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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연재 6- 제주4·3, 한라산은 통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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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우

작성일시2026.06.18

조회수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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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해방

일장기가 내려졌다.

그러나 미군이 남한에 들어와서

점령군의 이름으로 말했다.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해방은 다시 점령이 됐다.

제주에도 친일 경찰이 돌아왔다

어제까지 일장기를 달고 조선인을 잡던 자들.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자들.

제 민족의 살을 뜯던 자들.

그들이 돌아왔다.

이번엔 성조기 아래에서.

미군정이 그들을 불렀다.

해방된 조국에서

제주 사람들의 꿈은 다시 짓밟혔다.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이 열렸다.

제주 북초등학교 앞마당.

사람들이 모이면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이 아이를 쳤다.

아이가 피를 흘렸다.

분노한 군중이 경찰서까지 쫓아갔고

경찰은 이를 습격으로 오인하여 발포했다

6명이 죽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찰의 잘못이지만 정당방위였다.”

그들의 결론이 도화선이 되었다.

아이의 울음에서 시작된 것을

경찰서 습격 사건으로 만들었다.

죽인 자가 피해자가 됐다.

맞은 자가 가해자가 됐다.

민심은 들끓었고

남로당은 조직적인 반경활동을 전개했다

전단지 부착, 사상자 구호금 모금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

23개 기관, 105개 학교, 우체국, 전기회사

제주 직장인 95%인 4만여 명이 참여

경찰의 20%도 파업에 동참했다

섬 전체가 울부짖었다.

미군정이 조사단을 파견했다.

카스티어 대령의 보고서: “제주도 인구의 70%가 좌익 동조자”

조병옥 경무부장 발언 : “90%가 좌익 색채”

27만 명의 섬 주민이 탄압의 대상이 됐다.

육지에서 건너온 잔인한

서북청년단과 421명의 응원경찰이

섬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일 년 동안 2천5백 명이 잡혀가

좁은 유치장에서 앉지도 못한 채

생지옥의 고통을 당했다.

대립과 갈등은 더욱 커져갔다

1948년 미국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남한 전역에서 터져 나왔다

그 중심의 하나가 제주도였다

4월 3일 새벽 두 시

한라산 자락 오름마다 핏빛 봉화가

눈부시게 타올랐다.

남로당 제주도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의 무장대

24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급습했다

그들이 외쳤다.

"탄압이면 항쟁이다."

"조국의 통일독립."

"단독선거 반대."

무장대는 경찰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등을 지목해 살해했다

5·10선거를 전후로는 선거 관련자를 집중 공격했다

그 과정에서 가족들까지 학살되는 비극이 일어났다

4월 17일 미군정 딘 군정장관이

경비대 제9연대에 진압작전을 명령했다

“대규모 공격에 앞서 항복을 유도하라”

김익렬 제9연대장이 평화협상을 시도했다

4월 22일 전단지를 살포했다

“친애하는 형제 제위에, 동족상잔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 위해 악수를 원한다.”

4월 28일, 김익렬과 무장대 총책 김달삼이 만나

평화협상이 성사됐다.

72시간 내 전투 중지.

점진적 무장 해제.

주모자 신변 보장.

평화가 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5월 1일, 동족상잔을 멈추자던

사흘간의 평화는 대낮에 오라리 마을이 불타면서 깨져버렸다.

경찰은 “폭도의 소행”이라 주장했으나

김익렬은 현장조사 끝에 진범을 밝혀냈다

우익청년단원들이 민가에 방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미군 방첩대(CIC)는 김익렬의 보고를 묵살했다

CIC는 "폭도의 소행"으로 조작했고,

‘제주도 메이데이’라는 무성 영화를 만들었다

마치 무장대가 저지른 것처럼 편집된 가짜 영화였다

미군은 지상과 상공에서 불타는 오라리 동영상을

‘제주 폭동’의 소재로 악용했다.

5월 5일, 딘 군정장관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 등 군경 수뇌부를 이끌고

제주를 방문해 비밀회의를 열었다.

조병옥은 “계획된 공산폭동”이라며 강경작전 주장.

김익렬은 “경찰의 실책, 무력위압과 선무공작 병행”을 주장하며

조병옥과 몸싸움까지 벌였다

결론은 강경 진압이었다.

5‧10선거가 나흘 앞으로 다가온 5월 6일

김익렬 연대장이 해임됐다.

평화를 말한 자가 쫓겨났다.

학살을 선택한 자들이 남았다.

후임에 박진경 중령이 임명됐다.

미국 정부와 서울의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 등)이

가짜뉴스까지 만들어내며

강경 진압에 목을 맸던 이유는?

냉전을 주도하려는 미국의 조바심이었다.

당시 미국은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르려 했다.

남한단독 정부 추진으로

동북아에서 기선을 제압하려 했다.

남한은 미국의 대소봉쇄를 위한

전진기지로 만들고 싶었다.

소련과의 냉전이 본격화되는 시점에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은 미국 극동 아시아 정책의

성패가 걸린 최대 과제였다.

만약 제주도에서의 저항 때문에

5·10 선거가 실패한다면,

미국은 국제사회에서 체면을 구기게 되고

냉전 주도권을 소련에 빼앗긴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거가 임박하면서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유혈 사태가 남한 전역에서 줄을 이어 발생했다.

좌파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지를 받는

김구, 김규식 등 우익과

중도파 민족주의자들까지 선거에 반대했다.

특히 제주도에서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한

무장봉기가 벌어지자 미국 정부는 크게 긴장했다.

미국은 제주4·3에 대해 소련 공산당의 사주라며

가짜뉴스를 앞세웠다

“소련 잠수함이 제주 연안에 출몰했다.”

남한 언론과 외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언론은 제주도 토벌의 당위성을

부채질하는 도구가 되었다.

서울의 미군정이 제주도를 '소련의 전초기지'로

둔갑시킨 가짜뉴스들은

제주도민들을 '잔혹한 빨갱이'나

'소련의 사주를 받은 폭도'로 묘사했고,

군경의 잔인한 초토화 작전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정의로운 진압으로 미화했다.

이 조작극은 제주도의 참상을 외면하고,

증오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3만 명에 달하는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군경과 서북청년단의 초토화 작전에

잔인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불쏘시개가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가 전국의 200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실시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는 북제주군 갑구와 을구는

주민들이 조직적으로 선거를 외면해

투표율이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미군정은 제주도 2개 선거구에 대해

선거무효를 선언하며 재선거를 명령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되지 않자

재선거마저 무기한 연기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서 5‧10선거가 무산되자

미군 제6사단 제20연대 연대장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미군사령관으로 파견했다.

모든 작전을 지휘·통솔하게 된

브라운은 호언장담했다.

“원인에는 흥미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 뿐 2주일이면 평정된다.”

그는 초강력 작전을 지시했다

“경찰은 해안 4km까지 치안 확보하라.

경비대는 서쪽부터 동쪽까지

빗자루로 쓸 듯 휩쓸어버려라.

해안경비대는 해안을 봉쇄하라.”

작전이 시작돼 6주 동안 4천 명이 체포됐다.

미군 보고서는 성공적 작전이라 평가하면서

제주에 부임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박진경 연대장을 대령으로 특진시켰다.

그러나 1948년 6월 18일 새벽

박진경 연대장이 진급 축하연을 마치고

잠을 자던 중 부하의 총에 맞아 피살되었다.

이후 제주도의 비극은 멈추기는커녕

더욱 깊은 광기와 초토화가 자행되었다.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여수 14연대가 제주 출동 명령을 받자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고

선언하고 반기를 들었다.

이 항쟁마저 미군 고문단의 지휘 아래

장갑차와 박격포, 항공기의 포화 속에 진압되고

3천4백 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된 뒤

10월 17일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정부의 최고 지령'을 받들어

제주도에 포고령을 내렸다.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외의 지점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폭도로 인정해 총살하겠다."

11월 17일 계엄령 선포 뒤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되었다

주민들은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올라갔다.

눈 쌓인 겨울 한라산으로.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무장대에게

협조한다는 이유로

대대적인 학살극의 대상이 되었다

미군 비밀보고서는 기록했다

“제9연대가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1948년 12월까지 제9연대 점령 기간 동안

섬 주민에 대한 대부분의 살상이 발생했다.”

마을 수백 개가 한꺼번에 불타 연기가 하늘을 가렸고,

할아버지와 손자, 어머니와 젖먹이가

한자리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서귀포경찰서장 김호겸은

제주도민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자들에 대해 증언했다.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은 무고한

주민들을 죽인 후 보고서에

현장 답사 차 갔는데 도주, 정지명령 불응,

불가피하게 발사, 명중, 사망이라고 썼다.”

“서청 출신의 삼양지서 주임은 입버릇처럼

“하루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했다.”

“제9연대 정보과장은 마약 중독자였다.”

토벌대의 총구를 피해 눈 덮인

한라산 깊은 숲으로 도망친 도민들,

늙은 시부모의 손을 잡고

어린 자식을 품에 안은 부인들은

살을 에는 추위와 굶주림 속에 얼어 죽고

굶어 죽어 한라산의 하얀 눈을 붉게 물들였다.

일본군 준위 출신 함병선이 이끄는

제2연대와 서북청년회로만 구성된 대대 병력은

무기 소지 여부를 가리지 않고

눈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사살하는

가혹한 사냥을 멈추지 않았다.

1948영 11월 15일 가시리

군인들이 마구 총을 쏜 뒤 소개령을 내리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표선리 표선국민학교에 수용해

‘도피자 가족’ 76명을 한 달 뒤 버들못에서 학살했다.

12월 18일 다랑쉬마을 근처에서

제9연대 제2대대가

피난민과 그들의 은신처인 작은 굴을 발견했다

군인들은 굴 밖에 있던 사람들을 총살한 후

굴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오라고 외쳤다

굴속으로 수류탄을 던져도 사람들이 나오지 않자

밖에서 불을 피워 질식시켰다

희생자 11명 중에는 50대 여성도 있었고

아홉 살 난 어린이도 있었다.

1992년, 제주4·3연구소와 제민일보 취재반이

다랑쉬굴을 발견하고 현장조사해

언론 보도 이후 유족과 도민들이 건의했다.

“양지바른 곳에 안장하자.”

그러나 행정·정보기관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해

유해는 1992년 5월 15일

불에 태워져 바다에 뿌려졌다

다랑쉬굴은 시멘트로 봉쇄되었고

주변에는 철조망이 쳐졌다

1949년 1월 북촌리에서

군인 2명이 무장대 기습으로 사망하자

대대 병력이 출동해 마을을 불 지르고

주민들을 무차별 학살했다.

이틀 동안 300명 이상 희생돼

젊은 남자가 대부분 사라졌다.

한동안 북촌리는 ‘무남촌’이라 불렸다.

3월, 유재흥 대령 제주도지구전투사령관 부임해

소위 ‘선무공작’을 폈다

“산에서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를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

흰 옷을 매단 백기를 들고

1만여 명의 피난민이 한라산에서 내려왔다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유재흥이 제주를 떠난 후

제2연대장 함병선은 하산민들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법의 최소한의 절차도 없는 불법적인 군법회의는

젊은 남자들은 사형·무기·15년형 등 중형,

여성들도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유죄,

결국 1,660명의 주민이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거나

전국 각지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1950년 8월 20일

모슬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 194명이

군인들에 의해 섯알오름에서 집단 학살당했다

희생자 중 한림지역 62명의 시신은

유족들에 의해 1956년 3월 몰래 수습되어

한림면 ‘만벵디 공동장지’에 묻혔다

나머지 132명의 시신은

1956년 5월 유족들의 청원을 당국이 받아들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곳에 세워진 위령비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之地)’

백 명의 할아버지에게 한 명의 손자뿐이라는 뜻

그러나 5·16 이후 위령비는 파괴되었다

학살 현장에서는 총기류, 실탄, 뼛조각이 발굴되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승만 정권은 전국의 좌익세력에 대한

예비검속을 지시했다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예비검속법’은 해방 후인 1945년 10월 9일

미군정법령 제11호로 폐지되었지만

정부는 이를 불법적으로 부활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지시했다.

“예비검속을 공표하지 말라.”

붙잡힌 사람들은 각자 안보에 미치는 위해 요인에 따라

A, B, C, D 등급으로 분류되고

8월 30일, 한국 해군 정보장교는

제주 경찰에 전문을 보냈다

“9월 6일 이전에 C, D 그룹을 전원 총살하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들은 바다에 수장되거나

제주비행장에서 총살되어 암매장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서귀포·성산포경찰서의 예비검속자들은

어디서 희생되었는지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

두 차례 불법적인 군법회의로 전국 각지 형무소에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1950년 7월경 집단 학살당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전세가 역전될 때까지

학살극은 멈추지 않았다

제주4·3은 1954년 9월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마지막 무장대원 체포, 한라산 입산금지 해제

공식적인 전체 사망자 14,032명

진압군에 의한 희생자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 1,764명

이것은 공식 숫자다.

실제는 더 많다고 역사는 말한다.

제주 인구 27만 중 3만이 희생됐다.

어떤 이름은 기록됐다.

어떤 이름은 바다에 뿌려졌다.

어떤 이름은 섯알오름 흙 속에 묻혔다.

어떤 이름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진실은 갇혔다

미군은 학살 현장을 기록했지만

“관여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이승만 정권 이후 50년간

제주도민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들의 고통은 짓눌린 채 견뎌야만 했다

외부 세계의 어느 누구도

미국이 주도한 테러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변호하려 하지 않았다

이 비극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관심조차 없었다

대량 학살 책임자를 가려내려 하지 않았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물론

시민권 회복 노력, 거짓 주장으로

피해자를 욕되게 만든 허물을 벗겨주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2000년, 제주4·3특별법 제정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 출범

그제야 진실규명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2018년, 제주4·3 70주년

10만인 서명 운동

“미국은 책임을 인정하고 사과하라”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 서 외쳤다.

그들의 요구

첫째, 미국은 제주4·3학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사과하라

둘째,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법적·정치적·도덕적 책임을 규명하기 위한

조사에 착수하라

셋째, 진상조사를 바탕으로

책임에 상응하는 피해회복 조치를 시행하라

이미 수많은 자료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제주 학살은 미군정 시절,

미군이 진압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이승만 정부 수립후도 역시 미군이 지휘했다.

1948년 8월 24일, 이승만과 하지 사령관 사이에

한미군사안전잠정협정 체결되어

임시군사고문단 설치되고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군에게 있었다.

미군사고문단의 임무는 무엇 이었는가.

대한군사원조 집행, 미군장비 및 무기 이양과

한국군 편성 및 훈련지도

그뿐 아니라 한국치안대(육군·해안경비대·경찰)

조직, 관리, 무장, 훈련

38도선 방어, 불순세력 제거와 게릴라 침투방지,

해안질서 유지 자문.

국가기록원이 확인했다.

“미군사고문단이 제주4·3 학살을 진두지휘했다”

제주4·3학살 책임을 공식적으로 가리는 작업,

그 심판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최근 일각에서 이승만 기념관을 만들자고 나오는 모습

친일파를 옹호하고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미군을 점령군에 준하는 특권을 준 독재자에게

기념관을 세우려는 그들

그것은 대단히 역겨운 일이다

제주의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미국은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 정부도 완전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하에서 친일의 죄를 묻자는 외침은

“빨갱이”라는 낙인 아래 짓밟혔다.

민족정기를 세우려는 사람들은 끌려갔고,

해방의 꿈을 말하던 청년들은 총살되었으며,

정의와 통일을 말하던 목소리는 침묵 당했다.

친일은 친미로 옷을 갈아입었다.

그들은 일제를 섬기던 모습 그대로

새로운 상전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자신들의 권력과 안위를 위해

동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었다.

세월이 흐르자

폐허 위에 세워진 경제성장의

빌딩들을 가리키며 노래한다.

“모든 것이 미국 덕분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미국을

상전으로 모시겠다 다짐한다.

번영의 그림자 아래에는

이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시민들의 신음이 묻혀 있었다.

제주 한라산의 검은 숲에서는

아직도 울음이 그치지 않는다.

일본이 물러가고 미국으로 이어지는

예속의 사슬을 끊지 못한 통한의 70여 년,

독립운동가의 무덤 위에

독재자의 기념관을 세우려는 역겨운 몸부림이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고개를 드는

비극의 나라가 되었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친일에서 친미로 이어진 세력이

여전히 역사를 지배하는 한.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살아있는 한.

미국의 비밀문서가 여전히 봉인되는 한.

3만의 이름이

모두 불릴 때까지.

미국이

"우리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한라산이 울음을 멈출 때까지.

제주 4.3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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