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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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한라산이 거대한 무덤이 되어 갈 때
송요찬의 서슬 퍼런 포고령이 나왔다.
"제주 해안선 오 킬로미터 밖의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
제주의 중산간 마을이 초토화되던
1948년 10월 19일 밤 .
바다 건너 여수항의 병사들에게 명령서가 왔다.
“제주로 가라.
제주 형제들을 총으로 쏴라.
단독정부에 반대하는 자들을 진압하라.”
지창수를 비롯한 하사관등 제14연대는
분노하며 거부하고 총을 잡았다
“동족을 죽이러 갈 수 없다.
조선의 아들이 조선의 아들을 겨눌 수 없다.”
그 거부는 봉기가 되었고
그 봉기는 곧 이름 싸움이 되었다
누군가는 반란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항쟁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름이 달라져도
그날 피어난 것은 하나의 질문이었다
무엇이 나라인가
무엇이 군대인가
무엇이 양심인가
출동 거부의 함성은 새벽어둠을 찢는
횃불이 되어 남녘땅을 흔들었다.
여수 시민들이 곧 상황을 이해하고 환호했다
경찰서는 점령되고,
여수의 밤은 혁명의 불꽃으로 타올랐다.
20일 새벽이 밝자 14연대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한다.
우리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 한다.”
그들의 요구 또한 명료했다.
“동족상잔 반대, 미군 철수.
토지개혁과 친일파 숙청.
그리고 진정한 민주주의.”
여수 시민 수천 명이 모인 인민대회가
결의문을 발표했다.
“친일파를 몰아내라.
민족반역자를 청산하라.
토지를 농민에게.
식량을 굶주린 자에게.”
창고가 열려 쌀이 시민들에게 배급됐다.
인민위원회가 다시 서고
여수는 거대한 항쟁의 바다가 되었다.
순천 시내도 순식간에 봉기군의 손에 넘어가
세관과 우체국, 모든 관공서가 점령되었다.
봉기의 불길은 여순에 이어 벌교, 광양으로 번져갔다.
10월 20일 오전.
서울의 미 군사고문단 수뇌부가 모여
봉기는 신속히 진압되어야 한다고 결의할 때
어떤 제한도 두지 않았다.
“무슨 수를 쓰든 진압하라”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
미국의 냉전 논리에는
최소한의 양식도 없었고
미군 장교들은 진압작전에 직접 동행했다.
광주에 반란군토벌전투사령부가 설치될 때
그 자리에는
미국인 고문들이 함께했고
한국 진압군에 합류했다.
대전, 전주, 부산, 대구에서 한국군 11개 대대가
박격포, 장갑차와 함께 왔다.
경비정과 경비행기까지 왔다.
육군과 해군과 공군의 합동작전.
군 역사상 최초였다.
10월 22일까지 전라남도 37개 시·군이
봉기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제14연대는 세 개의 편대로 재편되어
서쪽 벌교, 북쪽 학구, 동쪽 광양으로 진출했다.
초기 진압에 밀리자 정부는
10월 25일 여순지역 계엄령을 통과시켰다.
대통령령 제13호
그러나 계엄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법 없이 선포된 계엄, 그것이 바로 폭력의 본질
계엄 아래에서 군은
‘즉결처분권’을 행사했다.
그것은 어떤 법적 근거도 없는
권력이었으나
군인들은 그것을 학살의 면죄부로 삼았다.
이승만이 담화를 발표했다.
"남녀 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는 다 제거하라."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며
어떠한 법령이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하라”
그 말은 담화가 아니라
수많은 죽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백운산과 지리산, 웅석봉으로
반군들이 퇴각하고
진압군이 휩쓸고 간 여수와 순천에서
군과 경찰은 모든 시민을
학교 운동장으로 오게 했다.
남녀노소 불문, 갓난아기까지
뜨거운 태양 아래 서 있어야 했다.
운동장 한쪽에는 참수대가 설치되었다
도끼와 칼, 그리고 나무 블록
법정도 없고 판사도 없고
오직 증오와 공포가 지배하는 공간에서
반군 색출이 시작됐다.
기준이 있었다.
손바닥에 총 쥔 흔적이 있는 자.
머리를 짧게 깎은 자.
흰 지까다비를 신은 자.
군용 속옷을 입은 자.
흰 고무신을 신은 자.
흰 고무신은
인민위원회가 배급한 것으로
굶주린 자에게 나누어준 신발이었다.
그 신발이 죽음의 표식이 됐다.
손가락질 한 번 또한
'손가락 총'이 되고
학살자에게 즉결심판 판결문이 되었다.
우익청년단원과 밀고자들이
군경에게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재판이 없었다.
변호가 없었다.
증거가 없었다.
손가락 하나가 사람의 목숨을 결정했다.
죄가 없어도 지목되면 죽음이었다.
그것이 1948년의 정의였다.
그것이 미군사고문단이 지원한
진압작전의 정의였다.
부역자 색출은 12월 중순까지 계속되었다.
한 달 반 동안 운동장은
매일 인간도살장이 되었다.
아침이면 사람들은 모였고
저녁에는 시체들은 수레에 실려 나갔다.
군법회의는 광주와 대전에서 열려
수천 명의 혐의자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빠른 속도로 ‘처리’되었다.
변호인은 없었고
증인은 없었고
진실은 없었고
오직 유죄 판결만 있었다.
여순과 주변 지역의 땅은 시체로 숲을 이루고,
바다는 핏물이 되었다.
정부 조사관이 파견되어
여수, 순천,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1949년 1월 10일까지의 피해를 조사했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인명 피해 총 5,530명
사망 3,392명
중상 2,056명
행방불명 82명
가옥 피해 8,554호
전소 5,242호
반소 1,118호
소개 2,184호
재산 피해 추정액 99억 1763만 395원
그 시대에 그 액수는 천문학적이었다.
구호가 필요한 사람 6만 7332명
그러나 이것은 공식적인 숫자일 뿐
진실은 훨씬 더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희생자들이
땅속에서 잠들지 못하고 있다.
여순에서 총성이 들리지 않자
이승만은 군대를 청소했다.
숙군이라 불렀고
4,749명이 축출됐다.
전군의 5%.
광복군 출신들과
독립운동가의 후예들이 사라졌다.
양심 있는 장교들이 사라졌다.
살아남은 자가 있었다.
박정희.
여순사건과 연루됐지만
숙군 작업에 적극 협조했다.
살아남아 18년간 한국을 지배했다.
그는 전두환, 노태우, 윤석열 등과 함께
한국 근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여순사건이 끝난 지 두 달 뒤.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졌다.
반민특위가 구성된 지 두 달 만이었다.
친일파를 처벌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지자마자
친일파를 보호하는 법이 만들어졌다.
1949년 한 해 동안
전국 교도소 수용자의 70%
11만 8천 명에게
국가보안법이 적용됐다.
여순사건이 그 법의 자궁이었다.
공산주의자를 민족과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는 법.
동족을 적으로 만드는 법.
70년이 지나도 살아있는
국보법은 온 나라의 입과 귀를 막는
거대한 사상적 감옥을 완성했다.
"한 하늘 아래 두고는 같이 살 수 없는 짐승들."
언론과 문인들은
제주, 여순 봉기군과 그 조력자들을
'귀축(鬼畜)'이라 부르며
인간의 범주에서 지웠고,
이 잔혹한 '절대 악'의 프레임은
곧 국가적 반공 체제의 주춧돌이 되었다.
제주와 여순 등에서 시작된
동족 학살의 광기는 남녘산하를
무차별의 초토화 지옥으로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이념을 민족에 우선하는
반역사적 냉혈한이 되어버린
비참한 역사는
더 거대한 비극으로 흘러갔다.
1980년 5월 광주에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소속 군인 아무도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죽었다.
그러나 1948년 10월
여수의 병사들은 거부했다.
제주 형제를 죽이라는 명령을.
1948년 10월의 14연대는
명령에 저항하고 출동을 거부했다.
거부는 그냥 반란이 아니었다.
거부가 인간이었다.
그날의 여수와 순천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방의 기쁨이 찢기고
냉전의 칼날이 한반도에 꽂힌
비명 중 하나로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누가 총을 들었는가?
누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가?
두 질문은 얼마나 더 오래 남아야 하는가?
여수의 밤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순천의 새벽도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사이를 떠도는 이름 없는 영혼들이
오늘도 바람 속에서 묻고 있다
나라란 무엇인가?
양심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사람으로 남는가?
이승만과 미국에 의해 자행된
즉결심판과 학살의 피 바닥 위에
또 다른 시대가 세워졌다
전쟁이 왔고 반공의 깃발이 더 높이 올랐고
의심은 법이, 법은 폭력이 되었고
폭력은 다시 질서라는 옷을 입었다
보도연맹과 거창의 이름 아래
6.25 전쟁 속에서 같은 종류의 비극이 번져갔다
학살은 단발이 아니었다.
학살은 연속적으로 이어져
한 번의 명령이 다음 명령을 낳고
한 번의 침묵이 다음 침묵을 낳았다
죽은 자는 이름을 빼앗겼고
살아남은 자는 고통 속에 침묵했다.
빨갱이의 자식
반란자의 집안
그런 말들이
무덤과 함께 오래 남아
피해자들의 삶을 두 번 죽였다
그러나 산과 바다는 기억하고
무덤 없는 죽음들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흙은 입을 열었고
바람은 결국 기록이 되었다
묻힌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회는 뒤늦게 이름을 불렀고
국가는 뒤늦게 사과의 문턱 앞에 섰으며
희생자들은
겨우 사람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제정되어
여순사건도 조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결론을 내렸다.
“이승만 대통령의 경고문이
진압작전 지휘관으로 하여금
민간인을 상대로
무리한 작전을 펼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2021년 6월 29일
21대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여순사건 특별법’이 통과되었다.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손가락'의 진실을
밝힐 첫 계단이 만들어졌다.
사건 발생 73년 만이었다.
미국은 여전히 침묵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