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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ㄹㅎ·19

한국문인협회 로고 장창호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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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사람_ 한사람(고양이 이미지)|다른 사람(개 이미지)|또 다른 사람(호랑이 이미지)|더 다른 사람(코끼리 이미지)|그 사람(쥐 이미지)
때_ 언제든
곳_ 어디든

 


*이 연극에서 연기자의 음성은 감정에 따라 주고받는 대화라기보다, 중얼거림이나 귓속말 혹은 낮게 속삭이거나 숨소리가 드나드는 방식으로 들렸으면 한다. 대사를 해야 할 때 아예 침묵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나, 연기자의 섬세한 몸짓으로 대사가 전달될 수 있다면 그런 방식도 좋겠다. 인물들은 움직임이 절제되어 있되 어떨 땐 본능이 발동한 동물 같은 느낌이 든다. 다만 특정 동물의 이미지를 단번에 눈치채지 않도록 유의하면 좋겠다. 연기자들의 움직임에서 한 가지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무대에 등장한 인물이 다섯 사람이 될 때는 중심을 향하든 등을 지고 있든 원 모양을 이루되, 모두가 서로의 양손을 잡지 않으면 얼어붙듯 함께 움직임이 멎는다는 점이다.
막이 오르면 한 사람, 어디론가 걷고 있다. 걷다 보면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 또 다른 사람이 나오면 걷는 사람은 셋이 된다. 더 다른 사람, 그 사람까지 다섯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다가 둘이 되고, 어느 순간 둘에서 혼자가 되기도 한다. 혼자는 다시 여럿이 되고 여럿은 아무도 아닌 수풀이거나 안개로 보일 때도 있다. 어느 경우든 눈여겨보면 동물 이미지의 사람임이 드러난다. 어쨌든 지금은 둘—— 이제부턴 인물을 특정하지 않는다. 등·퇴장은 연출가(한 명이든 여럿이든)의 임의선택을 존중한다——이 걷는다. 둘은 걸으면서 서로의 모습을 바꿔보려 한다. 겉모습에 눈길을 주는 한, 사람이 지닌 고유의 선이나 색깔, 점들의 이미지나 자취를 놓칠 수 있으니 주의할 것. 한 사람, 무슨 소리를 듣는다. 다른 사람에겐 들리지 않는다. 한 사람, 그 소리를 본다. 만진다, 맛을 본다, 굴린다. 가지고 논다. 눈부시게 흩어지는 자음을 놓고 모음을 발화하면 '어디까지 가려고?’이다. 문장으로 들리는 게 아니라 음절 하나하나를 탁구공처럼 주고받으면서 그 문장이 전해진다. 점점 자음과 모음을 뱉는 사람의 말로 들린다.

 

…어디까지 가려고?
어디든 가야지.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고?
돌고 있겠지. (팽이를 돌리는 시늉) 이렇게, 빙글빙글.
겨우 그 정도야?
이만하면 깔맞춤이지.
발을 깎아 신는 유리구두처럼? 그런 걸 신고 여태 산대? 
오죽하면 맨발을 버렸을까?
상상은 유플릭스에 있지. 한번 보면 하루가 지나가. 우리 배우하고 외국 배우하고 다른 게 뭔지 알아?
눈? 머리 색깔? 얼굴이겠지. 표정에 그게 묻어나와.
(소리 없는 포복절도, 겨우) 그게 들어 있던 신발주머닌 어떻게 했어? 
누가 내 뺨을 때려주면 좋겠는데… 한 번만.
버렸구나!
꼭 한 번만…

 

침묵. 사방에 나타나는 실루엣.

 

탕! 타타타타타타타… (뒷짐을 지고 집게손가락을 까닥이며) 타타타타타타타… 타당!

 

정적.

 

몰려다니며 떼창을 해대는, 저 소릴 들어봐. 빨강이야. 여기도, 저기서도 노란 단풍은 없어.

 

정적.

 

안들려.
나도.
너도? (사이) 정말? (사이) 왜?
여태 들었으니까.
어디선가 들리겠지, 처음 들은 이야기라면?
한 번 들으면 하루가 가, 듣고 또 듣고 다시 듣고.
그게 난무하니까, 어차피.
넌 그러고 싶니? 그걸 외면하면 진정되냐고? 그게 그칠 것 같냐고? 
딱! 딱! 입 다물고 살아도 이런 때엔 한마디 해야지. 저렇게 꼬물거리는데?
(노래)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입니다 하늘 높이 아름답게 펄럭입니다. (대사) 제비꽃은 제비가 안 와도 피고, 봄꽃은 봄바람이 안 불어도 피는데… 왜 이렇게 깜깜해?
불빛은 차갑고?
어느 쪽이야?
바람 부는 쪽이야. 바람이 불기 전에 엎드리고 열풍이 몰아치기 전에 덮치지.
그런 사람이 있어야 그게 식지. 붙을 건 붙고 터질 건 터져야지. 싸우지 않은 주먹은 없어. 봐. (두 주먹을 보이고는 툭툭 부딪치며) 그게 그거야.
(두 주먹을 보이고는 툭툭 부딪치며) 치사하다.
무섭기도 하지. 나중엔 아무것도 아닌데 활활 붙을 땐 돌도 태워. 거기 끼어드는 말이란 말은 다 불쏘시개야. 식지 않고 타올라. 아무리 무거워도 하루살이거나 청맹과니거나, 불나방일 테니.
알 때가 없어, 살아 보니. 그게 맞는다고 해도 알 수 없더라고. 알 필요가 없지.
누르고, 어르고, 달래도 일어선다고. 일어서야 시르죽지. 이만하다가도 한번 들어가면 쏜살같이 나와, 도루묵이야.
관세음보살이겠지, 아미타불 돌부처거나. 그거거나!
뭐라고?

 

적당히 입을 벌리고 걷는다. 뛰어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걷다가 멈추고, 부리나케 뛰기도 한다. 천천히 가는 사람도 뛰는 모양새다.

 

서! 서! 거기 서!

 

뛰어가던 사람, 순간적으로 멈춰 선다. 뒤돌아보고는 다시 간다. 가다가 돌아서서 엎드린다. 기어간다.

 

서! 거기 서!

 

기던 사람, 선다. 오던 길 되짚어 나무늘보의 걸음으로 간다. 사람들이 가던 길을 여러 번 돌아도 몇 발짝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든 크게 웃지만 기는 사람은 웃음도 느릿느릿 터져 나와 무슨 울림처럼 들린다.

 

가자, 같이 가자. 저 언덕에.

 

사람들, 하나둘 빠져나가고 기던 사람 홀로 선다. 퍼덕거리는 새의 날갯짓.

 

온다! 온다! 놈들이 온다. 막아라! 담을 넘어서 온다. 지붕 위로 내려온다. 철조망을 끊고 온다. 완전무장하고 온다. 온다! 온다! 녀석이 온다. 산 넘어서 온다. 골로 온다. 개스! 개스! 방독면! 아드로핀! 핀! 핀! (정적) 갔어. 온다더니 오자마자 갔어. 가버렸어. 까마귀도, 독수리도, 참새도, 슴새도 가버렸어, 몽땅…

 

다가오는 실루엣.

 

넌? 대체… 너는?

 

사이.

 

네가 여길….

 

침묵.

 

너도 그걸?

 

사이.

 

난 그저….

 

침묵.

 

아무래도….

 

사이.

 

도무지….

 

사이.

 

(한숨) 끝났어. 다….

 

트렉터 소리. 웅성거리는 인파. 호각 소리.

 

(손으로 소리친다.) ㄴㄹㅅㄱㄹ ㅊㅍㅎㄹ!
(발로 소리친다.) ㅅㅌ ㄷ ㅅㅌ! 
(손과 발 대신 온몸으로 소리친다.) ㄴㄹㅅㅌㅅㄱㄹㄷ ㅊㅍㅅㅌㅎㄹ!

 

사방이 깜깜하다. 한쪽에서는 빛이 일고, 다른 쪽에서는 뭐든 펄럭이는 소리가 난다.

 

(저를 어루만지다가 온몸을 털며) 아니! 이제 시작이야. 이제부터야. (두루 살피며) 어디쯤 오고 있는 거니? 이미 와 있니? (사이) 녀석이야! 세 연놈은 없고 한 녀석이 남았어. (품에서 작은 책을 꺼내며) 세상에 없는 것들이 있던 것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없는 것과…. (사이) 이 칼이 보이 냐?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벤다. 긴 칼로, 이 벼린 날로, 담금질한 무쇠로, 스치면 죽는 이 보검으로. 이빨이 무뎌졌냐? 발톱이 망가졌냐? 줄무늬가 바랬냐? 산신 자리에서 내려오더니 개가 됐냐?

 

개와 호랑이의 울음, 메아리친다. 사이. 코끼리의 울음. 쥐가 찍찍거리는 소리. 앙칼지게 스치는 고양이의 울음, 그리고 정적.

 

한 사람 앞으로 두 사람이 막아서고, 두 사람 옆으로 또 한 사람, 그 한 사람 곁에서 손을 잡아 늘이는 사람이 있다.

 

(그한사람) 얼씨구!
(넷이 서로를 향해) 에라이! 
니미럴!
염병할! 
제기랄! 
개새끼! 
씨부랄! 
에퉤퉤!
훠어이!

 

서로 흐느적거리다 보면 양손을 잡고 빙빙 돈다. 운동성이나 리듬에 탄력이 붙는다. 강강술래 모양이 된다.

 

(노래)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그런대로 한세상으로 살아가리∼.

 

노래하며 돌다 보면 하나에서 셋까지 돌다가 한 명이 끼어들며 그 자리에서 움직임이 멎는다. 누군가 손을 떨쳐내자 옆사람이 퉁겨 나가고 그 옆사람이 퉁겨 나가고, 결국 둘이 남아 손을 잡고 돈다. 빠르게, 느리게, 점점 느리게.

 

(노래) 세상만사 모든 일이 뜻대로야 되겠소만 그런대로 한세상으로 살아가리∼.

 

하나가 퉁겨 나갔는지 혼자 돌다 보니 저도 퉁겨 나간다. 빈 무대인가 싶었는데, 퉁겨 나간 다섯 중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나가 들어와 고개를 들었다가 숙였다 반복하면서 잰걸음으로 가로질러 사라진다. 누군가 그 뒤를 이어 잰걸음으로 가려다 말고 주춤거리다가 나간다. 퉁겨 나간 사람들, 들어왔다가 부리나케 나간다. 나갔다가 들어오고 들어와선 빙빙 돈다. 시종일관 무표정하나 움직임은 리드미컬하다. 일순 움직임을 멎는다. 느리게 걷는다. 애벌레처럼 꾸물거리다가 똥을 굴리는 말똥구리의 움직임이 된다. 입 모아 기적 소리를 내고, 앞사람의 등을 양손으로 짚고 달려간다. 기적에 이어 무적이 운다. 배 모양을 만들기가 쉽지 않다. 애를 쓸수록 잘 되지 않는다. 쩔쩔맨다. 방황한다. 어디로 갈거나. 가긴 간다, 어디론가 가다 보면 걷던 사람은 걷고, 나무늘보 같은 이는 그 걸음걸이로 간다. 웅성거리는 소리. 소리쳐 부르는 소리. 경적. 북소리. 사이렌 소리, 헬리콥터 소리. 정적. 한 발의 총성.

 

하느님 맙소사!

 

그 사람, 뛰어와 무대 뒤편을 향한다. 뻣뻣한 걸음을 멈추고 뒤춤을 진다. 천천히, 점점 빠르게 집게손가락을 까닥거린다.

 

탕! 타타타타타타타….

 

모두 뒷짐을 지고 집게손가락을 까닥거린다.

 

탕! 타타타타타타타… 타당! 탕! 탕!

 

정적, 그리고 침묵.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들쳐업고 지나간다.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안고 간다. 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끌고 간다. 들쳐업고, 안고, 끌고 어디론가 간다. 서서히 흩어져 각기 다른 공간에서 멈춘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회상 혹은 오늘에 대한 걱정, 내일에 대한 불안 들을 즉흥적으로 이야기한다. 아가에게, 청소년에게, 청년에게, 이웃에게, 구의원쯤 되는 정치인에게, 은퇴와 자녀 혼인에 대해, 그러나 죽음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어린 시절만 회억하는 방식이다. 한순간 입을 닫고 모두 제자리에 앉는다. 무슨 말을 하려다 뭔가를 잊은 듯 눈동자를, 손가락을, 고개를, 어떤 이는 발목을 돌리기도 하면서 생각을 해내려 애쓴다.

 

(동시에 무릎을 치며) 아차!

 

모두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는다. 가까이 멀리 중간중간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셀카를 찍는다. 둘이 하나 되어, 셋이 하나가 되어, 몸의 여러 군데를 찍는다. 관객들을 찍는다.

 

침묵.

 

누군가 일어서고 사람들 앉거니 서거니, 누군가는 걷기 시작한다. 둘이, 셋이 걷는다. 저마다 방향을 정하고 걷는다. 웬만하면 오랫동안. (사이. 누군가 중얼거린다.) 어린 시절이었어. 언 손을 호호 불며 그걸 배달했지. 그 집에. 그 집은 녹색 대문에 우편함이 붙어 있었어. 우편함엔 그날따라… 그날이 크리스마스! 동이 틀 무렵이었어. 신발주머니가 우편함에 매달려 있었어. 쪽지가 붙어 있었지. (감정을 실어) '배달 소년아, 주머니 속에 있단다. 그걸 가져가렴. 오늘은 크리스마스란다.’

 

방울이 딸랑거리고, 캐럴송 <징글벨> 반주가 흘러나온다. 모두 뭉크의 그림 <절규> 속 인물의 표정으로 노래한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크리스마스
베리메리 크리스마스 
소우메리 크리스마스 
예스터데이 크리스마스 
투데이 크리스마스 
투모로우 크리스마스 
디스 크리스마스
댓 크리스마스
잇 크리스마스
브레드 크리스마스
유 앤 아이 크리스마스
크리스트 크리스마스
브레드 브레드 크리스마스… (적당히 반복)

 

더러는 무대 통로로 내려와 객석을 거닐며 노래한다. 무대는 객석과 연결된 패션쇼장이 된다. 소년의 소리 "한 번은 만나고 싶었어요”와 소년이 노인이 된 소리 "그걸 잊기 전에, 한 번은 꼭…”이 반복되는 사이, 사람들 흥겹게 무대를 거닌다. 적당한 시점에 관객들이 참가하기도 한다. 사람들, 보이지 않는 손들이 나눠주는 비닐 천이나 일·이인용 은박텐트 같은 것으로 몸을 감싼다. 더러는 발을 동동거리고 더러는 앉아서 떤다. 찬바람이 불고, 날이 어두워진다. 눈이 내린다. 어떤 이는 쪼그리고 어떤 이는 웅크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는 작아지지 않을 정도로 움츠러든다. 여기저기 골고루 눈이 내린다. 언 채 서 있는 사람들, 두들기면 깨질 것 같다. 삐걱거리며 움직이는 이도 있다. 하나의 알처럼, 작은 천막 안에 사람들이 불을 켜 든다. 불빛이 밝게 얼굴을 비춘다. 얼어 있던 사람 중 하나, 쩍쩍 갈라 터지는 천막을 걷고 일어선다. 기지개를 켜고는 주체하지 못해 기우뚱거린다. 흔들흔들하다가 중심을 잡는다. 그리고 천천히, 부드러운 걸음으로 객석을 향한다. 물끄러미 관객들을 보다가, 제 손을 보여주다가, 손을 잡아주다가, 극장 문을 열고 나간다. 객석에 불이 켜지고, 허공에서는 폭설이 내린다.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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