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인
이천이십오년 봄호 2025년 3월 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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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세계의 요소인 무체계, 무절제, 무의미의 의식 속에서 앙드레 브르통1)은 1922년 다다(:Dadaism)와 결별한 후, 그 상황을 초극할 직관의 구체적 체계를 자신의 소설 「나자(Nadja)」2)에서 가공의 실제란 미학이 없는 문학세계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테면 꿈, 불가사의, 광기, 무의식의 환각 상태를 통한 모든 논리의 실질적 인식 방법을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에 의한 직관적 자동기술 현상으로서의 작품의 한 환영인 「나자」는 초현실성이 집중된 중심점으로서 경이적이고 생동적인 현실 속의 소설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이성의 감독에서 벗어나 윤리적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생각을 주장하며 꿈과 현실, 이성과 광기의 구별을 거부한 격변의 시대 속에서 관념적인 심층 심리학을 뛰어넘어 상실된 오브제를 실제적 차원까지 끌어 올렸음을 주목하리다.
마찬가지로 사고의 구술 등등과 내용의 모호함은 곧 순간의 언어, 연속적이고 공통적인 언어로, 초현실 오브제들이 인간의 숨결이 느껴지도록 한 대표작 「나자」는 이처럼 일상의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를 허무는 초현실 문학의 대표작이라 하겠다.
어쨌든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는 20세기 거의 모든 예술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회화에서 막스 에른스트, 달리, 미로 등 중요한 화가를 배출했다. 1966년 9월 28일 세상을 떠났지만, 인간의 삶을 개조하기 위해 모든 것을 오직 이미지로서 형상화된 직관과 영감만을 추구하고자 한 것이라 하리라.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아는 것으로서 귀착되는 것이 아닐까 등, 내가 현재의 나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암시하고 있다.(「나자」의 첫 장에서 인용)
여기에서 나는 누구인가? 브르통에게 이 질문은 곧 ‘나는 어떤 영혼에 사로잡혀 있는가’와 같다. 그가 파리의 한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매혹적인 여성 ‘나자’와 만남을 통해 체험한 실제 이야기 및 특이한 경험을 기록하게 된 이 작품은 ‘저 위대한 무의식의 생생한 목소리만이 나의 자아를 좌지우지하기 바라는 소설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글을 보면서, 현실성 있는 진정한 삶을 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소설 「나자」에는 인간이 지닌 상상력을 불가피한 속성으로 한 후, 닫힌 현실 세계에서 초 현실성을 향한 신비의 메시지가 될 것이란 믿음에서 ‘아름다움은 발작적이며,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닐 것이란’ 그 사실에서 「나자」를 통한 여인상은 상실된 어떤 오브제의 재발견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작품 「나자」는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이질적 요소로서 연결된 우연적 요소가 변증법적으로 결합되면서 일상에 대한 초현실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드러내 주고 있다 하겠으며, 또한 작품 「나자」는 초현실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초현실주의 문학의 큰 성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리다.
예컨대 암호 같은 문장들과 추론해야 할 명사 그것들의 질서와 무질서들의 우연적 질료들이 변증법적으로 결합한 하나의 자동기술에 의해 검은 해학이 드러난 작품으로 이해될 수 있겠으며, 모호한 상상력의 조응(照應)에 걸맞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겠다.
특히 작품상에서 화자의 생각인지 실제의 사건인지 알 수 없는 주제의 구성들이 때론 ‘광기와 꿈’과 무의식 및 불가사의하고 연금술 적인 무의식의 언어를 구사하면서 <검은 해학>의 이용이 끝없이 반복을 계속하고 있음을 확인하면서 이는 곧 독자의 새로운 공감을 얻는 데 성공 요소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요는 어떠한 하나의 이미지와 운동이란 단순히 외면적으로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려는 것이 아닌 보다 은밀하며 유일한 정신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착란과 꿈의 소설 공간이 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어떠한 효과를 증폭시키려는 논증의 완벽한 전형이라고 할 만한 것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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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이제 우리는 「Nadja」의 구성 상황에서 내용에 대한 의미와 구조상의 편집에 제시된 문제들이 순간을 위한 문제로 돌아간다는 것이 무의미했을 것이라 하는 그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이 깊은 관심으로 연구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이 장에선 구성하고 있는 설명적인 내용을 파악하고, 관심을 집중시켜 주어진 옳은 가치를 찾는 중요성에서 인간의 진정한 운명이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한 하나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객관적인 주인공일 수가 없음을 공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컨대 원초적 순수성이 부여될 때에 무관심은 물론 어떤 위험도 불사하면서 활동적인 주인공을 창조하려는 경우 <현실과 초현실>의 그 상황을 중복 혼합 구성해 내려 한 초현실주의 작가에 의해서 두 세계가 하나임이 증명되는 와중에서 외부 세계의 현상들과 표현된 현상들은 서로 교환 가능하다는 그 사실성을 인식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함에서 초현실주의 작가는 문장 속에서 주인공 이외에 따르게 하는 증인이 있다는 그 사실에서 무의식적인 자만이 뚜렷하게 드러난 광경에 놓인 인물에 관한 것을 예리하고 명철한 상태 속에서 다른 요소를 찾을 수 있음과 같음이라고 주장하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니까 더욱 분명한 것은 초현실주의를 시험하는 미래적인 방법을 알게 되는 때와 무의식적인 상태를 표현하고 있는 문제는 우연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서 「나자」를 중심으로 초자연성을 보이는 무의식 작용에 대한 정신 분야에 따른 이상행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하겠다.
물론 「나자」에서 나타난 초현실적인 인식 양상에서 지난밤의 꿈이 그 전날 밤의 꿈과 함께 매일 이어질 수 있는 이미지 그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상호 간 거리가 먼 두 개의 현실적인 접근에서 일어나는 삶의 일상적 필요성이나 논리적인 구속에서 벗어난 산물로서 이해되는 점이리다.
이 점에서 아름다움은 발작적인 것으로서, 그렇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닐 것∼.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불규칙한 움직임들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 움직임들이 필연적인 대가를 치르게 된 하나의 발작적인 충격을 초래한다는 사실로 확인되고 있는 인용에서 보여 주듯 연금술 적인식의 조응 속 의식 흐름에 따라서 융해되고 있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리다.
이 결과 소설 속 긴장 국면에서 나타난 여유와 유연한 감정을 일게 하는 <검은 해학>은 진실을 표현하는 위장일 수 없음에서 잠재의식의 존재 의미가 암시적으로 드러난 유머들 즉 자아, 대자, 사물, 즉물 들이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관되는 촉매 작용이 되고 있다 하겠다.
이처럼 뒤엉킨 관습을 풀어내어, 미 경험의 근원으로 독자에게 돌려주면서 괴기함을 주기 위하여 Breton은 부조화와 불협화음을 겹치게 하는 등 독립 대상을 괴이하지 않게 하고, 또 인지될 수 있는 다른 대상과 연관시킴으로써 그 효과를 얻고자 한 배려임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리다.
따라서 어떠한 형식을 가진 것이든 시적인 무관심, 예술의 오락, 박학한 탐구, 순순한 사변, 이런 것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라 하겠으며, 그 결과 무한을 지향하는 인간이 먼저 파괴할 제약인 <유머>로써 ‘겉모습을 해체시키고 현실을 비현실로, 비현실을 현실로 만든다’ 하는 그 사실을 통한 방법으로써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리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인간의 번민과 고통을 체감하고 그것들을 표현해낸 그들에게 이제 중요한 것, 심리학 또는 사회학으로 인간을 해방할 일이 되기 때문에 그들은 간절히 열망하는 이상 세계에 보다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하겠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의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곧 ‘현실의 한계를 떠난 존재로서의 대상, 또는 어떤 한 사람으로서 역할을 벗어버린 인간 존재 그 자체의 세계가 구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진시키려 하며 또 다른 한편으론 ‘현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초현실 세계의 아우라를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로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리라.
이처럼 시대 상황은 내게 연연한 생명체, 숨 쉬는 생명체를 밟고, 살고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것이 될 것이기에, Bachelard의 4요소인 땅, 물, 불, 공기는 독립적인 것 같지만 독립적이지 않다는 그 요소들이 반드시 다른 요소에 의지하여 생성되고 변화한다는 그런 점에서 결과는 계속 변환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리라.
원초적 본성의 시위에 근본정신을 둔 초현실주의 대표 작품 「나자」는 상징주의, 프로이트의 분석 심리학, 다다이즘을 거쳐 완성한 브르통의 실험 환상의 세계와 현실이 만나는 그곳, <초현실>이야말로 모든 상상력의 원천이 되겠기에 독자의 상상력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는 사실을 오롯하게 비추어주리라.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유를 믿을 자유 또한 동일 선상에 있음이 분명하며, 비논리성으로 인해 검은 해학의 의미가 드러나는 도덕적인 지각 현상을 밝힐 그 삶들은 실로 매혹적인 사실이기에 현실의 모든 것은 삶의 신비처럼 유머로 표현되는 멋진 요소로서의 특성이 확인되는 것일 터이리다.
내 생각으로는 하나의 실례로서 영국의 한 음악 평론가의 비틀스에 대한 찬사에서 보듯 비틀스의 히트곡 중 <Across the universe>라는 곡이 430광년 떨어져 있는 북극성을 향해 쏘아 올려졌다는 초현실적인 이 사실에서 그들의 음악이 머지않아 외계 생명체에서도 공감될 수 있는 날이 올 수도 있음을 유추할 수 있지 아니할 가에 대해 나는 생각하게 된다.
헌데 일련의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당신은 왜 글을 쓰십니까?>란 제목의 질문에서 인간의 존재 의미와 해결해야 할 산적한 문제에 대한 견해 따위를 걱정하는 허망함을 거론하면서 ‘쓴다는 것, 그것은 양도이자 타산적인 행위의 예술에 대한 경멸로서 예술의 기적적인 분리’를 추구하고 있음이라는 선언을 보여 주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의 실례에서 볼 때, ‘콜럼버스는 광인들과 함께 출발되었고, 때로는 내가 현실에서 거부되는 것처럼 예컨대 시간상에 있어서 노골적으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의 확실성에 가치 같은 것에 꿈과 일치시킬 수 없다는 그것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라 하겠다.’
아무튼 ‘무의식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싶고, 무의식만을 믿고 싶고, 내 눈 속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빛의 한 점, 그 어둠의 중심에 부딪치지 않도록 나를 이끌어 주는 한 점을 나 스스로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무의식의 드넓은 방파제를 한가로이 거닐고 싶노라’라는 이 표현에 더욱 우리는 공감하게 되는 터이리라.
문제는 인간이 감금시킨 광기(狂氣)에서 나온 상상력이란 ‘광인’을 어떤 규칙 위반으로 몰고 가건 또는 이 규칙 밖에서 다른 양식의 목표 대상이 되고 있음에 모든 사탄이 쓰라린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광인이야말로 지나치도록 양심적이며 정당한 사람으로 반전될 수 있음에서 전형적인 인간의 개념을 박살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리다.
그러므로 초현실주의 태도란 범용, 증오 그리고 평면적인 충족성으로 채워지는 것 속에서 나아가 작가 스스로 이곳을 통해 자기 유희에 빠지는 등 정신 활동에 큰 비중인 <꿈>이란 꿈꾸는 시간의 총화로서 현실적인 시간은 깨어있는 인식의 시간보다 적지 않기 때문임을 생각한다.
이 점에서 역시 기억이란 꿈을 단편적으로 쪼개어 놓기도 하고 때론 과정을 고려해 놓기도 하는 등 나와 관계있는 ‘현실’이 기억될 수 없는 과거로 침몰 되지 아니하리란 하나의 사실에서 불가사의란 언제나 아름다운 것일 터에서 ‘그것과 함께 뿌리를 내리고 자란 이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이름이 계속 내 귓가에서 울리는’ 그 사실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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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경험은 지극히 사소한 것이지만 그것은 여타의 경우에도 일치되는 사실이었기에, 어쨌든 앙드레 부르통 그의 문학적 표현의 본질의 정신 구조에서 억압된 욕망의 구체화인 꿈의 상황을 진실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겠다.
그러니까 작가의 ‘문학의 비유 형식은 차용에 의한 감동적 인물 창조가 가능했기에,’ 환상적인 면에서 놀라는 것은 바로 환상적인 현상이 없다는 점이며, 진실만이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합리적 존재와 사물에 절대적 불신이란 어떤 시대나 상황에서도 똑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점에서 마음의 순수한 자동현상으로서, 그것에 의하여 입으로 말하든 붓으로 쓰든 또는 기타 어떠한 방법에서든 사고의 참된 움직임을 표현하고자 했기에 그것은 또 이성에 의한 어떠한 감독도 받지 않고, 심미적인 또 논리적인 일체의 관심을 떠나서 행해지는 사고의 구술이며, 동기와 목적에 선행하는 원초적인 언어를 무의식의 순간마다 표현해야 한다는 점이라 하리라.
이처럼 자동기술에 의하여 꿈과 무의식, 불가사의와 광기로부터 충만 될 자유를 획득한다는 것은 개인적,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변모시키는 일이며, 그는 자유라는 어휘만이 나를 변모시키는 전부라고 전제함에서, ‘나자’가 제시하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외침에 대답은 그렇지만 대답이 없는 대신에, 대답이 없는 절망의 질문들이 당혹스럽게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소설은 대답이나 해결은 없고, 질문이나 의문이 많은 불가사의한 환각과 이미지 편향을 드러낸 작품으로써 제시되는 것이며, 의식의 위기를 유발하는 죽음의 허수아비와 미래라는 커튼, 그리고 이성에 빠짐일 터에서, 삶과 죽음 및 현실과 상상 등 과거와 미래에 전달 가능한 것보다 불가능한 것, 높고 낮은 세상으로 변화되는 사실로 향하는 불가사의한 잠재의식 세계를 노리고 있는 사실로서 정의할 수 있겠다.
‘당신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지 않고 말했다. ‘나는 방황하는 영혼이에요.’ 그녀가 해준 말, 그것은 내 생각, 나의 언어, 나의 존재 방식과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말이면서, 내 생애 최고로 감동적인 찬사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단순성이라는 말이었다.
요는 끓어오르는 관념적인 영역과 영역 사이의 경계를 빨리 허물어트리고, 동시에 일상생활의 미학, 현실과 예술과의 관계 설정, 스타일 또는 장르의 해체와 융합 등 잠재의식 세계의 예술 영역 및 확장은 물론이겠으며, 예술을 한층 더 매혹적으로 소통시키는 결과로서 볼 수 있을 터이다.
그래서 시공간을 초월한 초현실적 의식을 중심으로 하는 어떠한 한 사상을 표현함으로써 감정의 절대성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극적인 표현의 효용 가치를 이용하면서 외부 세계의 대상을 일상적인 관습에서 이탈시켜 내려는 본연의 의미 상실의 새 이미지로서의 감수성과 결합된 가치로서 ‘나자’의 여인상은 드러나고 있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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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자」에서 자아의식을 표현하는 상상력 속엔 생명력을 지닌 경향성으로 나타나며 무의식적 행위의 실현으로써 야기될 수 있는 현실과 시간을 탈피하지 못한 상황들 이를테면 시공을 초월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제한된 문학 표현에 구속받지 않는 현실 상황에 대치되는 개념의 문제들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처럼 목전의 대상물에 심취하고 언어의 연금술 적인 방법을 브르통 그는 이해했기에 의식의 이원적 요소를 현상과 실체의 개념으로서 행동의 동기를 찾으려 했으며, 신비의 존재인 꿈에서 접근될 수 있는 실체에 자극을 주는 객관적인 사상의 표현으로서 무의식 세계의 가치를 나타내려고 했음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외부 세계의 모든 현상을 그의 망상적인 생각으로 모순적인 대상의 바른 의미를 찾기 위한 전제로 삼았으며, 「나자」의 여인상이 지닌 연역적 유머의 광적 표현이 되는 무의식 행위는 새로운 감정을 표출하고 공동체 의식을 제한하려는 사회적인 관념을 한정함으로써의 순수함을 자연스럽게 계시하고 있었다 하겠다.
실로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언제나 비참한 외침을 스스로 던질 수 있던 것은, 바로 그 역설 때문이라 하리라. ‘누구인가’ 「나자」 당신인가 내세라는 것, 모든 미래의 세계가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인가. 나에게는 당신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누구인가? 나 혼자뿐인가? 이제 나 자신인가.
「Arnin」 이래 시(詩)의 전체적인 이야기는, Je suis(프) = I am(영)- (나는 ∼이다)로 표현되는 사상과 함께 취하여진 자유의 역사이다. 그 역사는 그의 속에서 상실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분야에서 「나자」의 기본적인 깊은 생각은 시작된다고 하겠다. Je suis를 알게 되는 것은, 즉 공간적인 존재는 무형적인 교합에서 je suis가 강조되고 있는 사실이 되리다.
헌대, 현행의 생활 속에서 자신을 피하는 공간, 그러나 자신인 나를 이행하고 있는 경우에서 아주 우연히 재인식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나자」의 의식은 사회규범에 배치되는 표현과 논리성이 거부됐기 때문에 일상적 상상을 넘어서 ‘저 위대한 무의식의 생생한 목소리만이 언제까지나 나의 모든 자아를 좌지우지하기 바란다’는 꿈도 생시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 되고 있음과 같음이라 하겠다.
그녀는 나에게 자기 이름을 말하고, 그 이름을 자기가 직접 고른 것이라고 했다. ‘나자’에요, 왜냐하면 나자는 러시아어로 희망이라는 말의 어원 때문이고, 또 단지 어원일 뿐이기 때문이죠. 그는 좀전에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볼 생각이었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내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나에게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었다. 역동적이지도 정태적이지도 않은 아름다움, 지진계처럼 아름다운 인간의 마음, 침묵의 절대적인 힘, 조간신문은 언제자 나의 근황을 충분히 알려 줄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구속에서 해방시켜 줄 놀라운 현실성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외치는 하나의 상식에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나무들을 내팽개쳐야 한다. 집도 화산도 제국도, 그것들의 뒤에는 무엇인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데 바로 그것이 초현실주의 비결이라 하겠다.
우리가 「나자」에서 본 인식의 신비한 자동현상의 실험들은 기존 소설과는 다른 초현실적 요소로 투영됨으로써 잠재의식을 원초적인 혼돈으로 산출시켜 나아가고 있었음은 물론이었고, ‘나로서는 나는 유리집에 살기를 계속할 것이다. 이로 인해서 je suis는 조만간에 다이아몬드에 새겨진 나를 나타낼 것이다.’
이처럼 앙드레 브르통은 유리집에서 환상적인 유령을 드나들게 하고 있었고, 암흑은 물론 어떠한 방법을 제시하지 아니했을 뿐 아니라, 문학적인 속임수는 더욱더 아니었음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만 내적 신임 속에 사물의 형체가 뚜렷하게 새겨지기를 탐색하는 기호로써 나아가선 자신을 보는 명철한 <검은 해학>의 특색으로 인해 그 상상력들이 증식·파장되는 등 세계문학사에 큰 획을 남겼음을 다시 주목하는 바이다.
이제 결론적으로 Andre Breton은 양차 대전을 거치면서 사상의 변혁에 기존의 사상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시도해 보이면서 초현실주의의 중심인물로서 다다이즘을 벗어나 Freud의 정신 분석적 측면에서 생명의 진실한 의미를 찾아 나아갔다 하겠다.
나아가서는 잠재의식보다는 무의식의 대상을 탐색하여 미래에 대한 투시력을 지닌 능력에 비해 존재의 근원을 포착하는 꿈과 텔레파시 현상, 그리고 비이성적 심리 현상에 우리의 관심을 돌리려고 했음을 지각하였고, 예쁜 젊은 여인과 우연히 만났던 이야기로 구성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시 「자장(Les Champs magne’tiques)」에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시형으로서 인생을 투시하려고 하였으나, 환상적인 서정 감을 표현하며 초현실주의 선언의 논리적인 근간을 마련하며 내적 심리 현상을 예리하게 관찰하는 브르통의 소설 형식은 일반적인 장르를 벗어나 어느 시대 한계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생명적 약동 그 사실들임을 알 수 있었다 하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소설 형태와 구성에서 「나자」의 출현은 무의식 상태에서 일고 있는 심리 현상의 정당성을 해설하고 있었고, 모든 것이 광기로 헤어날 수 없는 지옥에서 「나자」의 추락은 요정에 의하여 자기 정부의 마음에 따라 조정될 필요가 있는 조건으로 취급되고 있었음을 확인하여 볼 수 있겠다.
1)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초현실주의 주창자. 프랑스의 작가, 비평가, 소설 및 시인으로서 최초의 자동기술 시「자장」, 산문「나자」와「연통관」및「무모한 사랑」등을 발표하는 등 모든 예술 분야와 건축에 큰 영향을 끼침.
2)초현실주의 대표작. 일상의 현실과 무의식의 경계를 초극할 수 있는 윤리적인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내며, 특히 랭보의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명제와 마르크스의 ‘세계를 개혁해야한다’ 는 명제를 종합하려는 실험과 모험을 시도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