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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과 한글, 그리고 케데헌

한국문인협회 로고 최시선

책 제목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겨울호 2025년 12월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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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한다.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일단 아찔하다.
‘아마 지금도 한자를 쓰고 있겠지. 하늘천, 따지… 하면서 천자문을 외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야. 영어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지. 왜냐하면, 옛날에는 중국을 섬겼기에 한자를 썼지만, 지금은 미국을 좋아하니 영어를 쓸지도 몰라.’
이렇게 가끔 혼자 뇌까린다.
나는 네 명의 형제 중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대학 교재가 온통 한자였다. 하여, 한자를 죽어라 공부했다. 고교 때도 한자를 어느 정도 공부했지만, 대학은 장난이 아니었다. 더구나 시험 볼 때 한자를 섞어 쓰면 학점이 더 잘 나왔다. 아버지는 어느 정도 배운 분이라서 한자를 잘 썼다. 내가 언젠가 한자 실력을 보여줬더니, 당신이 직접 쓰던 제사 축문이나 지방 쓰는 것을 다 내게 맡겼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집 안 형제 중에서 내가 최고인 줄 알고 은근히 잘난 체하는 마음도 생겼다. 한자는 나에게 하나의 특권이요 자랑이었다.
‘나랏말싸미 중국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새….’
세종 어제 훈민정음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훈민정음 서문의 원문과 언해문을 다 외우고 있다. 이를 읊을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왜 그럴까. 내가 그동안 훈민정음을 몰랐기 때문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을 그렇게 보았어도 오른쪽 손에 들려 있는 책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 책은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었다. 이는 국보이면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
중학교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하여 여러 번 입상했다. 살면서 몇 권의 책을 냈고, 문단에 데뷔하여 지금은 문인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늘 의문을 품었다. 내가 쓰고 있는 이 한글은 어떻게 만들었지?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웠다. 2019년 <나랏말싸미>라는 영화를 보고는 훈민정음 탄생의 비밀이 너무도 궁금하여 조선왕조실록을 뒤지고, 수십 권의 책을 사서 탐독했다. 하여, 2020년에 도전적인 책인 『훈민정음 비밀코드와 신미대사』를 내기도 했다. 이 책은 이번에 2쇄를 찍었다.
그렇다. 나는 훈민정음을 공부하고 나서는 생각이 확 바뀌었다. 세종이 왜 훈민정음을 만들었는지를 아는 순간 세상이 새롭게 보였다. 세종은 우리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우리의 글자를 만들고 싶었다. 여기에는 자주와 애민 정신, 그리고 실용 정신이 깔려 있다. 한자는 우리와 어순도 다르고, 우리말을 다 담을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세종은 당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혁명적인 생각을 했다. 바로 그건 훈민정음 창제였다.
계해년 1443년 12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노라고 발표하자 신하들이 깜짝 놀랐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중국의 운서인 『운회(韻會)』를 언문으로 번역하라고 명한다. 그러자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 등은 6개 항에 걸친 긴 반대 상소를 올린다. 이른바, 그 유명한 갑자 상소다. 상소의 요지는 이렇다. 하나는 중국을 섬기는 사대의 예에 어긋나고, 또 하나는 백성들이 문자를 알면 큰일 난다는 것이었다. 세종은 반대 상소를 받고 조목조목 반박하고 하옥까지 시킨다.
세종은 신하들의 상소를 받고 머리가 아팠다. 1444년,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눈병을 치료한다는 핑계로 120박 122일간 청주 초수 행궁에 머문다. 여기에서 훈민정음 창제 마무리와 반포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1446년 9월, 드디어 훈민정음 해례본을 지어 반포한다. 여기에 훈민정음 제자 원리부터 초·중·종성의 모든 풀이를 담았다. 이를 양반 지식층에 배포하니 더 이상 반대가 없었다. 양반들도 언문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과거시험 과목으로 채택하는 등 온갖 애를 썼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정작 훈민정음은 세조 때에 와서 꽃핀다. 세조는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본하여 월인석보를 펴내고, 간경도감을 만들어 불경 언해를 주도했다. 이때 중심 역할을 한 분이 신미대사(본명 김수성)다. 신미는 단독으로 여러 권의 불서를 언문으로 쉽게 번역했다.
훈민정음은 연산군 때 위기에 처한다. 그는 언문으로 자신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언문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훈민정음은 부녀자나 중이 쓰는 글이라 하여 암글·중글 등으로 불리었다. 최세진의 『훈몽자회』, 최석정의 『경세훈민정음』,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 등을 거치며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그러다가 1910년경 주시경 등의 노력으로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질경이처럼 밟히면서도 억척스럽게 살아온 한글! 이를 어찌 몇 자의 필설로 말할 수 있으랴. 가장 안타까운 건 실학자도 언문을 외면했다는 사실이다. 만일 대학자 정약용이 언문을 썼더라면 훈민정음은 다시 살아났을 것이다. 백성들은 여전히 언문을 배울 수 없었다. 소통이 안 되니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도 알 수 없었다. 이러니 나라가 온전했겠는가!
우리가 짧은 동안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힘은 무엇일까. 나는 단연코 한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한글은 강력한 소통 도구였다. 요즘 한류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어디에서나 K-컬처를 주목한다. 그 중심에 한글이 있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 유행하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바로 <케데헌>이라는 영화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줄인 말이다. 하도 사람들이 말하기에 보았더니 과연 대단했다.
이 영화는 미국의 자본으로 일본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 영화다. 내 참, 이 나이에 만화영화를 보다니…. 그런데 보기를 잘했다. 영화의 배경은 한국이고, 주로 영어지만 사이사이에 한글이 나온다. 외국인에게는 이게 뇌리에 박혔나 보다. 요즘 영화 배경으로 나온 곳에 외국인이 넘쳐난다. 다 이 영화 덕분이다. 한글을 배우기 위해 난리다. 바야흐로 한국이 세계를 주도할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면 국뽕이라고 할까.
한자나 영어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한자는 동아시아의 주류 문자였고, 영어는 세계화 시대에 알면 좋다. 그러나 한글보다 앞세울 수는 없다. 세종이 직접 지은 『월인천강지곡』처럼, 한글은 크게 쓰고 한자나 영어는 그 밑에 작게 쓰면 된다. 그래야 우리가 살고, 우리의 정체성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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