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조선은
36년 식민의 상처를 안고
해방의 새벽을 맞았으나,
그 새벽은 완전한 아침이 아니었다.
국토는 둘로 갈라졌고,
민족은 서로 다른 깃발 아래 서게 되었으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꿈은
분단의 철조망에 걸려 찢겨졌다.
그런데도
조선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그래도 정의가 오고.
식민의 고통과 강제징용의 피눈물,
성노예의 절규와
약탈당한 산천의 아픔이
국제사회의 법정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으리라고.
소련의 군사력이 만주를
순식간에 휩쓸어버리자
미국은 경계하며
한반도를 절반으로 갈라 친 뒤
소련 견제할 냉전구도를 만들고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추진했다.
일본을 미국의 전진기지로
삼으려는 목적 아래.
그러나 대일 강화조약 협상이
진행되면서 조선의 기대는
산산조각으로 깨져버렸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전쟁을 끝낸다는 이름의 회의장에는
승전국들이 모였으나,
안중근 의사의 투쟁,
3.1 독립운동 등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한국의 자리는 없었다.
발언권도 없었으며,
서명할 펜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피해자는 문밖에 서 있었고
가해자 일본의 미래는
회의장 안에서 따뜻한 분위기 속에
논의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미국은 말했다.
“일본은 다시 일어서야 한다.
경제를 회복해야 하고,
소련과 중국을 막아야 하며,
아시아의 반공 보루가 되어야 한다”.
그 말은 곧
배상은 줄어들어야 한다는 뜻이었고,
전쟁범죄의 책임은
최소한으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독일에게는
베르사유의 무거운 사슬을 채웠던
서구가 일본에게는
새로운 출발의 길을 열어주었다.
그 길 위에서
국권 침탈의 아픔
강제징용의 한숨도,
군 위안부의 통곡도,
식민지 백성들의 피와 눈물도,
국제정치의 뒷골목으로 밀려났다.
1945년만 해도 미국은 말했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 후유증으로
배상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1949년 이후 입장을 뒤집고
"한반도는 연합국 자격을 상실했다"며
일본의 배상 부담을 덜어주기에 골몰했다
냉전의 그늘 아래 원칙은 사라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집권 전후를 통해
한국은 일본의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큰 목소리로 주장했다.
한국은 1905년부터 일본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식민지였기 때문에 40년 동안의
피해에 대한 배상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강제 징용은
물론 문화재, 금, 토지 강제 수용 등을
배상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한국을
세계 2차 대전 연합국에 포함시키지 않고
단지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일본 지배를 받고 있었다고 규정했다.
필리핀에 대한 배상의 경우도
2차 대전 당시 일본에게 당한 피해에
국한했다.
이어 미국은 일본이 배상할 대상의
국가 범위를 2차 대전 당시
일본과 교전한 국가로 축소하는 방침으로 변경하고
남북한, 중국을 회의 초청대상에서도 제외했다.
미국의 원칙은 고무줄처럼 작동하면서
일본을 친미화하는 쪽으로 집중했다.
국제적 규범은 물론 상식도 외면한 것은
물론 규탄 받을 짓도 저질렀다.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전쟁기념관에서
일본과 48개국이 맺은 평화조약
한국은 서명조차 못했다.
40년간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연합국 자격조차 부여받지 못했다.
미국은 협의 과정에서부터
한국을 철저히 배제하며
일본의 전쟁범죄 배상 조건 논의에서
한반도를 아예 외면했다.
미국무부는 파렴치한 괴문서까지
유포했다.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
남한에 남겨진 일본 자산이
한국의 배상 청구액의 4배라는
미국 국무부의 해괴한 계산법으로
도둑질한 장물을 합리화했다.
식민의 수탈과 탄압으로 가득 찬 세월을
근대화로 둔갑, 미화시킨 것이다.
삼팔선 이남에 일제가 남겨두고 간
적산(敵産)의 무게가
한국이 요구하는 전쟁 배상액의
네 배에 달한다?
조선에 남겨진 일본인 재산이
배상액보다 많다?
미국은 철도와 공장, 건물과 시설을 들먹이며
식민지배가 남긴 상처와 아픔을
회계장부의 숫자로 환산하려 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고통을
무슨 숫자로 셀 수 있으며,
언어, 이름을 빼앗기고
독립운동 탄압 속
목숨을 빼앗긴 세월을
어떤 회계장부에 적을 수 있단 말인가.
일제의 식민지배는 단순한 점령이 아니라
토지와 자원과 노동과 기억을 빼앗은
총체적 수탈이었다
그러나 전후 대일조약의 논리 속에서
그 폭력은 희석되었다
침략은 경제정책처럼 설명되었고
수탈은 근대화의 그림자로 위장되었다
강제동원은 통계가 되었고
성노예는 침묵 속으로 밀려났다
도둑이 남의 집에 들어와
강토를 빼앗고 자원을 수탈한 뒤
버리고 간 연장들이 더 비싸다고
속삭이는 해괴한 논리였다.
정상적인 경제의 열매가 아닌,
강도질로 일군 장물을
돈으로 환산하여
배상의 입을 틀어막으려 했던 파렴치한 행위.
한민족의 역사적 고통과
도덕적 청구권을 사악한 논리로 유린한 것이다.
국내 일부 학자들이 맹종하는 식민사관의
수치스러운 뿌리는
미국이 만든 흉악한 논리에서 시작되었다.
일제 식민지배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무뇌아적 사관은 그때,
미국이 뿌린 악마의 씨앗에서 잉태된 괴물이다.
독도 또한 그 추악한 계산속에서 흥정거리가 되었다.
동해의 외로운 바위섬은
초안에서는 한국 땅이었다가,
다른 초안에서는 일본 땅이 되었고,
또 다른 초안에서는
아예 이름조차 사라졌다.
조약 협상 과정에서
다섯 차례 초안까지는 독도가
한국의 땅으로 명시되었건만
여섯 번째 초안에서 갑자기
일본 땅으로 했다가
일곱 번째부터는 이름조차 사라졌다.
한국이 항의했다.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했고,
강제동원과 문화재 약탈,
토지 수탈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그러나 미국은 말했다.
“그렇게 되면 조약이 복잡해진다.”
“일본의 재건이 늦어진다.”
“냉전의 전략에 방해가 된다.”
조약 협상 과정에서의 파행이 심화되어도
이승만은 적극 나서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이승만은 불만이 있을 때
미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는 작업을
항상 했다.
정전협정 협상 과정에서도 계속 백악관에
친서를 보냈다.
이승만이 정전협정을 반대하는 친서를
미 대통령에게 계속 보내도
반응이 없자 그는 반공포로를
독자적으로 석방까지 했다.
정전협정의 판을 흔들려 벼랑 끝 외교를 펼쳤다.
미국이 발끈했고 이승만을 제거할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지만
대안 부족이라며 중단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관련해
미 대통령에게
직접 친서를 보낸 기록이 없다.
그는 분단과 북진과 대결에 집중했을 뿐이다.
이승만의 시선은
한반도 내부의 전선에 고정되어 있었고
아시아 전체의 전후 질서를 둘러싼 문제에는
충분히 닿지 못했다
그가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들은
북진통일에 대한 집착을 드러냈지만
전후 동북아 질서의 정의를 묻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이승만은 포화 속에서
오직 '북진통일'의 함성만을 지른 것이다.
이승만의 태도는 일면 통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할 만 했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수도 없다.
그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통해
군사적 주권을
미국에 송두리 채 넘겼기 때문이다.
그가 북진통일을 염원했다면
군 통수권을 확실히 확보하는 식으로
미국과 협상하지 않았을까?
당시 한국군의 수는 60만 명에 육박해
자주국방을 이룰 만한 규모였다.
그런데도 미국에게 점령군의 지위를 보장해
일제의 침략이 물러간 강산이 외세의
군사적 지배를 받게 했다.
왜 그랬을까?
이승만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어
쉽게 말하기 어렵지만
그는 미국의 동북아 전략,
즉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를 만들려는 구상에
침묵으로 협조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의 외교적 감각이 미국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집권유지에 기여할 것으로
판단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오늘날 중러 압박을 위해 활성화된
한미일 군사협력체제는 6.25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이 구상한 것으로
주한미군이 치외법권적 특권을 지니며
그 핵심적 중추역할을 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이는 미국이 한국, 일본과의 안보조약과
일본에 있는 유엔사 후방기지를 하나로 묶는 시스템으로
지난 70 여 년간 미국에 의해
한일간의 감정대립에도 불구하고 유지, 강화되어 왔다.
샌프란시스코 체제는
일본의 책임을 줄이고
피해국의 발언권을 약하게 만들어
일본의 친미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활용되고
이승만은 그런 미국의 속셈에 침묵으로
적극 기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배 기여론과
‘배상액보다 4배’라는 식의 해괴한 논리를 내놓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침략 피해를
가장 오래, 심하게 당한 한국이 침묵해야
다른 일본 피해국들의 입지가 좁아져
일본의 배상 책임을 가볍게 할 수 있는
논리를 연이 내놓은 것이다.
미국이 파렴치한 계산법 등을 앞세워
식민 강탈의 범죄를
정상적 행위처럼 둔갑시키면서
국제법의 언어는 흔들리고
도덕의 기준은 뒤집혔다
빼앗긴 땅의 자산은
강탈자의 정당한 소유가 아니라
폭력의 증거인 것이다
그것을 악마적 계산법으로 환산해
배상의 크기를 깎아내리는 행위는
피해의 본질을 지우는 또 다른 폭력이었다
미국이 자국 이익을 탐해 그렇게 했다.
그 추악한 행위로 동북아 냉전 구도 속
한미일 군사협력 시스템이 발족하고
일제의 식민지배기여론이라는
해괴한 언어로 이어졌다
폭력은 공로로 둔갑했고
침탈은 발전의 조건으로 포장되었다
역사의 어두운 부분이
샌프란시스코 문서 속에서
뒤집히는 죄악이 범해졌다
독도 문제도 그랬다
조약의 초안이 바뀔 때마다
그 섬의 이름은 오락가락했다
한국이었다가 일본이었고
다시 사라졌다
국제문서에서 이름이 빠진다는 것은
단순한 누락이 아니라
그것은 미래의 분쟁을
남겨두는 방식이었다.
독도에 대한 미국의 망발과 무원칙은
대단히 심각하고 무겁다.
미국은 독도로 인한
영토의 분쟁 소지를 남겨두어
한일간의 영토분쟁과 갈등을 구조화했다.
일본은 미국이 주도한 독도 도둑질을
거짓말로 꾸며
교과서에 넣고
일본 청소년에게 가르치고 있다.
한일 미래 세대의 전쟁 불씨를
심어 놓고 부채질하고 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다.
그 뒤에 미국의 더 치밀한 계산이 있다.
향후 한반도 유사시 일본이
독도 영유권 보호를 위해
참전할 국제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미국이 한미일 3각 군사협력 체제를 위해
설계한 전략 구도의 일부라 한다.
거짓말일까, 사실일까?
어느 것이 사실이라 해도
독도 영유권 분쟁의
근본 원인을 제공한 미국의 책임은
영원히 벗을 수 없다.
이 부분에서 또 이승만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강 건너 불 보듯 한 것은
미국의 신냉전 전략이
이 조약을 토대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그런 것일까 하는 의문이 더 짙어지는 것이다.
미국에게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북아 전략은 미국익 추구를 위해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그것을 눈여겨 본 이승만이 미국을
도와주기 위해 거리를 둔 것이란
의혹은 그가 미국과 합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 2,4조에서
더 짙어진다.
미국이 소련과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전략을
주한미군이 비밀리에 수행할 수 있는
길을 터준 것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외국군 주둔의 공식은
대등한 주권국간의 상식적인 관계로
당시 유럽연합 회원국과 미국의 군사관계 등에서
쉽게 확인되는데도
이승만은 미군을 점령군에 흡사한 괴물로 받아드렸다.
이승만이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미동맹의 골격을 만드는 식으로
미국에 몰빵한 의혹에 대한
진위 여부가 더 이상 침묵 속에
방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샌프란시시코 강화조약
조인식이 열리던 날,
미국이 한국에 내민 마지막 배려는
회의 참석의 권한도, 발언의 기회도 없는
'비공식 게스트'의 자격을 준 것이었다.
단지 대표단이 숙소 호텔을 예약하는 데만
도움 되는 미 정부의 조치였다.
그 뼈아픈 모욕 앞에서도
이승만은 여전히 침묵했다.
협상 초기부터 한국은 참여를 요구했지만
그 요구는 번번이 낮춰졌다
처음에는 협의국이, 다음에는 옵서버가 되었다가
마침내 비공식 손님이 되었다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국가가
전범국 일본에 대한 강화조약 회담에서
존재감 없는 손님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국제적 시각으로 보면
그것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역사를 구경꾼으로 전락하거나
강대국 미국에 무한대로
봉사한다는 뜻으로 해석될 뿐이다
미국은 비공식 손님으로 전락한
한국을 대외적으로 가차 없이 짓밟았다.
호텔 예약을 돕는 배려만 주어졌을 뿐
역사적 정의를 위한 좌석은 주어지지 않았다
이승만은 그 과정에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미 백악관 앞에서 난리를 쳐도 모자랄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 그 날
이승만이 분노에 떨었다는 기록조차 없다.
결국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정의는 공식적으로 짓밟히고,
미국의 전략이 승리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전범국가에서
반공 동맹국으로 변신해
동북아의 미군기지가 되어 경제 부흥의 길이 열렸다.
한국의 배상 문제는
피해국들과 개별적으로,
일본과 일대일의 형식으로 해결하라는
말 한마디로
미래로 미뤄졌다.
전범 일본이 갑이 되게 만든
배상 해결 방식으로 초래된 그 미래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이 나올 때마다,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에 제기될 때마다,
독도를 둘러싼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역사는 다시 묻는다.
“그 시작은 어디였는가?”
전후 재일동포 60만 명이 방치된 것도
역사적 범죄의 하나다.
배상 문제를 핑계로
일본은 강화조약 협의 과정에
한국의 참여를 반대했고
미국은 그 논리를 받아들여
한국을 비공식 게스트로 전락시켰다.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미국이 1951년 초 한국의 조약 참가를
과거에 비해 긍정적으로 검토하자
일본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만약 한국이 강화조약 서명국이 된다면
일본 거주 재일동포 60 만 명은
연합국 국민으로 간주되어야 하고
그렇게 되면 일본이 2차 대전 전쟁기간 동안
압류한 재산 등에 대해 배상할 책임을
지게 된다는 이유를 일본이 들고 나온 것이다.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미국 쪽에 전달했고
결국 미 국무부는 재일동포들이
불법행위를 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
일본 정부가 배상의무를 지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으로 입장을 취했다.
1951년 4월 23일 일본 정부는
재일동포가 연합국 국민의
지위를 획득하지 않는 조건이면
한국의 조약 참여에 동의한다고
미국 정부에 통고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그 해 5월 16일
영국 대사와 협의한 뒤
한국의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참여 문제를
백지화하기로 결정했다.
그 이유는
한국이 조약 참여시
조약 체결이 지연될 것이라 했고
미국은 그해 7월 3일 한국 정부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서명국에서
제외하는 것으로 통보했다.
일본 전후 처리에서
미국은 베르사유의 교훈을 외면했다.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게
가혹한 배상을 요구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군국주의를 부추겨
2차 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했다.
미국은 그 교훈을 왜곡하여
일본의 배상 책임을
대폭 약화시키며
개별 피해국들과 협상하도록 방치했다
당초 포츠담의 선언은 이렇지 않았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철저한 배상을 명했고
일제의 산업시설을 한반도로 이전하여
파괴된 경제를 회복시켜야 한다했다.
그러나 세계 1차 대전 독일의 전범들을 처단하던
그 엄숙한 국제법의 서슬이
냉전의 바람 속에서 180도 뒤집혔다.
미국은 베르사유 조약의 가혹한 보복이
독일 군국주의를 깨웠다는
핑계를 대며
일제의 숨통을 틔워준 것이다.
여기에 어느 정도의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
그것은 미국이 일본 항복 직후
일본군의 악마적, 반인륜적인 생체실험 자료를 챙긴
파렴치한 태도에서 그 정체가 드러난다.
미국은 일본 731 부대가
자행한 만행조차
연구 자료를 넘겨받는 조건으로 덮었다.
국가 이익을 앞세운
냉혈한 적인 거래 앞엔
정의도, 인도주의도, 역사적 청산도 존재치 않았다.
한편 미국은
한국의 군사적 현실을 이용했다
전쟁 속에서 한국군은 커졌고
그러나 주권은 그에 비례해 커지지 않았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동맹의 이름을 가졌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군사적 권리를 강화했다
남한의 주둔은 권리로 규정되었다
한국은 스스로를 지키기보다
누군가의 전략 안에 놓인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반공 전진기지화를 위해
한국의 역사적 고통과 손실을 외면했고
오늘날까지 그 잘못을 함구한 채
‘미국은 한국의 은인’이라는 가짜 구호를 외치게 하고 있다.
일본은 미국의 뒷배를 믿고
전범국가의 부끄러움조차 버린 채
독도 문제와 강제징용 배상을 외면하며
뻔뻔스러운 태도를 굳히고 있다.
미국은 일본을 살렸고
일본은 다시 강해졌으며
한국은 대가를 치르고 있다
독도는 그 상징이,
강제징용은 그 증거가 되었고
식민지배의 책임 문제는 방치되었다
샌프란시스코는
평화의 도시로 남았으나
그 평화의 문서 속에는
가장 오래 고통 받은 자들의 자리가 비어 있다
그 빈자리는
아직도 세계의 한쪽에서
역사를 향해 묻고 있다
누가 배제했는가
누가 침묵시켰는가
누가 그 침묵 위에 질서를 세웠는가
이제 그 질문은
과거를 향한 탄식이 아니라
현재를 향한 질문이다
정의가 유보된 전후 체제는
결코 완결된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불완전한 질서가 만든 긴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한반도는 분단의 고통 속에 머물러 있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