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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과 대화한 여인

한국문인협회 로고 김태겸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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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본래 덧없다. 한때 백두대간을 비롯한 전국 명산을 안방 드나들 듯 오르내리던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릎 연골이 닳아 아파트 주변을 천천히 도는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익숙했던 일상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사이, 주변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자주 듣는다. 은퇴 후 함께 당구를 치던 두 친구 중 하나는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다른 친구는 신장암으로 투병 중이다. 두 사람 모두 오랜 흡연자였다. 나는 숱하게 충고하고 때로는 화도 내보았지만, 결국 인간의 습관을 바꾸는 일은 타인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을 뿐이었다. 암 선고를 받은 후에야 두 사람 모두 담배를 끊었으나 한 친구는 이미 늦은 뒤였다. 세월은 우리 몸을 서서히 소모시키고, 어느 날 경고도 없이 돌연 종말을 예고한다. 우리는 그때서야 비로소 살아 있음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몇 해 전, 명상 모임을 따라 인도로 순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열댓 명 정도 참여한 모임이었는데 대부분 여성이었고, 남자는 서너 명 정도에 불과했다. 여정 중, 인도 오지 마을로 가기 위해 여섯 시간가량 밴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차에 탄 다섯 명의 일행은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미 며칠 동안 여행을 함께한 터라 어색함이 가신 뒤였다.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서로 자기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대해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은 한 여인이 있다.
그녀는 예순 무렵으로 보였다. 희끗한 머리칼, 조용한 말씨, 남을 배려하는 눈빛. 체구는 자그마했지만 기품이 흘렀다. 행동이 느긋해 방을 정할 때 약삭빠른 일행에게 늘 뒤처졌지만,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을 도울 일이 있을 때는 앞장섰다. 숙소 예약이 잘못되어 몇 사람은 멀고 불편한 숙소로 이동해야 했을 때, 가장 먼저 가방을 들고 나섰고, 방문한 사찰에 보시할 때는 주저하지 않고 지갑을 열었다.
그런 그녀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암 환자입니다. 수술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여행을 망설였지만, 이번 길이 제게는 마지막 순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용기를 냈습니다.”
그녀는 1년 전 난소암 진단을 받았다. 이미 진행된 상태였고 의사조차 결과를 장담하지 못했다. 남편은 절망 속에서 자연요법을 권했으나, 그녀는 현대의학을 믿어보기로 했다. 수술 날짜를 잡은 후 갑자기 하복부에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녀는 뜻밖의 생각을 했다.
‘암세포가 내 몸에서 분리돼 죽는다는 걸 알아서 괴로워하나 보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암과 대화를 시작했다.
“너도 내 몸의 일부인데,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없애야 해서 미안해. 그래도 그동안 착하게 굴어줘서 고마워. 덕분에 크게 아프지 않았어.”
그렇게 속삭이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가라앉았다.
수술 당일, 그녀는 집도의에게 부탁했다.
“선생님, 암세포를 떼어내실 때 부드럽게 다뤄 주세요.”
의사는 환자가 겁을 먹은 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마취하면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암세포도 제 몸의 일부이니 존중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들은 의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암을 원망하고 증오하는데, 그녀는 암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삶과 죽음을 나누는 경계마저 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어진 항암 치료도 잘 견뎠다. 이제는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 담당의사는 매번 진료 때마다 미소로 그녀를 반겼다. 수많은 환자를 보아왔지만, 그렇게 절망 속에서도 평온함을 지닌 이는 드물었다.
인도 여행을 마치고도 명상 모임은 한동안 이어졌다. 현지를 순례하며 겪은 다양한 경험이 참가자의 친숙도를 더욱 깊게 만든 것 같았다. 일반 여행을 함께 갔다 와도 친근감이 커지게 마련인데, 하물며 영성을 교류하는 모임에서랴?
그녀는 이 모임에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사람과는 연락을 주고받는 눈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완치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5년간의 관찰 기간을 무사히 넘긴 것이다.
나는 믿고 싶다. 그녀가 암을 이겨낸 것은 의술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통까지 포용하는 긍정적 태도 때문이었다고. 그녀는 삶의 불가피한 고통을 밀어내지 않고 함께 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암을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순간, 암세포는 이미 투쟁 의욕을 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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