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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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부장 이 개새끼, 납작한 두꺼비같이 생겨가지고, 천박한 원숭이 같은 새끼.”
시은은 수화기 너머 상대방의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욕설을 마구 내뱉는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양화대교에는 이미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자동차의 전조등만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겨울밤의 쓸쓸한 다리 위에서 시은은 홀로 방황하고 있다.
“야, 그만 좀 해라. 내가 김 부장이냐? 너 지금 같은 욕을 몇 번이나 하고 있는 거 아니?”
고향 친구의 한숨 어린 말이 시은의 귓가에 꽂힌다. 본인이 그런 걸 세고 있겠냐고 시은은 툭툭거린다. 속으로는 이러려고 양화대교에 온 게 아닌데, 민선에게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고삐가 풀린 말은 폭주기관차처럼 정해진 노선을 탈주하여 거대한 사고를 일으키기 직전이다.
“아유 시은아, 너 자꾸 전화해서 이렇게 욕하고 신세타령하고, 응? 내가 너 감정 쓰레기통도 아니고…. 정도가 있지, 너 요즘 참 심하다. 도대체 왜 그래? 예전에 상냥하고 명랑했던 조시은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시은은 세상이 바뀌었고, 내 상황도 바뀌었으니 나란 종자도 당연히 바뀌는 거 아니겠냐고 민선의 말을 받아친다. 나 원래 이렇게 염세적인 년이었다는 말은 덤이었다.
“야, 조시은. 요즘 너 말 받아주느라 나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너 전화해서 계속 이런 식으로 굴 거면 우리 당분간은 서로 연락 좀 끊자. 오늘 당한 일은 정말 유감스러운 일은 맞는데, 하아, 아무튼 나도 여러 가지로 힘드니까…, 나중에, 너 마음이 좀 괜찮아지면…, 그때 다시 보자.”
민선은 시은의 대답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고, 시은은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다가 씁쓸함을 느끼며 주저앉는다. 원래는 옛날 추억이나 떠올리며 이 울화를 민선과 풀고 싶었을 뿐이었다. 대학 시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양화대교 인도 위에서 민선과 캔맥주를 곧잘 마셨다. 공부나 취업, 남자친구 문제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하면서 누군가의 흉을 같이 보기도 했고, 서로의 앞길을 격려해주는 으샤으샤의 자리였달까? 한창 그러고 있다 보면 말수가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면 둘이 같이 도도히 흐르는 한강을 감상했다. 저 먼 곳에서 여러 거친 굴곡을 지나 여기까지 흘려 내려온 한강이 우리네 인생 같다고, 우리도 이 순간만 잘 견디어내면 서울의 한복판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한강처럼 나중에 남들 앞에서도 어깨 펴고 다닐 수 있을 거라고 민선은 종종 말했다. 둘 중 하나가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틀어 놓기만 하면 부드러운 멜로디와는 어울리지 않는 괴성으로 고래고래 떼창을 하며 함께 시시덕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마냥 담담하게 평온한 일상으로 복귀하곤 했는데, 그랬던 시절도 벌써 빛바랜 추억이 되어 버렸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오 아프지 말고∼.”
그때의 민선은 옆에 없지만 시은은 혼자서라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훈훈했던 시간을 애써 떠올린다. 연락을 끊자고 민선이 말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시은은 그녀에게 악감정을 가지진 않았다. 오히려 자신 때문에 그동안 스트레스를 받았을 민선을 생각하니 미안할 따름이다. 민선의 말대로 어쩌다 자신이 이렇게 된 건지 알 수 없다며 시은은 머리를 가로젓는다. 한 모금 정도 남은 캔맥주를 다 들이켠 시은은 난간으로 인해 군데군데 가로막힌 한강과 마주한다. 여기서 보는 한강은 아름답지 않아, 시은은 가방 속에 있는 마지막 캔맥주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알딸딸한 취기를 느끼며 시은은 가방을 주섬주섬 챙겨 양화대교의 아치 교량으로 올라가려고 용을 쓴다. 하지만 교랑 중턱에서 자꾸 굴러가는 바닥을 밟고 두어 번 철퍼덕 미끄러지니 어쩔 도리가 없다. 시은은 올라오는 통증에 연신 투덜거리며 결국 초입에 자리 잡는다. 다행히 가방에 든 캔맥주는 넘어지는 와중에도 무사했다. 정직원도 안 돼, 돈도 안 모여, 심지어 지금 아치 위로 올라가는 것도 마음먹은 대로 안 되는 자기 신세가 무척 똥 같았다.
캔맥주를 꺼내려는 시은의 손짓에 가방에 달린 귀여운 반가사유상 미륵보살 인형이 흔들흔들 춤을 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이 기념품이야말로 시은이 가장 아끼는 몇 안 되는 장식품 중 하나이다. 아예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한 번 보고 나니 도저히 사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정도로 깜찍한 미륵보살이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데, 자기도 저처럼 속세의 혼탁함을 조금은 잊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구매했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는 영 효험이 없는 걸로 밝혀졌다. 시은은 문득 미륵보살이든 예수든 천지신명이든 누구든지 간에 이 신세를 벗어나게 해준다면야 무슨 일을 못하겠냐는 생각이 들어 얼마간 그 인형을 붙잡고 하소연을 하다가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그만둔다. 제대로 된 신이란 게 있으면 나 같은 인간들의 삶을 무심히 내버려두겠냐는 회의감에 시은은 디오니소스의 힘이나 빌리는 게 낫겠다 싶어 연거푸 맥주를 들이켠다. 그녀의 눈앞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탁 트인 한강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푸르른 물결이 아닌 누구처럼 흑심만 잔뜩 도사려 있는 것 같은 시꺼먼 물결만 넘실대고 있었다.
“시은 씨,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해요.”
오늘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시은의 업무 평가를 맡고 있는 김 부장이 불렀다. 이번마저도 정직원 전환에 실패하면 엄마한테 처지를 고백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품고 시은이 이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와 일한 지 벌써 3개월이 되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입지를 다져온 나름 관록 있는 회사라는 점도 구직 생활을 하면서 차츰 눈을 낮춰 온 시은에게 나쁘지 않았지만, 특히 어떻게든 이 회사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서울에 계속 남을 수 있다는 점이 사실 가장 큰 매력이었다.
-시은아, 너는 대체 서울에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니? 여기도 살 만해. 나쁘지 않아. 일자리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병이야, 서울 집착병.
민선은 서울 얘기만 나오면 시은에게 핀잔을 줬다. 민선의 말도 일리가 있었지만 시은은 서울을 좀처럼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처음으로 상경하게 된 시은에게 이 도시는 무척 황홀한 곳이었다. 낮에는 각자의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내게 하는 활기가 넘치고, 밤에는 건물과 가로등의 빛이 영롱하게 어우러지는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힘겨운 현실로 인해 때로는 이 도시가 그녀를 밀어내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만 시은의 소망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반드시 이곳의 주류로 편입되어 자연스럽게 도시 생활을 즐기는 현지인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 그것은 거친 풍파에 간절함이 퇴색되었을 수는 있어도 아직까지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시은은 김 부장을 따라 회의실에 다소곳이 들어갔다. 김 부장은 주위를 둘러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시은 씨, 어제 정직원 전환 대상자에 대해 부장급 회의를 했었는데 내가 힘 좀 썼어.”
시은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러 인턴 중 시은 씨를 내가 추천했고, 다른 몇몇 부장들도 동의하더라고. 나중에 서면으로 평가 점수를 집계해야 최종적으로 확정되겠지만, 지금으로썬 상당히 유력하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탄성이 나오려는 걸 시은은 간신히 손으로 틀어막았다.
“쉿,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 어디 가서 얘기하지 말고. 나는 시은 씨가 우리 회사에서 일했으면 하는 마음에 미리 언질을 주는 거니까, 그런 줄 알고 최종 평가가 마무리될 때까지 각별히 신경 써요.”
시은은 김 부장에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사무쳐 왔다. 연신 김 부장한테 머리를 조아렸다. 감사하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어머니의 굽은 척추보다 더 허리를 굽혀 김 부장한테 인사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컴퓨터 화면에는 그 짧은 사이에 건너편 자리에서 근무하는 인턴 동기 영미한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언니, 괜찮아요? 김 부장한테 무슨 일 당한 거 아니죠?’
정말 걱정을 해준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시은은 별 일 없었노라고, 그저 회의실에서 오늘 미팅 준비 사항을 들었을 뿐이라고 답했다.
‘참 이상한 사람이네. 일 얘기면 그냥 사무실에서 하면 되지, 굳이 회의실까지 가서 할 필요가 있나. 암튼 그 사람 조심해요. 조금이라도 틈 보이면 위험할 수 있어요.’
이어지는 영미의 메시지에 고맙다고 답변한 후 시은은 김 부장이 볼세라 얼른 메신저를 치워버렸다.
정직원이라니…. 시은은 주변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괜스레 이 사무실에 더 애정이 갔다. 지급받은 이 컴퓨터와 책상, 조화롭게 구조화된 파티션과 품격 있어 보이는 복사기, 심지어 탕비실의 노란 믹스 커피와 아이스 메이커까지 그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점심으로는 구내식당에서 살점도 별로 붙어 있지 않은 갈비탕이 나왔지만 그것도 괜찮았다. 그저 모든 게 황홀할 따름이었다.
“시은 씨, 이따 쓸 회의 자료 13부만 준비 부탁해요. 그리고 시작 10분 전에 회의실 세팅해 놓는 거 잊지 말고.”
김 부장의 지시를 받고 시은은 출력되는 자료를 챙기려고 복사기 앞에 서 있었다. 자이언티의 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리던 시은의 뒤로 김 부장이 따라붙었다.
“준비할 게 좀 많죠?”
“아 부장님, 양이 좀 많긴 하네요. 금방 해서 준비해 놓겠습니다.”
시은은 배시시 웃으며 다시 복사기 상황판의 예상 종료 시간을 확인한 뒤, 남은 자료들이 제대로 나오고 있는지 점검하려고 허리를 숙인 찰나 엉덩이 쪽의 팬티 라인을 무언가가 훑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화들짝 뒤돌아보니 김 부장은 한 걸음 물러나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요?”
아까의 감촉이 사람의 손인지 발인지 아니면 물체인지 왜 구분을 못하겠는가. 시은은 의혹 어린 눈매로 김 부장을 쳐다봤지만 그는 슬며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인턴, 정직원, 빌어먹을 희롱, 썩은 미소, 개새끼. 당혹스런 심정 속에서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던 시은은 결국 그에게 아무 대거리도 할 수 없었다. 말없이 복사기만 다시 노려보는 시은에게 김 부장은 수고 좀 해달라고 말을 던진 후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직원이 코앞인데 엉덩이가 대수냐 혼자 합리화해 봤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언가가 시은의 표정을 일그러뜨렸고, 티 내지 않으려고 억지웃음을 지으며 일하던 시은은 화장실에 가서야 우스꽝스러운 자신의 표정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제야 시은은 회의 자료를 세팅하는 것만 부랴부랴 마치고 일언반구도 없이 바로 회사를 뛰쳐나와 버렸다.
-언니, 이건 우리 사수한테 들은 건데요, 김 부장을 조심하라네요.
서울 시내를 정처 없이 걷던 중 영미가 해줬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이 회사에서 인턴생활 초반에 그나마 말문을 좀 튼 영미가 뜬금없이 김 부장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무얼, 하고 물으니 기다렸다는 듯 속사포처럼 쏟아놓기 시작하는데, 늘 음흉한 눈빛으로 여직원의 몸을 슬쩍 본다든지, 간혹 실수인 척 몸을 만진다든지 하는 전부 음흉한 얘기뿐이었다. 그 당시엔 늘 예의있게 자신을 대해주던 김 부장의 태도 때문에 시은은 오히려 그런 얘기가 도는 게 의아했고, 인물이 못나서 뭘 해도 여직원들이 싫어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언니, 그게 굉장히 교묘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여러 사람 앞에서 명확하게 책잡힐 짓은 하지 않는데요. 심증은 가는데 현장에서 물증은 없는, 그런 애매한 방식? 암튼 조심하세요. 특히 인턴한테는 더 잘 그런다 하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시은은 설마 싶었다. 옛날처럼 쉬쉬하는 시대도 아닌데 그런 파렴치한 일이 회사에서 버젓이 일어나겠냐고 속으로 반문하면서 한편으로는 영미가 나를 견제하려고 이런 얘기를 하나 싶기도 했다. 인턴 평가에 관여하는 김 부장에 대한 선입견을 나한테 심어주면 내가 김 부장과 은근히 거리를 두게 될 테고 그럼 김 부장은 당연히 내 냉담한 태도를 느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내가 김 부장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리 만무하다, 이런 추론으로 이어지니 영미의 말을 순수한 선의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그 설마가 오늘 시은을 잡아버렸다.
덕분에 시은은 해묵은 감정을 오랜만에 떠올리게 되었다. 초등학교 남자친구들의 철없는 장난으로 치마가 벗겨져 버렸을 때도, 고등학교 체육시간마다 또래 남자친구들의 시선이 덜렁거리는 가슴에 머무는 것을 느끼면서 달리기를 할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지만 오늘의 모멸감은 아마 인생에 한 획을 그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얼어붙은 취업시장 속에서 인턴생활을 여기저기 전전하느라 자존감도 너덜너덜해졌는데 잊고 있던 모멸감까지 되살아나니 시은으로서는 결국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양화대교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나도 남들처럼 매일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 사갖고 출근하고 싶다고….”
시은은 원망 어린 말과 함께 맥주를 또 한 모금 들이켠다. 캔을 흔들어보니 안에 든 내용물도 절반밖에 남지 않았다.
“맨날 가계부 쓰고, 나갈 돈 계산하고, 진짜 구질구질하다, 인생….”
자조 섞인 욕설과 함께 한숨을 내쉰다.
“미친 년…. 그딴 술자리는 왜 나가가지고….”
어떻게든 정직원이 되고자 했던 시은에게 인턴들의 친목 모임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걸 불편한 경쟁자들과 함께 마시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 회사 직원들과의 모임(특히 부장급 이상)이면 몰라, 고달픈 인생끼리 모여 술을 마셔 봤자 건설적인 이야기가 오고갈 리가 있겠냐는 게 시은의 지론이었다. 그런 시은이 약 삼 년 전쯤 인턴으로 근무한 회사에서는 정직원 전환 발표 전날까지 최고 실적을 유지하면서 임원들에게 업무적으로 고평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회사가 유명한 대기업이나 관록 있는 중견기업은 아니었지만 스타트업치고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어서 나름 비전이 있는 곳이라고 여겼다.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정직원 전환은 따놓은 당상인지라 승리자의 여유였을까 아니면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암튼 무슨 변덕인지 같이 인턴으로 고생했던 사람들과 인사치레는 해야겠다는 지금 와서 보면 무척 해괴한 생각이 들어 시은은 처음이자 마지막 술자리에 참석했고, 그 바람에 인생에 망조가 들었다고 자기의 현생을 진단했다. 애당초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면 그 사정도 몰랐을 것이고, 입 꾹 다물고 하루만 보냈으면 인턴에서 정직원으로 전환되었을 터이니, 결국 환장할 오지랖이 인생을 망친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다.
다리 위에 몰아치는 바람이 쓰린 과거를 회상하는 시은을 더욱 움츠리게 한다. 보풀이 일어난 코트의 옷깃을 여민다. 문득 이 코트를 처음 선물 받았던 때가 떠오른다. 인턴으로 첫 회사에 나가게 되었을 때, 엄마가 격려 차 사주신 옷이었다. 인턴의 계절이 무수히 순환되는 동안 왜소한 이 코트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냉랭한 세상 속에서 시은을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이것을 입을 때마다 시은은 반드시 험난한 인턴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떳떳하게 이 외투를 벗겠다고 다짐했건만, 아직까지도 그녀는 이 코트를 입고 있다.
“엄마, 뭐 해?”
“엄마, 허리는 괜찮아? 병원 가서 치료 좀 받으라니까. 청소일도 좀 쉬엄쉬엄하고. 병원비 보낼게, 제발 치료 좀 받아, 엄마.”
“나 그 정도 돈은 있어, 엄마. 알뜰살뜰 모았다고. 누구 딸인데, 히.”
“응, 나는 건강해. 아무 문제 없어. 그리고 여기서 잘 될 것 같아. 잘 안 되면 뭐, 정리하고 엄마 있는 데로 내려가야지. 히히.”
“아냐 아냐, 정말 괜찮아. 약간 빠듯하긴 하지만 생활하는데 부족함은 없어. 경제적인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엄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엄마, 건강 잘 챙겨. 그리고…, 고마워.”
“아니, 평소에 고맙다고 얘기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아니아니 정말 아무 문제 없어. 진짜 괜찮다니까.”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엄마 혼자 고생 많이 했잖아. 나 뒷바라지하느라 지금도 고생인데…. 그냥 갑자기 얘기하고 싶어서. 응응.”
“응, 나도 사랑해. 나중에 또 전화할게.”
통화는 끝났지만 엄마의 따스한 목소리가 시은의 귓가에 여전히 맴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엄마의 걱정거리로 살고 있는 자신이 짐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그렇게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 배가 불러가지고, 이 미친 년….”
시은은 깊게 한숨을 쉬고 맥주를 한 입 들이켠다. 차가운 맥주가 식도를 넘어 뱃속으로 달려가면서 시은의 정신을 더 얼근하게 만든다.
문제의 그 술자리에서도 비슷했다. 살짝 올라오는 취기를 느끼며 언제 일어날지 눈치만 보고 있던 시은에게 옆에 있던 인턴 동기 새봄이 잔뜩 혀를 꼬부랑거리며 말을 붙였다.
“언니, 언니는 좋겠어요. 내일이면 발표가 날 텐데, 아쉽게도 난 간발의 차이네요. 이번만큼은 될 줄 알았는데, 에휴.”
시은은 떫은 표정으로 새봄을 바라보았다. 새봄은 그런 시은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푸 술잔을 채우고 비우는 데에만 진력했다. 그 자리의 대다수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것과 달리 새봄의 주변만 삭막한 무풍지대였고, 시은은 새봄의 옆에 앉은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실적 1등과 2등의 주량 대결이니, 서로 경쟁심을 풀고 화해하는 자리이니 하는 다른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간간이 시은의 귀에 들렸다. 당신들의 추측은 모두 틀렸으며, 그저 새봄과 안면이 조금 더 있었기에 앉은 것에 불과하다고 일일이 해명하는 모양새도 이상했기에 시은은 묵묵히 술만 홀짝였다.
옆에 있던 새봄은 술기운이 많이 올랐는지 구슬프게 울다가 다시 술을 마시고, 혼자 중얼거리다 또 울고, 그렇게 눈물로 술을 먹는 일을 반복했고 기어이 인사불성이 되어 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더 가관인 건 따로 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난감함을 느끼며 슬쩍 일어나려는 시은에게 다른 사람들이 새봄을 잘 부탁한다며 자기들끼리 2차를 가버린 것이다. 옆자리에 앉은 죄로 이게 무슨 생고생인지 모르겠다며 시은은 툴툴거렸지만 장내에 새봄을 챙길 사람은 자기밖에 남지 않았기에 시은은 어쩔 수 없이 새봄의 품을 뒤져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바로 엄마로 추정되는 번호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아 시은은 새봄 엄마와의 대화 창을 열었다. 그리고 시은은 서글퍼졌다. 그곳에는 새봄과 새봄 엄마의 처연한 말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새봄의 아빠가 새로운 약을 써보기엔 감당할 형편이 안 되고 아빠도 치료받는 동안 너무 고통스러워하시니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는 엄마의 말에 새봄은 이번에 정직원 전환이 안 되어 대출이 많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돈을 마련해 보자고 아빠를 포기하지 말자며 엄마에게 간곡히 호소하고 있었다. 시은은 순간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났다. 시은의 아빠 역시 돈이 없어 제때 치료받지 못했고, 하릴없이 땅에 묻혔다. 새봄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새봄은 여전히 누워 있는 채로 아빠 아빠 이 두 단어만 연신 되뇌고 있었고, 시은은 착잡하고 안쓰러운 시선으로 새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외투로 잔뜩 옹송그린 그녀를 덮어 주었다.
그날 간신히 새봄을 콜택시에 태워 집으로 보내고, 비좁은 원룸에 돌아온 시은은 양머리를 말아올린 채 자신이 활동하는 취업 카페에 접속했다.
<제목 : 안녕하세요, 드디어 내일이면 인턴생활 탈출!> 작성자 : 슈퍼인턴
안녕하세요, 회원님들, 드디어 내일이면 3년 동안의 길고 긴 인턴생활을 마치고 정직원이 됩니다.
우리 회원님들에게도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모두 포기하지 말고 힘내세요!
┖취뽀빠이 : 오, 슈퍼인턴님, 축하축하!
┖ 슈퍼인턴 : 감사해요.
┖ 인턴죽순이 : 슈퍼인터님, 축하해요, 그동안 카페에서 도움 많이 받았는데 이제는 뵙기 어렵겠네요. 새로운 곳에서도 잘 해내길 바래요.
┖ 슈퍼인턴 : 고맙습니다.
┖ 이제곧취업 : 역시 슈퍼인턴님, 드디어 해내셨군요. 실례지만 어디인지 알려주실 수 있나요?
┖ 슈퍼인턴 : 감사합니다. 서울에 있는 A로 갑니다.
┖ 나를더사랑하자 : 아, 거기요? 잘 됐네요. 규모는 작아도 스타트업 중에서는 나름 유망하다 하던데. 축하합니다!
┖ 슈퍼인턴 : 그런 점이 괜찮더라고요. 축하 고마워요.
┖ 인턴파쇄기 : 대기업이나 공기업도 아니고, 카페에서 슈퍼인턴님 슈퍼인턴님 빨더니 겨우 거기야?
┖ 인턴죽순이 : 아니,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그래도 카페에 슈퍼인턴님이 여기저기 경험담 올려주셔서 도움 받은 사람들 많은데 당신은 뭐라고 그렇게 함부로 얘기하나요?
┖ 인턴파쇄기 : 그래봤자 인턴인데, 너무 올려치기하는 거 아님? 그리고 딱 봐도 결국 대기업 취업 못해 적당한 규모로 타협한 거잖아. 자꾸 뽕 넣어주면 버릇 나빠짐.
┖ 이제 곧 취업 : 다들 대기업만 원하는 거 아닙니다. 그만하세요.
┖ 인턴파쇄기 : 구라 노노. 대기업 갈래, 중소기업 갈래? 솔직히 대답하면 대답하는 대로 이루어짐.
┖ 대기업조아요 : 당근 대기업.
실시간으로 달리는 댓글을 보면서 열이 뻗치는 건 단지 술기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은은 두 손으로 붉어진 얼굴을 감쌌다. 재차 들여다본 노트북 화면에는 댓글들이 어지럽게 생성되고 있었고, 무례한 실랑이를 마냥 앉아서 보고 있기 힘들었던 그녀는 씩씩거리며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근처 공원을 배회하며 잠시 머리를 식힌 시은은 다시 책상 앞에 앉아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깠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황금색 물결의 상쾌함을 느끼며 오늘 일어났던 일들을 떠올렸다. 하필이면 그런 걸 봐가지고…. 시은은 먹먹한 마음을 추스르기가 어려웠다. 자신의 아빠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새봄의 아빠는 아직 기회가 있지 않나. 회사에선 다른 요소 없이 최우수 실적을 달성한 사람을 정직원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그녀가 포기한다면 다음 순위인 새봄에게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복잡한 마음에 별로 넓지도 않은 방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도중 옷걸이에 걸려있는 가방의 반가사유상 인형이 시은의 눈에 들어왔다.
‘보살님, 이게 맞아요? 이걸 포기하는 게 진짜 맞아요? 착한 일 하면 그게 나중에 돌아온다고 했잖아요. 정말이에요? 네?’
새봄의 아빠를 위해 포기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가도, 내 코가 석 자인 신세를 생각하면 마냥 인류애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시대는 또한 아니었다. 그러다 눈앞에 있는 노트북 화면을 보니, 시은이 올린 글에는 댓글만 50개가 넘게 달려 있었는데 대부분 인턴파쇄기의 조롱과 냉소였다.
‘진짜 닉값 한다. 그래 이 새끼야, 내가 대기업에 취업을 못해서 타협하는 거라고? 넌 현실에서 뭐 하는 놈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깔아뭉개니? 내가 똑같이 너 파쇄해 준다. 두고 보자, 썩을 놈.’
올라오는 술김을 타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욕설을 잔뜩 날려준 뒤, 시은은 취업 카페의 공채 정보란을 뒤적거렸다. 때마침 늘 선망하던 대기업 공채가 얼마 남지 않았다. 최우수 인턴이라는 위업으로 말미암아 시은은 이번 S기업 공채에도 충분히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시은의 포기는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사람 하나 살리는 고귀한 선택이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갖고 있던 부채의식을 조금은 덜어내는 일이었고, 심지어 카페에 똥글을 싸지른 쓰레기 같은 인간을 비웃어 줄 수 있는 단초가 될 수 있을 터이니, 이번 한 번만 싱긋이 웃고 있는 미륵보살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때는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잘못된 선택을 한 거야. 아오, 이 미친 년.”
홀로 <양화대교>를 부르던 시은은 자신은 왜 행복할 수 없는지 누군가에게 따져 묻고 싶다. 한층 더 깊게 파고드는 추위에 시은은 절반 가량 남은 맥주를 꿀꺽꿀꺽 마셔 버린다. 올라오는 술기운에 따뜻함을 느끼며 냉담한 도시 속에서 어떻게든 온기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시은은 몸을 더욱 작게 웅크린다. 복잡한 머릿속이 점차 흐릿해지는 기분이었다.
“언니, 여기서 뭐해요?”
“응?”
시은은 자신을 부르는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앞에 영미가 서 있었다. 왜 얘가 여기서 나와, 시은은 당황해서 할 말을 잃었다.
“아이고 언니, 언니가 아까 나한테 양화대교 와 있다고 문자 보냈잖아요. 그래서 한 번 와 봤지. 걱정도 되고.”
스마트폰을 열어보니 영미가 어디냐고 물은 질문에 간단하게 양화대교라고 대답한 대화가 눈에 띄었다.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문자를 보낸 것조차 몰랐다고? 시은은 자신의 상태에 기가 막혔다. 어이없어하며 어쩐 일이냐고 영미에게 물어보니 준비한 이야기가 한 보따리였다.
“언니, 아까 아무 말도 없이 회사에서 나갔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성실하고 철저한 시은 씨가 이유 없이 그럴 리 없다고, 이건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라고 수군댔는데, 글쎄, 오혜미 사원 알죠? 그 사람도 당한 게 있어 김 부장을 잔뜩 벼르고 있던 중에 오늘 아침 그 인간이 언니를 따로 부르는 걸 보고 심상치 않은 걸 느꼈대나? 그래서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김 부장이 교묘한 위치에서 언니 엉덩이에 손대는 걸 봤다는 거야. 옳다구나 싶어 바로 김 부장 윗선에 자기 당한 일이랑 같이 신고했고, 처음에는 김 부장이 발뺌했지만 다른 여직원들이 가세해서 각자 당했던 이야기를 덧붙이니 일이 많이 커졌죠. 이거 보통이 아니구나 윗선에서도 그렇게 판단했나 봐요. 지금 분위기는 김 부장 거의 퇴사각? 언니도 내일 와서 증언해요. 김 부장 확실히 보내버리게.”
시은은 영미의 말에 격동했다. 일이 이렇게도 풀리는구나, 하늘이 나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시은은 영미의 손을 붙잡았다.
“아휴, 언니 왜 울어. 언니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울지 마, 울지 마∼. 괜찮아.”
다독이는 영미의 손길에 시은은 눈물을 쏟으며 통곡하고 말았다.
“언니, 언니 평판이 회사에서 상당히 좋더라. 오늘 일 터지니까 다른 부장들이 조시은 인턴 그만두면 안 된다고, 일 잘 하는 사람 요즘 구하기 힘드니까 잘 달래서 계속 근무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알음알음 그러더라. 그러니까 힘내고 내일 씩씩하게 출근하자. 언니야, 알았지?”
가만히 안아주는 영미의 온기를 느끼며 시은은 고개만 계속 끄덕거렸다. 영미의 부축을 받아 콜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간 시은은 씻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침대에서 바로 뻗어버렸고,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조금은 늦게 일어났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출근했다. 김 부장의 자리는 비어 있었고, 시은은 오혜미 사원과 이야기를 나눈 뒤, 어제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서면과 함께 감사팀에 보고했다. 감사팀의 감사 결과, 결국 김 부장은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 건으로 권고사직을 당했으며 회사에서는 직원들의 정신적 피해 및 경영 손실에 따른 구상권을 김 부장에게 청구하면서 사필귀정이 무엇인지 회사의 모든 직원에게 보여 주었다. 시은은 회사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대신 인턴 기간 동안의 쌓은 실적을 명분삼아 정직원 전환으로 자신의 피해를 보상받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조시은 대리, 요즘 영 실적이 좋지 않아. 거래처 관리에 좀 더 신경 씁시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기 위해 좀 뛰어다니고. 이래 가지고 월급 받아 가면 창피하지도 않나?”
시은은 요즘 죽을 맛이었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으로 다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실적을 낸다는 건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간다는 얘기지 않나 싶은데, 얼마 전 이런 논조로 정 부장에게 이야기했더니 대판 깨지기만 했다. 일은 일대로 많고, 거래처도 힘들기는 매한가지라 성과는 지지부진한 상황. 그토록 바라던 정직원이 되었지만 시은의 인생은 여전히 고달팠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자리에 앉아 생각을 해볼라치면 정 부장은 그새를 못 참고 윽박질렀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지 말고 거래처 상황이라도 살피고 와!”
어지간한 데는 다 둘러봤는데 도대체 어디를 또 가란 말이야, 쫑알거리며 시은은 외근용 차에 올라탔다. 최근 계약을 따내기 위해 공들이고 있는 업체로 능숙하게 차를 몰고 가던 도중 시은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네, 조시은입니다. 네에, 제가 딸인데요. 무슨 일이시죠? 네네, 네에? 사고요? 거기가 어디라고요? 문자로 보내주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시은은 전화를 마친 후 다시 회사로 차를 돌렸다. 엄마의 사고 소식과 함께 바로 퇴근하겠다고 하면 정 부장이 어떻게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엄마 옆에 가 있어야 한다는 마음에 시은의 손놀림이 바빠졌고 운전석 밑으로는 발이 현란하게 움직였다. 띠링, 문자가 왔다. 스마트폰의 화면을 한 손으로 급하게 조작하느라 1.5톤 트럭이 정면으로 덮쳐 오는 것을 시은은 마지막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엄마!”
지나가던 트럭의 굉음에 시은은 흠칫 일어난다. 널브러진 맥주캔들, 거칠어진 바람 때문에 가방에서 덜렁거리는 반가사유상 인형, 스며드는 한기와 시꺼먼 한강. 시은은 얼떨떨하게 있다가 가방에 있는 스마트폰을 허겁지겁 찾아 대화 목록을 열어본다. 거기에는 민선과 엄마와의 통화 내역이 전부였고 영미와의 대화는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문득 대학에서 배웠던 설화가 떠오른다.
“빌어먹을 조신의 꿈….”
허무한 심정에 시은은 손으로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린다. 속세의 무상함을 느꼈으니 그럼 머리 깎고 절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중얼거리던 시은은 이내 피식댄다.
‘무슨 짓을 하든 이 세상을 등지면 된다는 말이지, 절로 가든, 골로 가든….’
시은은 반가사유상 인형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본다. 천연덕스럽게 미소 짓는 미륵보살 뒤로 스산한 한강이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살아봤자 뭐 하냐….’
최선을 다해 노력해 왔지만 최악의 선택으로 모든 것을 그르쳐버렸다. 시은은 더 이상 자신의 판단력을 신뢰할 수 없었다. 선택을 또 잘못하여 남아있는 삶을 얼마나 더 망가뜨릴지 알 수 없기에, 이만하면 되었다 싶었다. 엄마의 척추가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게 될 때까지 도움을 받아서야 되겠냐는 생각마저 그녀를 수렁으로 끌고 갔다.
‘뛰어내릴까. 새로운 인턴 자리를 찾아다니는 것보다는 그게 더 쉽지 않을까.’
시은은 정직원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오기는 할까 의심스러웠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파릇파릇하던 시기는 다 지났고 경력자로 진입하는 나이에 들어선 신입을 누가 받아주겠는가. 취업 준비 카페에서 받은 수모를 되돌려주겠다는 거창한 다짐 또한 희미해져서, 이젠 기대할 것이 없는 인생만 남아 버렸다. 불투명한 미래, 기약 없는 취업, 이 사회에서 아무 의미 없는 나라는 존재. 나 때문에 고통 받는, 불쌍한 우리 엄마.
“끼야아아악!”
시은이 뛰어내린 한강의 서늘한 물결은 그녀를 강하게 옥죄었고, 그 압력에 그녀는 무심결에 비명을 내질렀다. 이윽고 벌떡 일어나 눈을 떠보니, 원룸의 침대 위였다.
그 고통은 실재가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시계는 새봄과의 일이 있었던 술자리 다음 날 새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안도감에 휩싸였다.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을 도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술자리에 갔다가 알게 된 새봄의 가정사가 시은의 무의식 속에 잠재된 감정을 건드린 것 같았다.
황망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은은 출근 준비를 서둘렀다. 꿈에서와 같은 오지랖이나 자만심에 취하지 않겠다며 결심하고 회사에 들어갔다. 이윽고 인턴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이변 없이 유일한 정직원 전환자로 시은의 이름이 발표되었다. 그녀는 해냈다는 성취감에 미소를 함빡 지었다. 구석에서 착잡한 표정으로 박수치는 새봄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지만 시은은 못 본 척 외면했다.
일 년 후 시은이 동료 여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A회사 인근의 카페에서 담소를 나눌 때였다. 시은은 흘러나오는 음악을 속으로 흥얼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 척했다. 화제는 직장상사 엄근진 씨부터 구미호 구소희 씨, 이어서 최근 양화대교에서 있었던 투신자살 사건까지 옮겨갔다.
“그 뉴스 봤어요. 좀 젊은 여자였던 것 같은데 말이죠. 근데 왜요?”
시은은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귀를 기울였다.
“뛰어내린 자리에 유서가 발견되었는데, 처지를 비관한 내용이 잔뜩 적혀 있었대요. 근데 진짜 나도 깜짝 놀란 게 뭔 줄 알아요?”
“감질나게 하니까 궁금하잖아요. 뭔데요, 빨리 얘기해 봐요.”
“내가 경찰서 쪽에 아는 지인이 있는데, 그 여자, 한 일 년 전인가? 우리 회사에서 인턴 했던 새봄 씨라 하더라고요.”
“허, 진짜요? 진짜? 말도 안 돼. 왜?”
“나도 모르죠. 참 밝고 싹싹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그런 선택을 한건지. 에휴, 불쌍해라.”
시은은 명치를 맞은 것만 같았다. 꿈에서는 그녀가 죽었지만 현실에서는 새봄이 죽은 것이다. 새봄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는 그날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그 후 일 년 동안 새봄이 또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종내 자포자기하게 되었을지 알지는 못했지만, 시은은 자기 때문에 새봄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잠시 혼란스러워하다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했어야 했나? 나부터 먼저 살아야지. 그건 어쩔 수 없었던 일이야. 그래, 어쩔 수 없던 거야. 내 잘못이 아니야.’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녀는 커피를 한 모금 했다. 아까까지 감미롭던 커피가 지금은 무척 쓰게만 느껴졌다. 여직원들의 대화는 이내 새로 나온 명품 브랜드의 가방으로 옮겨갔다. 새봄의 죽음은 그 대화 속에서 십 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의 소재로 무의미하게 소비되었을 뿐이었다. 그들의 대화에 진절머리를 느끼며 시은은 자신의 가방을 바라봤다. 몇 년 동안 바꾸지 못한 가방에는 변함없이 반가사유상 인형이 달려 있었다. 시은은 조용히 그것을 응시하다 결연하게 잡아 뜯어 화장실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행복하자 우리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오 아프지 말고∼.’
시은이 손을 씻고 나와 보니 때마침 카페에는 자이언티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카페 안의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은은 빙글빙글 웃고 있는 그들에게 이전처럼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채 시은은 우두커니 서 있다가 같이 온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카페에서 나왔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시은은 양화대교를 향해 걸었다. 오늘은 무단 조퇴, 그럼에도 이후 일을 미리 염려하지 않으리라, 가는 도중 국화와 안개꽃이 어우러진 어여쁜 꽃다발을 사들고 시은은 걷고 또 걸었다. 따스한 눈물 한 방울이 차가운 대지 위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