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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세심(洗心)

아직도 열리지 않은 여명초승달 잔뜩 웅크린 채 미소 짓고별들은 시린 새벽을 합창한다.눈이 쌓여 지워진 산행길한 걸음 한 걸음자각(自覺)의 발자국을 내며정상을 향해 내디딘다.가쁜 숨 몰아쉴 때마다땀과 섞여 쏟아내는응축된 욕망과 이기(利己)들밀려오는 찬바람에비워 내고 또 비워 낸다여명의 그림자 하나둘 일어서서 열렬한 응원을 보낼 때부양할 것처럼 가벼워

  • 유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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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 669호 밥처럼 산다

우리 부부는 밥처럼 산다늘 먹고 사는 밥처럼 산다때가 되면 마주하듯그냥 일상으로 대하는 밥처럼 산다생각 없이 밥숟갈 뜨듯이매일 쳐다봐도 귀한 줄 모르고당연히 옆에 있는그냥 만만한 밥처럼 산다배부른 점심 오후 소파에 앉아낮잠에 빠져 고개를 젖히고입을 바보처럼 벌려도 부끄럽지 않은그냥 편안한 밥처럼 산다그러다가 가끔씩배고파 허기질 때눈앞에 급히 차려 나오는 밥

  • 김태옥(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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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4.11 669호 주인 잃은 빨랫줄

언제나 활짝 펴 있는 양어깨에벗어준 옷가지 척척 받아 걸고그저 좋아라임 앞에서 궁둥이 흔들며 춤추었지양팔 늘어지도록 많은 옷가지곱게 곱게 잘 펴 말려온 손놀림긴 작수발 곧추세워 가며바람에 떨어질까 꼭 잡고 있었지우리 식구 오면 순순히 내어 주고말없이 칭찬받던 그 옛날이 그리워이제는 저 안방의 옷걸이도 나 같을까기약 없는 날만 기다리고 있어바람 부는 날이면

  • 최인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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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2024.11 669호 할머니의 시간

한나절 밭일 마치고할머니가 집으로 간다누가 심었는지 무성한 능소화가토담 너머 골목길을 기웃거린다종일토록 들리는 건 바람 소리 새 소리 손주들 웃음소리가 그리운 할머니해진 바지 땀에 전 적삼호미처럼 굽은 등에시간이 켜로 쌓였다젊은 날 일어나면하늘 보고 날씨를 살폈지만지금은 땅 보고 헤아린다허우적허우적 걸어가는할머니의 골목길능소화 붉은 입술이 낭자하다

  • 이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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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4.11 669호 그들은 법을 논하지 않는다

달달한 꿀은 누대의 내력을 이어가는마법의 영약이다‘오직 제 일에 충실한’DNA에 새겨진 불문의 법 꿀벌 한 마리는계보를 지키는 하나의 원소일 뿐설을 맞는 것처럼집 한 덩이가 온 통으로 들썩인다날벌레의 집은세밀하게 구성된 단단한 입법체法의 낱자들이 분주히 잉잉거린다고래 심줄 같은 질긴 힘으로유전자를 지키는저 법엔 이유가 없다파르르 떨리는 가는 날갯짓

  • 문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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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2024.11 669호 진달래

칼바람 부는 밤이면두 귀를 열어두고그대 따사로운 손길 기다렸다오산허리 붉게 휘감아두견새 울음 토하거든내가 다녀간 줄 아시오그대의 귀한 사랑 아로새겨방방곡곡 산하에 뿌려두겠소타오르는 열정 선혈로 대신하리다하늘거리는 손짓은 사랑이오가냘픈 떨림은 나의 순정이라오잠시 왔다 흔적 없이 가는 나를 잊지 마시오사랑하는 그대여 먼 훗날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그대 곁에 다시

  • 김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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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2024.11 669호 어설피 울다

봄부터 다져온 공력힘껏 목을 뽑아 외쳐보지만득음하지 못한 소리꾼의 외침처럼아직 어설프다.꼬끼오-올가락은 서툴고음은 짧고목소리는 변성기 소년처럼 탁하다.갓 솜털을 벗은 날개로그동안 갈고 닦은모든 지식으로 퍼덕거려 보아도허공에 걸린 횃대는 높아만 보인다.옆집에 사는얼굴도 모르는 수탉은노련한 곡조로 길게 목청을 돋우어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꼬끼오∼ 오∼

  • 김경남(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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