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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거리감

꽃비 맞으며 분홍빛으로 물든 어린 봄시간을 잊은 채 갯벌에 뒹굴던 파란 여름가을 들판에서는 마음이 온통 햇살이었다함박눈 내리는 깊은 밤적막의 소리를 듣고 하얀 고요를 만났다 손가락 하나로 문을 여는 휴대전화 속 세상스침이 주는 얇은 설렘조차 없다메마른 언어가 무리 지어 다니며환한 낯빛과 따뜻한 언어를 내치고 있다 그믐밤은 문명의 빛이 덮은

  • 김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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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5.3 673호 수난기

김치부침개 하다 프라이팬을 놓쳐 와장창한 것이 반항의 깃발로보였나 봐어처구니없이 달려든 순간의 회오리싱크대가 들썩거리고 프라이팬이 고개를 처박고 접시가 버둥거렸지힘이 빠져서요겨우 친 방어막은 마침표까지 휘잡아 하수구에 버려졌어부침개 먹고 싶다는 말에 탈골된 어깨는 분별없이 노릇하게 부칠생각만 했으니엄지만 볼모가 된 거야고초 당초 맵다 해도, 맵다 해도서글픈

  • 김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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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5.3 673호 아버지

오늘 아침 창밖 까치 울음소리에눈을 뜨자 지난밤 꿈에서 뵈었던아버지가 새삼 보고 싶다20대 젊은 나이에 가난에 밀려머슴으로 팔려 온 아버지 내가 어릴 적 뵈었던 아버지는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허리 한 번 펴지 못한 채뼈 빠지게 소처럼 일만 하셨다 ‘그놈 쓸 만하네일자무식한 놈이 일은 잘 하는구나’부잣집 주인 눈에 들어 외동딸까지 내어주니

  • 이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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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2025.3 673호 마지막 잎새 하나

11월의 아침마지막 잎새 하나벌거벗은 가지 끝에 매달려불어오는 북풍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잎이 진 나무들은가진 것 다 던져버린 사람처럼담담하고 홀가분하지만지는 잎새는둥지를 뜨는 새처럼초조하고 아쉽기만 하다 잎이 지면뜨겁던 태양도그 눈부심을 잃어 가고시간은 망각의 늪으로 달려가지만 내 그리든 사람들의 가슴 적셔줄따사로운 시 몇 줄

  • 김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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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바위틈 소나무

삼복더위 땡볕이 데우고소한 대한 강추위 휘몰아쳐도흙 없는 열악함 아랑곳없이바위틈 깊이 뿌리를 박고불평불만 없이 잘 살아가는 나무 질긴 생명력으로기암 절경 틈새마다 뿌리를 박고사철 푸른 가지를 뻗어바람춤이나 덩실덩실 추어 가며늠름한 기상을 보여준다 산새들에게 사계절 소리 터를 내주며욕망 많은 사나이처럼멋쟁이 근육질 나이테를 두르고관솔의 열정

  • 이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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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3 673호 달빛 은은

어린 날, 어른들이 안 계셔서 홀로 있는 밤, 혼자 자려니 통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아도 초롱초롱 정신이 더 맑아지고 두 눈은 더 말똥말똥해졌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뚫린 창틈으로 달빛 한 가닥이 소롯이 스며들어 왔습니다. 불이 꺼진 방 안, “방엔 누가 있을까” 도저히 궁금증을 참아낼 수 없었나 봅니다. 다행히 뚫린 구멍을 발견하곤 방

  • 최원현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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