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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손편지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때 학업에 부담이 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성적이 부진해도 크면서 나아지겠지,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다른 학부모의 마음과 같았다.막내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쓴 손편지를 가지고 왔다. 집사람과 내가 깜짝 놀랐다. 우리는 학교 가까이도 가지 않았으므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선생님의 또박또박 예쁘게 쓴

  • 석판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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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햇살 한 줄기

냉장고 서랍을 여니 오래된 당근에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미안했다. 싹튼 부분을 잘라 수반에 담은 뒤 햇살 좋은 창가에 뒀다. 친구 지희가 생각났다.10여 년 전 지희는 뇌경색 발병으로 한국에 와서 수술을 잘 받고는 몇 개월 치료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병원 진료 차 다시 한국에 나왔을 때, 친구들과 만나 밤새 얘기꽃을 피웠다. 그렇게 우린 세월을 거슬러

  • 박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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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상견례

토요일 아침 일찍 상견례를 위해 서울로 출발했다. 아들이 결혼하게 되어 가장 중요한 관문을 통과하는 절차였다. 대전에서 지내고 있는 딸은 금요일 저녁 집에 왔다. 남편은 토요일 일을 접었고 가족 모두 합심했다. 남편은 주말에 서울 도로가 막힐 것이라고 염려하면서 대중교통으로 가야 하나, 승용차로 가야 하나 망설였다. 대중교통이 불편하다는 두 여자의 말에 시

  • 김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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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생강

어릴 적 나의 외갓집은 나주군 왕곡면이었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벌건 황토 땅을 안고 사는 동네이다.방학 때 외갓집에 가려면 골목길이 어찌나 질퍽거리던지 신발은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 흙 묻은 신발을 들고 꽁꽁 언 맨발로 집에 가면 외할머니께선 언 발을 아랫목 이불 속에 꼭꼭 눌러 녹여 주셨다.그런데 생강은 황토 땅이 제격이란

  • 김옥례(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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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화해를 청하는 방법

어머니를 찾으러 왔습니다. 낯선 청년의 느닷없는 물음이었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 입고 선 남자는 네 살 때 헤어진 어머니를 찾는 중이라 했다. 청년의 눈빛은 진지했고 간절함이 깃들어 있었다. 소란했던 공간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어떤 말을 해야만 하나 망설이는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청년은 자신이 결혼한 지가 일주일 정도 되었으며, 네 살 되던 해

  • 김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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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어머니의 약손

요즘은 토마토를 채소로 분류하지만 나 어릴 적 토마토는 당당히 과일에 속해 있었다. 특이 참외 수박과 함께 여름을 대표하는 과일로 이름을 날렸다.어릴 적 시골집에는 마당 외에 열 평 남짓 되는 텃밭이 있었고, 이 텃밭은 우리 집 보물창고였고 어머니의 전용 마트였다. 여름이면 상추·쑥갓이 자랐고 오이와 감자에 보라색 가지와 청·홍 고추에 청양고추까지. 작은

  • 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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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태평한 쥐

문간에 쥐 한 마리가 있다. 햇살을 받으며 배를 깔고 누운 모습이 더없이 평안하다. 고양이도 새도 인기척에 놀라지 않게 된 세태가 이윽고 쥐에게도 이르렀나 보다. 객(客)이부 산스레 드나드는 문 앞에 대자로 누운 쥐라니. 안방이 따로 없다. 한낮의 쥐가 태평해 보이고 오후는 더디 간다. 쥐를 비켜 지나 대웅전으로 들어선다. 초를 밝히고 향을 피운다

  •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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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망양정

처마를 훑은 바람은 호젓한 정자를 휘감아 돈다. 망루에 올라서서 동해를 한눈에 굽어본다. 노송과 어우러진 절경을 빚어 놓은 울진의 망양정 단청에 시선이 머문다. 계자난간에 기대어 활처럼 휘어 오른 겹처마 아래 우주 만물이 서로 어우러져 좋은 기운을 자아내라는 화려한 단청은 서양 건축처럼 여러 가지 색채도 아니다. 얼핏 화려해 보이지만 그저 청색, 적색, 황

  • 임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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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이 시대의 독서법

우리 협회 카드 발급을 하려면 대표자가 사인해야 한다며 함 차장이 농협에서 나를 만나자고 했다. 농협에 가면 내가 할 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확인 작업이며 증명 입회에 불과하다. 따라서 나는 오랫동안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한 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소설 한 권을 들고 갔다. 그리고 농협 넓은 매장에 앉아 읽었다.지하 감옥 중앙을 가로지르는 쇠창살 앞

  •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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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 668호 굴러다니는 돌

고향 근처를 흘러가는 강변에는 수심이 얕은 여울목이어서 돌들이 널려 있다. 모든 돌이 크기와 모양이 다르지만 하나같이 둥글고 매끄럽다. 물살에 떠내려 오는 동안 서로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돌들이다.돌멩이가 부딪치면 약한 돌은 깨지고 모난 돌은 둥글어지면서 본래의 모양은 사라지고 새로운 돌이 만들어진다. 어 떤 돌은 심사를 거쳐 선발된 미인들처럼 좌대에서 버젓

  • 육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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