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 여자를 천천히 바라본다. 시간과 기억, 나와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파운데이션을 가볍게 눌러본다. 부드럽게 퍼지는 크림은 주름진 피부 위를 매끄럽게 덮으며, 어둠 속에서 비어 있던 색을 채운다. 화장대 앞에 앉은 모습은 언제나 조금 특별한 미감을 자극한다. 육체에 수용되기 위해 기다리는 색채의 제단, 화장대는 제의를 연상시킨다.
- 강미애
화장대 앞에 앉아 거울 속 여자를 천천히 바라본다. 시간과 기억, 나와 나를 마주하는 시간이다. 파운데이션을 가볍게 눌러본다. 부드럽게 퍼지는 크림은 주름진 피부 위를 매끄럽게 덮으며, 어둠 속에서 비어 있던 색을 채운다. 화장대 앞에 앉은 모습은 언제나 조금 특별한 미감을 자극한다. 육체에 수용되기 위해 기다리는 색채의 제단, 화장대는 제의를 연상시킨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처음엔 긴가민가해서 한참 서성거렸다. 대문도 예전의 그 대문이 아니었다. 소박한 철문에 아주 낮은 담 대신 웅장하고 견고한 높은 대문에 내 키의 반 이상이나 높은 그런 담이었다. 아무리 내가 까치발을 들어도 안쪽을 보기에는 턱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철문 사이로 실눈을 뜨고 들여다보았다. 예전엔 문만 열면 바로 보이던 대청마루가 있던
세상이 잠든 시간, 흰눈이 왈츠를 추듯 나풀나풀 내린다. 세상의 더러움, 지저분함, 허술함을 다 덮어 주려나. 삶에 지친 이의 설움, 아픔, 한숨을 위로해 주려나.오늘은 천막촌에 가는 날이다. 명절마다 홀몸 댁에서 ‘시낭송 힐링 콘서트’를 해온 지 벌써 200회가 넘었다. 올 설날맞이는 천막촌 세 가정이다. 생필품과 식료품을 챙기고 그림을 곧잘 그리는 아홉
후삼국시대에 후고구려의 후신 태봉을 건국한 궁예의 관심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이용하여 사람을 통제 관리했다고 한다. 궁예는 스스로 이 능력이 있어서 역심을 품은 사람의 마음을 모두 꿰뚫어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현실에는 있을 수 없지만 이는 정적 제거에 아주 유용하게 써먹기 위한 공포 정치의 한 방법에 불과
세월은 흐르는 물과 같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흘러갔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세월, 내 유년의 시절은 춥고 배고픈 기억밖에 없다.아릿한 내 상념을 깨고 들려온 목소리, 힘이 없어 여전히 가랑가랑한 가엾은 노인, 내 어린 시절 어머님 모습 같다. 기력이 부족해서 저러는 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신은 그렇게 너그럽지 않을 것만 같다.“아
입춘의 절기를 무색할 정도로 영하의 날씨다. 성에가 창문에 낀 아침인데, 다른 때보다 흰 성에에 눈길이 머물렀다. 짧은 바늘 끝처럼 예리한 것들이 별 같기도 하고 눈송이처럼 그 모양이 신비롭다. 어린 영혼이 작은 손바닥을 펼치면서 세상을 향해 만사가 찰나의 순간이라고 알려주려는 듯하다.지난 구정에 긴 연휴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이박삼일 간의 일정 동안 애
우리 차가 없어졌다.나는 먼저 조수석에서 내려 새로 조성한 공원에 갔다. 그 사이 아내는 아울렛 주차장에 차를 댔다. 구경을 모두 마치고 주차장에 갔다. 차가 없다. 어디 있을까? 벌써 왕복 세 번째 찾고 있다. 처음 두 번은 신경을 곤두세우며 차를 찾느라 피곤한 줄 몰랐다. 나와 아내는 각각 다른 방향에서 차를 찾기 시작했다. 롯데아울렛 주차장은 끝이 보
도라지밭을 일구다가 백자 파편이 눈에 띄어 한두 개씩 모은 것이 큰 바구니에 가득 찼다. 산성(山城) 밑의 이곳이 옛날 집터 자리인지 기와 조각도 잡힌다. 대숲이나 풀숲, 논둑, 물 흐른 도랑에도 파편은 엎드려 있다. 전에도 절터에서 가끔 백자 파편을 보아왔지만, 그냥 지나쳤는데 요사이는 그 파편들의 빛깔에 이끌리어 모으기 시작했다. 은은한 빛깔을 보고 있
-논문은 검증받기 위해 쓰는 것 아닙니까?미친놈. 누가 그걸 모르나? 순진한 건지, 답답한 건지, 미련한 건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이 바로 이런 놈이다. 나는 정의로운 척하거나, 순수한 척하거나, 양심적인 척하는 인간이 싫다. 세상이란 특히 군대란 상식이니 양심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조직이다.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져도‘돌격! 앞으로!’라는 명령
모든 사내가 사랑스러워. 돈이 떨어져 13시간 동안이나 굶은 담배의 첫 모금 맛과 함께 문득 그걸 깨달아. 아직 벌어지지 않은 앞 대문니 사이로 뛰쳐나가지도 않는 침을 입가로 질질 흘리며 생각하면 어떤 때는 귀여워 죽겠어. 어쨌거나 세상 사내들은 내게 제법 많은 것을 가져다주니까. 엄마 아빠가 죽었다 깨어나도 해주지 못할 것을 그들은 거저 주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