지닌 분이셨다.선생님은 틈

  • 곽흥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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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밤길을 걸으며

밤길을 걷다 보면 고요한 밤하늘은 달이 흰 구름과 숨바꼭질을 한다.달이 숨는 것인지, 흰 구름이 흘러가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다.이 밤 희끄무레한 달빛은 오늘따라 어릴 때 고향에서 바라보던 하현달 생각이 난다.뒷마당 울타리에 서 있던 높은 참죽나무에 달이 걸려 있던 겨울밤은 너무도 쓸쓸하였다.깜박이는 호롱불 밑에서 숙제를 하고 있을 때면, 윗방에선 밤이

  • 김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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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시와 낭송의 목가적 샹그릴라(Shangri-la)

초등학교 다닐 무렵에 충청도 부여에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어언 반세기나 지났다. 지금도 어렴풋이 고향의 강물은 동심으로 흐른다. 둥구나무와 시골길이 아득하여 소풍날처럼 설렌다. 나의 시심은 늘상 그렇게 고샅길을 지나 도시의 신작로에 닿았다.이처럼 내 작은 문학의 언저리는 맨먼저 유년 시절의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동심의 울 안에서 움을 틔운 새싹들의 떨림이

  • 이은다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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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다 죽여라

어린 아들을 잃은 거지가 만조백관들 앞에 앉아 있는 왕의 뺨을 사정없이 후려친다. 그러나 왕이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심히 답답해할 뿐이다. 이런 가위눌림의 상태로 거지의 말을 듣는다.“너 상명지통을 아는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아는가 말이다! 그런데 뭐 뭐 다 죽여라! 한 하늘 아래에 두 왕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즉, 다 죽이

  • 이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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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9호 별명

톡 톡, 카톡이 온다. 이번 토요일에 우리 모여 밥 먹자는 사진 단톡방 친구들이다. 모두 본명 아닌 별명을 쓴다. 나도 물론 별명을 사용하고 있다. 닉네임이라고들 한다.나는 열심히는 아니고 게으름이 뚝 뚝 묻어나는 블로그를 하는데 여기서도 본명을 쓰지 않고 별명을 사용하고 있다. 댓글은 막아 놓고 공감은 열어 놓는다. 게시물을 언제나 0시로 예약 발행하는데

  • 박순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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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9호 백발노안(白髮老顔)

내 본디 게으른 성품은 아니다만 어인 일이런지 이발을 하러 가는 것 만은 늘 머무적거리는 습관이 있다.두어 달이 지나서야 한 번쯤 가게 되는데 오늘은 꼭 길게 늘어진 머 리카락을 자르려고 작정한 날이다. 그러기에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간 다. 면도사도 없이 혼자 하는 작은 이발소이기에 먼저 온 손님들이 있 으면 지루하게 차례를 기다려야 하니 이렇듯 서둘러

  • 조효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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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 69호 한국 문단의 메카

진천은 세계적 작가 포석 조명희 문인, 보재 이상설 선생님이 탄생한 곳이며, 한국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 문인도 잠들고 계시는 문학예술의 자랑스러운 고장이다. 길가의 돌멩이, 나무 한 그루에도 문향이 향기 나는 진천 고을, 예부터 진천은 전국에서 가장 살고 싶은 고장으로 명성 높은 곳이라 생거진천이라고 불려오고 있다.정든 내 고향, 진천은 해를 거듭

  • 장병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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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그해 남양에서

남양군도(南洋群島)는 남쪽 바다에 흩어져 있는 무리 섬을 말한다. 더 이르자면 남태평양에 있는 크고 작은 군도들이다. 우리가 어릴 때는 왜정(倭政)의 끝자락이었는데, 태평양의 섬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충청도의 산골 고향에 자라면서 나는 어른들로부터 남양군도의 얘기를 많이 들었던 생각이 난다. 남양군도가 바다에 있는 섬을 이르기보다 사람들은 고향의 젊은 장

  • 김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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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노마스크

친정에 갔던 각시가 돌아왔습니다. 말도 많았고 탈도 많던 시국이라, 덜컥 겁도 났었습니다. 각시가 영영 집으로 오지 못할 것 같은 현상들이 하루가 멀다고 생겨나니 더 안달하고 애가 탔습니다. 친정이 좀 멀어야! 한달음에 달려가서라도 모셔오지요. 아닙니다. 갈 수만 있으면 지구 끝까지라도 찾아가겠는데, 안팎으로 그럴 처지도 못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지

  • 윤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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