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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 671호 무인도

바다는 안다속세를 떠나 수행하는 암자의 선승처럼태고부터 내 조상 대대로바다와 함께 살아왔다창공을 나는 날개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은빛 고기들의 꿈을 다독이며적막한 이불 속에 파묻혀 잠들다가종종 바람인 듯 스치는 말씀‘절대로 사람들을 가까이 하지 마라’ 알 수 없는 악연의 고리들욕망의 세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고독과 함께 사는

  • 조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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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2025.1 671호 샘터처럼

뜨거운 태양이 쉬던산기슭 샘은 시가 되어한 모금에 읽는 영혼의 기쁨으로목마름 달래주던 그 세월은 정이라고가시 돋친 계절에도하늘 흐린 날들에도 꽃은 필 거라고 별을 가리키는 풀향기에아끼는 것에 대한 생각이란햇살이 내리는 바위 곁에는너무 뜨거워 너무 뜨거워도쓰러질 수 없는 풀에게 줄 거라며 밤새 이슬 모으는 당신은그렇게 너무 아름다웠

  • 고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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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5.1 671호 아내의 칫솔

세면대 위에 꽂혀 있는아내의 칫솔모가 벌어진 채 신음하고 있다1년 전인가, 한국을 방문할 때대한항공 기내 안에서 받은 미니 칫솔을 지금껏 쓰고 있었다니남편과 자식을 울타리 삼아그 안에서 걱정 모르는 줄 알았더니볼품없는 칫솔과 함께 분주하였구나아하, 그렇구나아름다움과 행복이이것에서 나왔구나이 작고 휘어지고 갈라진 칫솔에서.

  • 김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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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2025.1 671호 사진, 그 고독한 춤

소나무만 찍는 사진작가를 안다그가 이끄는 외길 따라나선 길뭉클 명치끝 뻐근한 서러움이 만져졌다한 호흡을 위한 절묘한 쉼표처럼그때그자리오래지켜지극히 절제된 혼의 리듬을 담는페이지의 적요를 넘기려다 말고붙박이듯 순간에 매료당하고 마는질긴 고집이 독야청청 소나무를 닮았다뼛속에서 발화시켜 고독한 춤의 경지에 든 마침내 그가 나무의 숨결이 되었을 때멈춘 아

  • 구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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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2025.1 671호 병실에서

여름의 끝 무렵 입원실에서창밖의 신갈나무를 바라본다눈부신 아침햇살에저마다 빛나는 나뭇잎들지난밤 어둠 속에 떨던 두려움은모두 까맣게 잊었다산들바람에 나부끼며죽은 소나무 곁에서부지런히 광합성 운동을 하고 있다 |나뭇잎 하나가 생명이다더러는 달랑거리며 매달려 있는갈색 나뭇잎들그 아래 그늘진 곳에아, 너무 일찍 떨어져 내린 저 잎새들나무는 계절을 이해하는

  • 김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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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2025.1 671호 물그림자

세상을 흔들어강 건너 언덕배기 할미꽃 하나하늘에 깊게 깊게 심었는데그영혼거꾸로 살아가고흔들거리는 허수아비향기 없는 머저리들세상 무게도 모르고 울렁거린다날빛도 돌고 도는 세상굴절되어 곤두박질치다가삶의 부스러기들처럼 떨어지는 눈물 넋 나간 사람은 오색 빛깔로 유희를 하고 슬픈 곡조도 없이줏대도 없이 온 천지가 너울거린다세상은 조용히 살려고 애

  • 정인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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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2025.1 671호 경의중앙선을 타고

일없이 경의중앙선 열차를 타고왕십리역까지 갔다가그대로 돌아오는 일은 슬프다왜 그러는지생각을 버린 채돌아오는 역의 순서는아무리 외워도 헷갈린다노년에 깊이 들어선 노부부가서로 어깨를 내주며종착역에 다 오도록 졸고 있다누가 먼저일지는 순서가 없다고 했지내일 모레가 설이다북한강은 내리는 눈을 더 안기 위해안간힘으로 꽁꽁 얼어붙는다품을수록 더 빨리 녹아내릴 것을모르

  • 안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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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2025.1 671호 지게 외4편

지게꽃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겨울 동안 벽에 걸려 있던 지게는 바쁘다그시절상동마당백년도 훌쩍 넘은 세월 간직한어둠이 내리고모기의 성가심이 시작되면아버지는 짚과 풀로 모깃불을 피우시고별은 반딧불이와 함께 한 폭의 그림을 그렸다낮이면아버지는상동 뒷산 소풀을 지게 가득 싣고지게 끈으로 질근 묶는다달랑대는 끈 꼬리를 잡은 나는지게 진 아버지 뒤를 따르며 마냥 해맑았

  • 권오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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