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들어 최악이었다는 황사가 전국을 누런 흙먼지 속에 가두어 버리던 날. 황사주의보를 귀담아듣지 못했던 우리 가족은 모처럼 떠나는 주말여행에 모두 들떠 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터라 몸단장에 열을 내는 아내는 물론 막내딸 녀석도 벌써 지도를 펼쳐보며 목적지까지의 제일 빠른 길 찾기에 바빴다. 우리 부부가 벌어들
- 고봉주
올 들어 최악이었다는 황사가 전국을 누런 흙먼지 속에 가두어 버리던 날. 황사주의보를 귀담아듣지 못했던 우리 가족은 모처럼 떠나는 주말여행에 모두 들떠 있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여행다운 여행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터라 몸단장에 열을 내는 아내는 물론 막내딸 녀석도 벌써 지도를 펼쳐보며 목적지까지의 제일 빠른 길 찾기에 바빴다. 우리 부부가 벌어들
*기억은 스냅사진과 같고, 변형은 왜곡된 기억이나 보정된 사진과 같다. 망각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제, 꺼내보지 않는 사진과 같지 않을까?나에게는 서른일곱 살의 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10살 되던 해 3월 30일, 아버지는 세상에서 사라졌다.오늘은 사라진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추위가 꺾이고 코트를 벗어버릴 때쯤이면 엄마에게서 전화가 온다. 내가 회사
꽃샘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공원으로 향하는 길은 사월 하순인데도 바람 때문인지 제법 썰렁하다. 주공아파트 쪽으로 걸어가니 벽에 붙은 붉은 현수막이 바람에 춤을 춘다. 지역신문에서 이 아파트가 곧 헐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미세먼지가 많은 날인데도 길을 나섰다. 그리 먼 곳이 아닌데도 차를 타고 지나가기만 했지 직접 찾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산한 분
벽시계가 졸고 있다. 신혼집들이 선물로 받은 뻐꾸기시계다. 지금은 집마다 시계가 서너 개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삼십여 년 전에는 값나가는 물건이었다. 급전이 필요할 때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면 가격도 톡톡히 쳐주는 귀한 대접을 받던 때도 있었다.색바랜 벽시계는 이제 제 몸조차 지탱하기 힘겨워한다. 거실에서 검붉은 녹이 내려앉은 못 하나에 의지하고 있다. 건
나른한 오후다. 세상 만물이 오수에 들었는지 고요하다. 아직 한여름은 도착하지 않았는데 마당의 기운은 습하고 끈적하다. 무심하게 내리쬐는 햇살마저 지루하다.오랜만에 들른 시골집이다. 굳게 잠긴 현관문이 부재중인 주인을 대신해 출입을 막아선다. 낯선 이의 등장에 백구가 요란하게 짖어댄다. 제 밥그릇도 못 알아보는지 찌그러진 양은 냄비가 목줄에 쓸려 마른 먼지
‘오월의 보랏빛 향수.’ 초록으로 눈 뜨며 일어나는 봄. 그 유혹에 빠져본 사람만 알 수 있다. 나의 텃밭 가장자리에 오동나무 한 그루가 봄이 오면 어김없이 꽃을 피운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흙을 사랑하여 텃밭을 구입했다. 들머리 가장자리에는 매화나무가 있어서 꽃샘추위에 하얀 향수를 입에 물고 벌을 유혹한다. 자연은 계절을 어기지 않으며, 꽃 피우는 순서
길은 끝없이 길게 이어진다. 길은 직선이 되어 가리마같이 단정하기도 하고, 뱀 같은 몸뚱이로 고불고불 고부라진 곡선이 되기도 하고, 여름의 아스팔트 길은 덥고 지쳐 퍼지기도 한다. 또 길은 꼬리를 감추기도 하는 변화무상한 모습을 보인다. 길은 때로는 하얀 눈길로, 빗발치는 빗길로, 어스름 새벽길로, 밤을 집어삼킨 어두운 얼굴로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길은
퇴직한 후에 집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 나태해지고 게으른 생활습관도 함께 찾아오는 것 같다. 매일 똑같은 일상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무료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세월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르게 잘도 흐른다. 잠깐이면 한 달이요. 조금만 더 지나면 일 년이니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세월이 아닌가 싶다. 직장에 다닐 때는 바빠서 못했던 일을
2024년 올해 여름은 유난히도 덥고 길었다. 나의 고향 김포는 곡창지대였고 특히 우리는 시골 쪽이었다. 열대야에 시달리고 있는 요즘 아련한 추억! 그 옛날 학교 종소리 듣고 달려가서, 오후 수업까지 끝나면 가방 둘러메고 새집 털기도 하고, 집게벌레(사슴벌레) 잡으러 다니고 계곡으로 달려가서 차가운 물로 멱감고 가재 잡아 깡통에 넣어 가져와서 구워 먹기도
TV를 켠다. 리모컨으로 자주 보는 채널로 바로 갈 수 있지만 하나씩 순서대로 누른다. 중간중간에 홈쇼핑 채널이 있다. 구입하고 싶은 물건이 있어 찾아본다기보다 습관적으로 그냥 본다. 어느 날 한 쇼핑 방송에 꽂혔다. 젊은 남성 모델이 입은 셔츠가 너무 멋있게 보였다. 저 옷을 입으면 나도 조금은 더 멋스럽게 보일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점을 찍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