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5월 67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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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거름에 밖으로 나갔다. 강둑에 늘어선 목련이 유백색 피부를 드러냈다. 둑길은 희미하게 밝아 목련빛이었다. 잎보다 꽃이 먼저 피어나는 목련. 시를 좋아하던 그미도 꽃망울 속에서 어렴풋이 나타났다. 달빛 흐뭇한 밤이면 아파트 벽에 그린 목련도 미소를 머금었다. 강둑을 걷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봄바람은 아직도 찼다. 바람은 아가씨의 품속을 파고들었다. 조붓한 어깨를 스쳐 앙가슴으로 흐르는 봄기운을 따라. 장난꾸러기 춘풍에 움츠리는 쌍글한 얼굴은 마음을 쿵쿵거리게 했다.
가녀린 목련은 꽃샘추위에 기어이 멍이 들고 말았다. 연한 꽃잎은 가장자리부터 상한 사과빛이 되었다. 아픔을 속으로 삼키다 지친 각혈 같았다. 떠나버린 첫사랑의 빛깔일까. 활짝 피지도 못하고 그만 지고 만 목련꽃. ‘병풍에 그린 닭이 홰를 치고 울더라도’ 손을 꼭 잡았어야 했는데…. 그날 이후 긴 그리움은 시작되었다.
떠나버린 첫사랑은 목련꽃 속에서 하양새로 너울거렸다. 피어나는 꽃망울은 새초롬한 소녀였다. ‘기회는 날으는 새와 같다.’ 그 한마디 남기고 날아가 버린 소녀. 순결하고 싱싱하던 목련 한 송이는 마음속의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깊어갔다.
언젠가 동아리 모임이 끝나고 둘이는 대학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교정에는 목련이 곱게 피어 있었다. 도데의 「별」을 얘기하며 걷다가 꽃그늘에서 눈이 마주쳤다. 소녀의 볼은 솜털이 보송보송 고왔고, 두 눈은 숱 많은 눈썹 밑에서 별처럼 반짝였다. 마음이 붉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꽃망울이 곱다’며 눈길을 바꾸었다. 순간 소녀는 내 마음의 꽃으로 와락 안겨왔다.
목련은 겨우내 검은색으로 까맣게 죽어 살았다. 언제나 숨을 쉬려나, 기척 없는 얼굴을 들여다보고 또 보고…. 경칩이 지나고 또 며칠이 더 지났다. 담장 밑에서 가지마다 꽃망울이 부풀기 시작했다. 봄바람이 찾아와 ‘봄이야, 봄’ 하고 속삭였나 보다.
화심은 매서운 된바람을 이겨내느라 섬모(纖毛)에 싸여 지냈다. 섬모는 비로드보다 부드럽지만 속은 돌보다 단단했다. 매운 속마음을 본다. 꽃망울이 커지면서 껍질을 깨야 했다. 허물을 왕관처럼 쓰고, 망울은 살이 째지는 아픔을 겪었다. 탈각의 의식을 마치고 피어나는 목련은 이제 돌아와 신부가 되리라 마음을 내었을까.
봄은 서서히 무르익었다. 우윳빛 가슴을 내보이며 나타나는 아가씨. 목선 고운 세일러복 그미가 유백색 드레스를 걸치고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3월의 신부가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