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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어느 여인의 죽음

오월이 막 시작된 즈음 나는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죽음이 예고된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 뜬금없는 소식에 처음엔 믿을 수가 없었다. 6개월 전엔 요양원에 면회를 갔었고 두어 달 전엔 통화를 했었기 때문이다. 미심쩍은 마음을 지우지 못한 채 내일 장례식장에 가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시절은 오월이라 천지에 생기가 넘쳐흐르고 가는 곳마다 만화방창한 데 지구의 한

  • 이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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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장마의 추억

여름은 비와 함께 온다. 초여름에 내리는 비는 대지의 모든 식물에게 내리는 축복과도 같다. 나무와 풀들은 비의 세례로 왕성하게 하나의 노선인 녹색으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그려간다. 하지만 여름 장마가 길어 지면 일상이 불편하고 힘들어진다. 비가 무서워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석 달 장마에도 해들 날이 있듯이 안전이 확보된 상황이면 사정이 다르다. 잠시 걱정은

  • 사공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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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그리움

지는 해를 바라보며 그리움에 젖은 나는 창가에 기대어 추억을 떠올 리고 있다. 그리운 사람과 지나간 시절은 이젠 추억일 뿐이지만 오래도록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그리움이란 허무한 감정을 극복 해 보려는 심리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그리움을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예전엔 미처 몰랐어요이렇게 사무치

  • 박영자(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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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한 치 앞도 모르면서

토요일 저녁이었다. 팩에 얼린 마늘을 잘라 쓰려고 과도로 윗부분을 내려치는 순간 칼날이 튕겨지면서 왼손 장지와 검지 사이로 깊이 파고 들었다. 검붉은 피가 솟구쳤다. 콜택시를 불러 종합병원 응급실로 달려 가는 동안 수건 하나가 피로 젖었어도 멎지 않았다. 간호사가 살균제 두 병을 거푸 상처 부위에 들어붓고서야 피가 멎었다. 벌어진 상처를 봉합하기 위해 손가

  • 김애자(충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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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슬픔도 같이 해주면

얼마 전 절친한 후배의 슬픔을 접했다. 그녀는 자기도 죽겠다고 발버둥쳤다. 사랑하는 남편과의 사별이었다. 이제 회갑을 넘은 나이이니 그 슬픔이야 오죽하겠는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라도 손잡고 그 슬픔을 같이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는 말이 있기에, 나는 후배를 찾아가 같이 울었다.억겁일우의 어려운 태어남에서 볼 때 짤막한 생과 사의 사이는 자연 인생의 가장

  • 박영희(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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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나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자기소개서

나는 숲속 정자에 엎드려 펑펑 울고 싶은 걸 꾹 참고 있다. 얼마나 여 기저기 헤매었는지 발 한 짝 움직일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나는 태어나지 않았어야 한다. 자식도 낳지 말았어야 한다. 꼬물이만 없어도 이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고것들 꼬물거리는 걸 보면 내 빈창자라도

  • 손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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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몌별(袂別)

누추하고 지저분한 동네 사이 좁은 길을 네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꼬불꼬불 나는 차를 몰았다. 좁은 데다 길 옆에 마구잡이로 지은 조립식 주택들의 낮은 지붕 모서리가 내 이마를 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어 운전에 집중이 안 되려는데 집들이 끝나고 길이 탁 트인다. 저 앞 막다른 곳에 낡고 초라한 바라크처럼 생긴 회색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새아버지나 엄마를

  • 서형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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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작별

“별일 없제? ”핸드폰으로 차분한 목소리가 건너왔다. 토요일 오후 부산에 출장 갈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서기 직전이었다. 고등학교 동기 동창 박상수이다. 감정원에서 평생을 일한 뒤 고위공직자로서 이십여 년 전 퇴임한 친구이다. 퇴임한 뒤에도 일을 계속했다. 나이가 여든이 넘도록 전국 구석 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감정 업무를 해 왔다. 노느니 움직인다고 말은 했

  • 황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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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가을이 오면

9월이 되었지만 더운 기운은 그 열기를 쉽게 내려놓지 않았다. 기상청에서는 올해의 더위가 백 년 만에 찾아온 더위라고 했다. 게다가 아주 길어서 추석 전날인데도 반소매 옷을 입고 나서야 했다. 공항 대기실에는 에어컨 바람으로 서늘하다. 새벽 6시가 조금 지난 시각에도 여행을 떠나는 인파는 긴 행렬을 이루었다. 명절 연휴에 며느리로서 여태 꿈도 못 꾸던 해외

  • 김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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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9 68호 가물치잔치

삼촌과 함께하는 하굣길은 언제나 즐거웠다. 3학년인 또래들보다 6 학년인 삼촌과 함께하는 하굣길 놀이가 훨씬 더 신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아버지와 어머니도 삼촌과 함께 하교하는 날은 늦어도 걱정을 덜 하셨다.“경민아, 저수지에서 멱감고 갈까? ”삼촌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도 돌아다 보지 않고 마을 앞 저수지를 향하여 달음박질쳤다.“응, 삼촌

  • 황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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