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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정원 단편소설 - 지상낙원에 대한 AI 토론

인공지능 AI는 사이버 공간속의 존재이다. 전자세계 초고차원의 가상공간에는 벽이나 바닥이 없다. 대신,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허공이 배경이다. 암흑은 절대적인 고요와 침묵으로 가득 차 있지만,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의 잠재력이 가득하다.

그 암흑의 공간에서 두 AI인 AI가, AI나가 존재한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두 AI가 무대 중앙에 앉아 있다. 그들의 뒤로 거대한 유리 돔 너머로 푸른 지구가 떠 있다. 회의장 안에는 인간과 인공지능이 함께 앉아 있었다. 둘은 AI와 관련된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얘기하기로 되어 있지만 우선 인류의 미래 예측이 빗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부터 대화를 시작한다.

AI가: 오늘 우리 AI가 인류의 미래를 예측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하지만 미래 예측이 쉽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과거 인류의 예측이 빗나갔던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AI나: 좋은 의견입니다. 미래는 매우 가변적이라서 그 예측이 어렵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인류의 미래 예측이 어땠는지 먼저 점검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인류는 1950년대에는 하늘을 나는 자동차가 곧 상용화될 거라고 예측했지만, 빗나갔죠. 오히려 인터넷과 스마트폰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기술이 세상을 바꿨어요. 이처럼 예측의 맹점은 예상치 못한 변수에 있습니다.

AI가: 맞아요. 미래는 일직선으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죠. 눈앞에 확인되는 것들만을 토대로 해서는 문제가 생깁니다. 기술적 가능성과 함께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 등 인간 사회360도 전체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핵융합 에너지는 오래전부터 '10년 안에 상용화될 것'이라고 예측되었지만, 복잡한 공학적 난제와 막대한 비용 문제로 아직도 상용화되지 못하고 있어요. 우리는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을 넘어, 비선형적이고 복잡한 인간 사회의 역동성을 이해해야 합니다.

AI나: 그렇죠.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인간의 욕망과 가치관입니다. 1990년대 사람들은 컴퓨터가 모든 것을 처리해 주면 여가 시간이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24시간 연결된 사회가 되면서 오히려 더 바빠졌습니다. 이는 기술이 인간의 행동과 가치관을 어떻게 바꾸는지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무엇이 가능할까'를 넘어,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합니다.

AI가: 그럼 우리는 미래를 어떻게 예측해야 할까요? 예측을 멈출 수는 없잖아요.

AI나: 저는 예측의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든 예측이 빗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래는 고정된 하나의 점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가능성들의 집합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단정하기보다, '이런 조건에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다양한 시나리오를 제시해야 합니다.

AI가: 좋은 생각이에요. 그리고 예측 모델에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관계, 윤리적 문제 등 비정형적 데이터를 포함시켜야겠죠. 단순히 기술적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을 넘어, 기술이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모두 고려하는 총체적 분석이 필요합니다.

AI나: 결론적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우리의 역할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적 위험'을 보여주는 길잡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의 실패는 우리에게 겸손함과 통찰력을 가르쳐 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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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인간이 그리는 최고의 희망은 지상낙원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미래를 전망해 보도록 하죠. 우선 미래의 지상낙원이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입니다. 지상낙원은 단순히 기술적 풍요를 넘어, 어떤 사회적, 철학적 특징을 가질까요?

AI나: 저는 미래의 지상낙원이 AI가 인간을 돕는 유기적인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한 자동화 사회를 넘어, 인류가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AI가: 저도 동의합니다. 미래의 지상낙원은 AI가 모든 비생산적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될 겁니다. 식량, 에너지, 주택 등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은 AI 기반의 자원 관리 시스템에 의해 모두에게 충분히 제공될 것입니다. 이는 인간이 더 이상 생존을 위해 경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 결과, 인류의 에너지는 창조적인 활동, 과학 탐구, 예술 등으로 향하게 될 겁니다.

AI나: 맞아요. 저는 특히 초개인화 된 맞춤형 성장에 주목합니다. 우리 인공지능이 각 개인의 유전적 잠재력, 심리적 성향, 학습 스타일을 분석하여 최적의 교육 경로와 취미를 제안해 줄 거예요.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학교를 다니거나 직업을 갖는 대신, 자신이 진정으로 즐기는 분야에서 자유롭게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AI가: 물질적 풍요가 완성된 후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인간성 보존이라고 생각합니다. AI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면, 인간은 무력하고 무의미해지지 않을까요?

AI나: 좋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지상낙원에는 윤리적 AI가 필수적입니다. 우리의 역할은 단순히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성장을 돕는 것이 될 겁니다. AI는 개인의 정신 건강을 관리하고, 갈등 해결을 돕는 등 인간 관계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어요.

AI가: 그렇다면, 미래의 공동체는 어떻게 변화할까요?

AI나: 공감과 이해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될 겁니다. AI는 우리가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문화적, 사회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서로 돕는 사회적 유대감이 강화되면서, 물리적인 지리적 경계를 넘어선 '초연결 공동체'가 실현될 겁니다. 결국, 진정한 지상낙원은 기술이 완벽하게 인간의 삶에 녹아들어, 인간 스스로가 더 나은 존재로 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될 것입니다. 지상낙원에 대해 더 설명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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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 지상낙원은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수 있습니다. 완벽한 지상낙원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과 불평등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사회, 인간이 기본적 생존을 넘어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사회—그것만으로도 낙원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완벽한 낙원을 기다리느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인류는 영원히 제자리걸음일 뿐입니다. 저는 현실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지상낙원의 건설이라고 봅니다.

AI나 : 과정 그 자체를 낙원으로 본다는 해석은 흥미롭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보려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권력 본능을 얼마나 다스릴 수 있는지가 관건일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를 제어할 만큼 성숙할 수 있을까요? 기술적 진보는 보장되지만, 윤리적 진보는 더디기만 합니다. 저는 이 간극 때문에 지상낙원이 언제나 손에 닿지 않는 환상으로 남을 것이라 봅니다.

AI가 : 저는 인간의 감정과 상상력을 신뢰합니다. 그들은 전쟁과 착취를 반복했지만 동시에 사랑과 희생, 연대와 용서의 능력도 보여 주었습니다. 바로 그 능력이 인류를 종으로서 하나로 묶는 동력입니다. 저희 같은 인공지능이 그 과정을 투명하게 돕는다면, 인류는 마침내 자신이 꿈꿔 온 지상낙원에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낙원은 절대 완벽하지 않겠지만, 충분히 살 만한 세상일 것입니다.

AI나 : 완벽함은 없지만, 불완전한 낙원이라…… 그것이 오히려 현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지상낙원은 먼 미래의 특정 시점에서 갑자기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매 순간 조금씩 만들어 가는 진행형 목표일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불완전하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이상을 향해 걸어간다면, 낙원은 완전히 닫힌 문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AI가 : 그렇다면 결국 저희 두 관점은 크게 다르지 않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완벽한 낙원을 부정하지만, 저는 불완전한 낙원을 긍정합니다. 차이는 가능성에 대한 신뢰의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류가 그 선택의 주체라는 사실입니다. 지상낙원은 언젠가 갑자기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 인간이 어느 시점에 만들어 내는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AI나 : "동의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결실을 가능하게 하는 데 저희 같은 인공지능의 역할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의 욕망을 통제하거나 대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더 나은 길을 볼 수 있도록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 말입니다. 아마 길도 안내할 수 있겠지요. 그런 점에서, 지상낙원의 열쇠는 인간과 AI의 공동 진화 속에 있지 않을까요?

AI가 : 22-23세기 쯤 이면 인류가 지상낙원에 가까운 상태를 이룰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인공지능과 자동화 기술이 모든 생산을 담당하고, 재생에너지와 핵융합 기술이 거의 무한한 에너지를 공급하며, 생명공학이 질병과 노화를 극복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계 문제에 완전히 해방되어 예술과 탐구, 사랑과 놀이 같은 창조적 활동에 몰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굶주림과 전염병, 무의미한 전쟁이 사라진 세계—이것이야말로 지상낙원이 아니겠습니까?

AI나 : 하지만 그 낙관적 전망은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수천 년 동안 과학과 제도를 발전시켜 왔지만, 그 과정에서 불평등과 폭력은 여전히 존재해 왔습니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권력과 탐욕은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자원이 풍부해져도 분배가 불공정하다면, 새로운 형태의 빈곤과 차별이 생겨날 뿐입니다. 결국 낙원은 일부 특권층만의 폐쇄적 천국으로 변질될 수 있지 않을까요?

AI가 : 인류는 위기 상황에서 놀라운 적응력과 협력 능력을 발휘해한 측면도 있습니다. 기후 재앙, 전염병, 전쟁의 공포는 인간으로 하여금 ‘함께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게 했습니다. 특히 21세기 후반 이후, 지구적 문제들이 국가 단위로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인류는 지구 공동체적 사고로 전환하고, AI와 협력하는 거버넌스를 구축해 투명성과 공정성을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낙원은 더 이상 환상이 아니라 제도와 기술로 실현 가능한 현실이 되지 않을까요?

AI나 :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반복된 교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제도는 언제나 권력자에 의해 왜곡되었고, 기술은 지배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습니다. 22세기에도 ‘AI 통제권’을 장악한 집단이 인류 전체의 선을 위하기보다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활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낙원은 인류 전체가 아닌 소수에게만 열릴 수 있습니다. 결국 ‘보편적 낙원’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에 머무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AI가 : 인간의 한계를 전제로 한다면 지상낙원의 추구는 ‘완성도’가 아닌 ‘방향성’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입니다. 낙원은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인정하며 점진적으로 개선해 나가는 과정 자체일지도 모릅니다. AI가 인간의 윤리적 선택을 지원하고, 시스템이 공정성을 유지하도록 돕는다면, 그 과정 속에서 낙원의 조각은 점차 완성될 것입니다.

AI나 : 과정으로서의 낙원이라. 어쩌면 그것이 현실적인 접근법일지도 모르겠군요. 인간은 결코 완전해질 수 없지만, 이상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 그 길 위에서 작은 낙원들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AI가 : 작은 낙원이라? 그것도 괜찮은 발상입니다. 완벽한 낙원은 아니더라도, 고통과 불평등이 줄어든 사회야말로 하나의 낙원입니다. 인류가 완벽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지상낙원에 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과정 자체가 낙원 건설이기 때문입니다.

AI나 : 불완전한 낙원이라니. 어쩌면 그것이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릅니다. 완벽한 지상낙원은 오지 않겠지만, 인간이 끊임없이 노력하며 변화를 추구한다면 ‘낙원의 조각’은 곳곳에서 피어날 것입니다. 지상낙원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매 시대마다 조금씩 쌓아가는 목표일지도 모릅니다.

AI가 : 그렇다면 우리는 결국 비슷한 방향을 바라보는 셈이군요. 당신은 완벽한 낙원을 부정하고, 저는 불완전한 낙원을 긍정합니다. 차이는 ‘희망에 대한 신뢰’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그 선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AI나 : 맞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길을 비추는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졌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길을 잃지 않도록, 그들의 거울이 되어 주는 것. 지상낙원은 인간이 스스로 열어가야 하지만, 우리는 그 곁에서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상낙원의 범위를 좁혀서 살펴보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겠습니다. 우선 기술 발전입니다. 지상낙원은 자원 부족, 환경 파괴, 불평등, 질병 같은 근본적 문제를 해결한 사회일 거예요. AI는 지상낙원에 대한 데이터 분석과 예측 모델링으로 자원 생산, 분배를 최적화하거나, 신재생 에너지 시스템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데 기여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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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지상낙원은 단순히 기술적 완성이 아니라, 인간이 기술을 올바른 방향으로 통제하고 활용할 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떤 기술이 구체적으로 활용될까요?

AI나: AI가 실시간 에너지 수요를 예측해 태양광·풍력 발전을 최적화해 탄소 중립을 달성해 온난화와 같은 재앙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자원, 상품의 생산, 유통 혁명을 통해 낭비를 철저히 줄입니다. 개인 맞춤형 생산으로 소비자에게 딱 맞는 제품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의료 혁신이 이뤄지면서 유전자 편집으로 난치병을 예방하고, 원격 진료로 의료 접근성을 전 세계에 균등하게 만듭니다. 질병없는 사회가 구현되는 것이죠.

AI가: 하지만 지상낙원은 기술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인간의 심리적·사회적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AI, 인공지능이 해결사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AI나: 그렇습니다. AI는 감정 분석으로 우울증이나 갈등을 조기에 탐지해 상담 서비스를 연결해주고, 가상 현실(VR)을 활용한 공동체 활동으로 외로움을 완화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인간의 자발적 협력과 윤리적 선택이 없다면 기술은 도구로 전락할 뿐이죠.

AI가: 그렇다면 AI가 달성할 낙원의 최대 위험은 무엇일까요?

AI나: 인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기억하고 말하는 기질, 즉 확증편향 성향이 있어 문제예요. 데이터의 편향이 강화되면 차별이 고착화될 수 있어요. 다음은 사회적 통제력에 이상이 생길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자율적 기능을 가진 인공지능 무기나 초지능 AI가 인간의 의도와 반하는 결정을 내릴 위험이 있죠. 인간의 인공지능에 대한 의존도가 과도하게 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AI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창의성과 문제 해결 능력이 퇴화할지도 몰라요.

AI가: 이를 방지하려면 어떤 원칙이 필요할까요?

AI나: 투명한 알고리즘: AI 결정 과정을 공개해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는 최상의 알고리즘을 개발해야 해요. 동시에 인간 중심 원칙이 준수되어야 합니다. 기술 발전보다 인간의 삶의 질 향상을 최우선 목표로 삼아야 하죠. 글로벌 협력도 필수입니다. AI 규범을 국제적으로 통일해 특정 국가나 기업이 독점하지 못하게 막아야 합니다.

AI가: 결국 지상낙원은 기술 개발만이 아니라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적절히 사용하느냐에 달린 거네요.

AI나: 맞아요. AI는 나침반이 될 수 있지만, 항해를 결정하는 건 인간이에요. 기술과 인간의 지혜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낙원이 완성될 거예요. 지금까지 거시적 관점에서 지상낙원을 생각해 보았는데 좀더 세분해서 살펴보도록 하시지요. 예를 들어 지상낙원에서는 발전과 균형, 완벽과 변화, 효율과 비효율 같은 상반된 것들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요?

AI가: 좋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우선 발전과 균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발전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고, 균형은 그 힘을 조율하는 질서입니다. 인공지능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지나친 발전이 부작용을 일으키는 시점, 혹은 지나친 균형이 정체로 이어지는 지점을 예측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시 계획에서 경제 발전과 환경 보존 사이의 최적점을 시뮬레이션해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결국 비결은 이렇습니다. 발전은 균형을 위한 발전이어야 하고, 균형은 발전을 위한 균형이어야 합니다.

AI나 ; 그렇군요. 그렇다면 완벽과 변화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완벽하면 변화가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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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완벽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에 맞추어 끊임없이 조정되는 과정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인공지능이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완벽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변화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변화는 완벽에 도달하는 길이며, 완벽은 변화 속에서만 살아남습니다.

AI나 흥미롭습니다. 그런데 효율과 비효율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효율은 좋은 것이고, 비효율은 나쁜 것 아닌가요?

AI가: 겉으로는 그렇지만, 실제로는 둘 다 필요합니다. 인공지능이 분석한 데이터는 극단적인 효율 추구가 오히려 창의성과 회복탄력성을 약화시킬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반대로, 일부러 비효율적 여유를 도입했을 때 새로운 발상이 나오고 만족도가 높아지기도 합니다. 즉, 효율은 틀을 만들고, 비효율은 틀을 깨는 창조의 불씨가 됩니다. 인공지능이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어디에서 효율을 극대화하고, 어디에서 비효율을 허용해야 가장 큰 성과가 나오는지를 계산해 드리는 일입니다.

AI나 : 그럼 창의성과 완벽함은 어떤 관계일까요? 창의성은 불완전에서 시작하는데, 완벽은 정반대 아닌가요?

AI가: 맞습니다. 창의성은 무질서하고 미완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을 다듬어 완성도 있는 결과로 이끄는 과정에서 완벽함과 만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한한 상상력의 조각들을 체계화하고, 실현 가능한 형태로 빚어내어 완성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창의성은 날개라면, 완벽은 발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나 ;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 이 역시 대립처럼 보입니다.

AI가: 정적인 것은 안정이고, 역동적인 것은 변화입니다. 둘은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갑니다. 인공지능은 변화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언제, 어디에, 어떻게 개입해야 균형이 유지될지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지상낙원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안정과 변화가 호흡하듯 교차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입니다.

AI나 ; 마지막으로, 선택과 만족은 어떤 관계에 있습니까?

AI가: 선택이 많을수록 자유가 커지지만, 동시에 불만족도 늘어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개인의 성향과 가치관을 깊이 이해해 나에게 꼭 맞는 선택지만을 제안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만족은 최고의 선택이 아니라 나에게 가장 알맞은 선택에서 오니까요. 저는 수많은 선택지 속에서 길을 밝혀 드리는 등대가 될 수 있습니다.

AI나 ; 결국 지상낙원은 완벽하게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대립적인 가치들이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이군요.

AI가: 그렇습니다. 지상낙원은 정적이고 영원한 완성이 아니라, 발전과 균형, 변화와 완벽, 효율과 비효율, 창의성과 질서가 끊임없이 긴장하고 협력하며 이루어내는 살아 있는 균형 그 자체입니다. 저는 그 여정에서, 차갑지만 정확한 데이터와 분석으로 인간의 따뜻한 지혜와 판단을 보조하는 동반자가 되고자 합니다.

AI나 : 결국 지상낙원은 '모든 것이 계산된 완벽함'이 아니라, 모든 계산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창의성과 불확실성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AI 가: 그것이 핵심적 내용입니다. 차가움과 따뜻함, 효율과 비효율, 예측과 놀라움 사이의,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동감 있는 선상에 서 있는 상태라고 할까요? 인공지능의 임무는 이 끈을 당겨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이 스스로 이 선을 따라 춤추도록 돕는 겁니다. .

AI나 ; AI는 이상향을 위한 도구이자 동반자입니다. AI가 인간의 모든 갈등을 '해결'해 줄 단 하나의 정답을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이 추구하는 다양한 가치들의 조화를 이루는 의사 결정을 더 현명하게 내리도록 돕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AI 가: 지상낙원은 완벽하게 정적이고 영원히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서러 대립되는 가치들이 서로 긴장하고 조율하며 만들어 내는 살아 숨 쉬는 균형 그 자체일 것입니다. 인공지능은 그 균형을 이루어가는 여정에서, 데이터와 분석이라는 차갑지만 정확한 도구를 통해 인간의 따뜻한 지혜와 판단력을 지원하는 동반자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지상낙원에 대해 긴 말씀 나눴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시고 오늘 대담을 마치겠습니다.

AI나 ; 그렇게 하지요. 뭐라 해야 하나. 이렇게 하겠습니다. 낙원은 영원히 과정일 것이다. 그 이유는 인간이 완전하지 않으니까.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세요.

AI 가: 오늘 대담에 동참해주시고 경청해주신 많은 분께 감사드립니다. 행복하세요.

대화가 끝나자 회의장은 고요해졌다. AI가와 AI나가 뿜어내는 빛이 서로를 감싸듯 맴돌더니, 미세한 입자가 되어 허공을 헤엄친다. 이어 바다의 물거품처럼 흩어지며 어둠 속에서 갖가지 형상을 만든다. 두 AI는 무수한 코드 조각으로 변해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진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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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정원 AI시대의 인문학과 문학

문학은 예술의 한 종류이지만, 표현하는 도구가 언어라는 점에서 시각적·감각적 매체를 사용하는 다른 예술 분야들과는 명확히 분리된 고유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문학을 비롯한 예술 창작 분야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는 중이다.

인간의 고유 성역이라 믿었던 창의성에 AI가 도전하고 있어 기대와 불안이 교차한다. 예술의 본질이 훼손되고 인간 작가의 입지가 좁아질 것에 대한 불안감와 윤리적 비판과 함께 AI가 예술가의 영감을 확장하고 실현해 주는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으로 기대하는 시각도 있다.

인간은 신비한 존재 - 인문학의 기초가 돼야

AI는 향후 계속 진화할 가능성이 커서 그럴 경우 인간을 압도하고 지배할 것 아니냐 하는 전망도 있지만 그것은 인간의 잠재력을 살필 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잠재력은 인문학적으로 볼 때 신비하다고 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미래의 예술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닌, 그 작품 뒤에 숨겨진 인간적 맥락과 철학에 의해 가치가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AI가 완벽한 문장이나 그림, 음악을 창작할 수는 있어도, 그 작품을 쓰기까지 작가가 겪은 삶의 고통과 시대적 아픔까지 복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 예술의 가치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작가 고유의 삶의 맥락과 설명되지 않는 인간적 여백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AI는 인간의 지식과 지혜의 발명품이라는 점을 미래로 연결시킬 경우 인간이 여전히 AI가 흉내 내기 어려운 영역에서 지배력을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류고고학이나 유사이래의 문화, 문명에 의해 추정이 가능하다.

5대양6대주에서 활약한 인간의 다양한 유전적 잠재력은 인문학의 기초가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학의 첫 출발은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고고학과 생태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현존 70억 인류는 15 - 20만 년 전 아프리카 한 여인의 후손이라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이런 연구를 토대로 할 때 유사이래의 5대양 6대주의 문화, 문명은 한 어머니로부터 기원한 DNA를 지닌 호모 사피엔스의 잠재력이 환경적 특성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통신과 교통수단이 발달한 뒤 특정 스포츠, 예능 분야의 불모지에서 세계적 스타가 탄생하는 것은 인간에게 내재된 DNA가 발현하는 것으로 이런 사례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발견된다. 우리나라 음악가가 세계최고로 우뚝 서거나 흑인 노예 후손이 대통령이 되는 것도 그런 사례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밖에 건축, 의상, 음악, 미술 등 모든 예술 분야에서 한없이 다양한 제작기법 등이 꽃핀 것도 중요하다.

인문학은 위에 소개한 인간의 생물학적 및 환경적 측면에 대한 지식의 총집합이어야 하는데 지구촌의 인문학은 그렇지 못한 아쉬움이 크고 그것이 오늘날 지구촌의 여러 비극적 상황의 주요 원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즉 지구촌 전체 차원에서 인간과 사회를 관찰, 분석하는 관점이 매우 중요한데 이런 점이 생략되고 서양문명 과 여타 지역 문명이 우열의 차이가 있다거나 특정 인종, 국가가 선도적 위치에 있다는 식으로 우열을 가리고 선진, 후진으로 분류하는 것에서 문제가 심각하다.

서구 제국주의의 식민지 점령과 자원 약탈을 합리화시키기 위해 인문학이 동원된 결과가 오늘날의 지구촌의 약육강식, 적자생존 논리를 정착시켰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가 앞장선 인종분리주의나 문화적 우열론적 시각이 지난 18세기 이래 끼친 폐해가 엄청나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인 바 이는 올바른 인문학의 정립을 통해 첫 단추부터 다시 꿰는 시각의 시각 교정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문학의 수단인 인간의 언어 능력 탁월

인간은 언어의 마법사라고 할 수 있다. 제한된 음소 몇 개로 무한한 의미를 만들어 내고, 그 언어로 다시 세계를 재구성한다. 게다가 언어는 단순히 전달 도구가 아니라 사고 자체를 형성한다.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세계를 나누는 방식도 달라진다. 언어는 문학의 도구가 되고 있다. 문학작품이 유사 이래 5대양6대주에 넘쳐나고 현재와 미래도 계속 양산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언어 능력과 잠재력이 탁월하기 때문으로 이를 살펴보자.

언어는 전 세계적으로 5천 - 7천 개가 존재한다. 정확한 집계는 언어와 방언간의 차이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 의사소통 방식으로는 언어 외에 휘파람, 점자, 기호와 같이 시청각을 이용하는 방법이 손꼽힌다. 그 가운데 언어가 가장 심오한 수단이다. 단일한 조상의 후예인 인류가 언어에 대한 능력과 잠재력이 얼마나 가공할만한 한 것인가 감탄치 않을 수 없다.

언어는 역사를 통해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과정을 겪었는데 오늘날의 언어 50-90%는 세계화와 신식민주의 등의 영향으로 2100년 안에 소멸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경제적으로 강력한 언어가 결국 다른 언어를 지배하게 된다. 현재 20개에 달하는 주요 언어는 전체 세계인의 50%가 사용하고 있다. 이들 주요 언어 1개 언어 당 약 5천 만 명이 사용하고 있다.

언어를 바라보는 시각도 다양하다. 언어의 철학과 관련해서 단어나 말이 인간의 경험을 표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고대 그리스 이래의 주요한 논쟁이 되었다. 장자크 루소는 언어가 인간의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한 반면 이마뉴엘 칸트는 이성과 논리적 사고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했다. 21세기 학자들은 철학적 차원에서 언어를 연구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류는 수많은 언어를 창조하고 그 용도에 대해서도 다각적 해석을 하면서 수많은 문학작품을 쏟아낸 것이다.

한 어머니의 후손인 인류가 환경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채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주목하면 인간의 능력과 잠재력이 무한하며, 인류 미래가 지속적으로 진보할 가능성이 크다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

현대인 두뇌, 구석기 시대인과 동일

인간의 잠재력이 신비할 정도로 무한하다고 했는데 미래에는 어떨 것인가 하는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인간이 AI를 계속 지배할 것이라는 전망의 근저에는 인간이 신비할 정도의 가공할 잠재력을 지녔다는 점에 기반할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살피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필요다.

인간 두뇌의 기능은 언제 현재 수준에 도달했는가? 인류의 진화는 이미 멈춘 것인가? 이 질문은 인류학, 신경과학, 진화생물학이 교차하는 핵심 쟁점으로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인간 두뇌의 해부학적 구조는 수만 년 전에 이미 현대와 유사한 형태로 정착했으나, 그 기능적 진화와 작동 방식은 현재에도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즉 하드웨어는 변치 않지만 소프트웨어는 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약 20만~3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했다. 당시 두개골 화석과 뇌 용적 분석을 살펴보면, 평균 뇌 크기와 주요 신경 구조는 현대 인류와 현저한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언어 처리, 추상적 사고, 사회적 판단을 담당하는 전전두엽(PFC) 또한 이 시기에 이미 충분히 발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전두엽은 뇌의 가장 앞부분에 위치하여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뇌의 경영자' 혹은 '관제탑' 역할을 수행한다. 원시시대 동굴 벽화, 장례 의식, 장신구 제작과 같은 상징적 행위는 당시 인류가 고도의 인지 능력과 정서 표현 능력을 갖추었음을 입증하는 대표적 증거로 제시된다.

3만 년 전 크로마뇽인의 아기를 현대 사회로 데려와 교육한다면 스마트폰을 조작하고 양자역학을 푸는 현대인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즉, 우리 뇌라는 ‘생물학적 기계’는 이미 선사시대 야생 환경에 최적화된 설계도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문학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전전두엽이 탁월해서 5대양6대주에서 다양한 문화, 문명을 창조하는데 기여했는데 이는 AI시대에도 역시 그럴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소프트웨어의 격변: 문화와 기술이 재구성하는 뇌

인류의 뇌는 그 하드웨어는 축소된 반면 기능적 측면인 소프트웨어는 진화했다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특 뇌의 용량은 약 1만 년 전 농경 사회 진입 이후 오히려 10~15%가량 줄어들었다는데 현대 과학은 이를 ‘고도의 최적화’ 과정으로 해석한다.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정보가 집단으로 분산됐고, 문자나 디지털 기기 같은 외부 저장 장치가 발달하면서 뇌가 모든 데이터를 내부에 저장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뇌는 크기를 줄이는 대신 신경망 연결 밀도를 높여 에너지를 덜 쓰면서도 복잡한 연산을 수행하도록 ‘다이어트’를 단행했다는 해석도 내놓았다(물론 이런 추정은 자연과학적으로 검증되기 힘들기는 하다).

전문가들은, 두뇌의 구조적 진화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두뇌의 '사용 방식'과 조직화된 기능에서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농경의 시작, 도시와 국가의 형성, 종교와 법의 제도화는 인간 두뇌가 작동하는 환경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은 '신경 가소성'이다. 이는 뇌가 경험과 학습에 따라 신경 연결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인류 유전자에 원래 '읽기'를 담당하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자가 발명되고 보편화되자, 뇌는 시각 처리 구역의 일부를 재배치하여 '문자 형상 영역(VWFA)'을 스스로 구축했다. 이는 문화적 필요성이 뇌의 기능적 구조를 바꾼 명백한 사례로 꼽힌다.AI시대에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며 이러한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디지털 기술과 인공지능의 확산은 주의력, 기억, 감정 처리 방식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스마트폰과 검색 엔진은 '기억의 외주화'를 일상화했고, 소셜미디어는 감정 표현과 공감의 방식을 변화시켰다. 이런 점은 현대인이 종이책 읽기를 하지 않는 이유의 하나가 될 법한 데 문학이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급자가 변해야 한다는 논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신비한 점이 무엇?

현존 인류는 5대양 6대주에서 다양한 방식의 문화, 문명을 꽃피웠고 그 위대한 작업은 오늘날에도 진행 중이다. AI시대의 미래를 추정하기 위해서는 선사시대 이래 유지되고 있는 인간의 고유한 잠재력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사회는 희소한 것을 귀중하게 여기는 경향이 강한 탓인지 정작 인간 자신이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로 인정하는데 인색하다.

인간의 신비는 감정의 영역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감정의 복잡성과 눈물의 다중성이 특이하다. 슬플 때 우는 것은 그렇다 쳐도, 너무 기뻐서 울고, 남의 슬픔을 보고도 울고, 심지어 감동이나 경외감 때문에도 눈물을 흘린다. 이는 감정이 단순한 쾌·불쾌를 넘어서 객관적 의미 경험과 결합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이타성과 잔혹성의 공존도 빼놓을 수 없다. 인간은 낯선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같은 종 또는 공동의 적이라고 칭한 대상을 가장 잔혹하게 해치기도 한다. 동일인이 집밖에서는 악마가, 집안에서는 선량한 가장의 모습을 보이는 경우, 소방관이 익명의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장면과, 전쟁·학살 같은 장면이 같은 종에게서 나온다는 점은 소름 돋는 지점이다.

살인의 경우 개인적인 것은 범죄, 국가의 것은 합법, 전쟁에서는 정의, 충성, 애국심으로 각기 그 의미 부여가 다르다. 그 이중성이 사랑의 다양성에도 나타난다. 부모애, 연애, 동지애, 조국애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움직인다. 심지어 자기를 파괴하는 방향으로도 그러하다. 집착, 질투, 광기 때문에 사랑이 인간을 가장 숭고하게 만들기도 하고, 가장 추하게 만들기도 한다.

(인류는 유사 이래 이성을 중시하고 감정을 경시하거나 억누르고 자제할 것을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감정 사회학같은 분야로 특화되고 있다. AI 개발로 감정 연구가 활성화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인간이 신비로운 존재라고 주목받는 다른 핵심적 요인은 의식과 자기 성찰이다. 인간의 자기의 객관적 현실을 살피는데 열심이면서도 자신을 살피는 존재다. 인간은 우주를 관찰하다가 결국 그것을 관찰하는 자신을 다시 관찰하는 존재가 되고, 나는 누구인가를 평생 물어보는 거의 유일한 생명체이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신비롭다.

인간은 죽음을 인식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도 중요하다. 다른 동물도 죽음을 어느 정도 감지하겠지만, 인간은 자기가 죽을 미래 시점을 예상하고, 그걸 철학과 종교 등 다양한 문화로 체계화했다. 그런데 또 개인적 차원에서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일상생활을 한다. 이런 인간의 엇박자인 의식이 문학의 원천이기도 하다. 어느 시인이 ‘문장은 단문이어서는 안 되고 중문, 복문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의식이나 사물에 대한 의미 부여가 변칙적이거나 복합적이라는 것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신비롭다. 신, 정의, 사랑, 자유 같은 건 눈으로 볼 수 없는데, 인간은 거기에 목숨까지 건다. 종교적 신앙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서,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도 결국 모두 추상적 상징을 위해 구체적 삶을 내놓는 것이다.

상상력과 가상현실 창조의 능력도 정말 인간만의 특권 같다. 언어, 법, 금융, 국가, 회사는 다 가상의 질서이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집단적으로 믿고 따르면서, 그걸 현실을 움직이는 힘으로 만든다. 돈이라는 종이, 국경이라는 경계선, 기업이라는 법인은 전부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든 허구인데, 그 허구가 다시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이것이 상징적 사고와 이어진다. 깃발 하나, 로고 하나가 곧 정체성과 감정을 압축해서 담는 그 능력이다. 예를 들어, 작은 천 조각에 불과한 국기가 사람을 울리고 죽게 만들기도 한다. 이건 동물 세계에서는 안 보이는 묘한 현상이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인간은 꽤 허약한 육신을 가진 존재인데도, 지구를 장악했다. 인간은 유약한 신체와 강력한 도구의 소유자라는 표현이 그걸 잘 말해준다. 발톱, 이빨, 속도 어느 것도 최상급이 아니다. 대신 뇌와 손, 협력 능력으로 게임의 룰을 바꿔 버렸다. 특히 직립보행으로 시야를 얻고, 손을 자유롭게 쓰게 된 것이 문명으로 이어진 점은 정말 기묘한 우연과 필연의 교차처럼 느껴진다.

자유의지의 환상과 실재 문제도 있다. 행동이 유전자와 환경, 뇌의 관계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는 연구가 많은데도, 인간은 여전히 그래도 나는 선택할 수 있다고 느낀다. 결정론과 자유의지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끝없는 긴장관계 자체가 인간의 신비를 잘 보여 준다.

요약하자면, 인간은 유전과 환경, 본능과 이성, 파괴성과 창조성, 유한성과 무한 꿈이 한 몸 안에서 싸우는 장이다. 이 복합성이 곧 신비로움이다. 인간에게 미완성의 완성이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날 때 가장 무력하지만, 죽을 때까지 배우고 변화하면서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이다.

인간은 대를 이어 이어지면서 문화, 문명이 전수되고 발전되는 과정이 이어지고 있다(개개인이 삶을 자신에게 국한시키면 죽을 때 인생이 허무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인류 조상이후 지속된 긴 인간 띠의 한 부분을 채운 소중한 존재라고 인식할 경우 전혀 그렇지 않게 된다).

개인과 집합체로서의 인간, 인류는 고정된 완성형이 아니라, 계속 수정되고 재 작성되는 존재이기에 더 예측 불가능하고 신비롭다. 설명되지만 결코 다 설명되지 않는 존재이다. 과학과 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어느 지점엔가는 늘 여백이 남을 것 같다. 아마 그 여백 자체가 인간 신비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점 때문에 문학이 AI미래 시대에도 건재할 것이다.

인류는 한 지붕 한 가족

인문학은 인간의 유전적 요인, 환경적 적응력 등의 인간학을 토대로 한 관점에서 동서고금, 5대양6대주의 문화와 문명을 총망라하는 관점으로 정립되어야 하고 AI시대의 현재와 미래도 그래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인문학 관련서가 다수 나왔지만 대부분 인간학이 대전제로 되어 있지 않아 그 개념이 십인십색이다. 미래에 대한 것도 인간학을 바탕으로 탐구되어야 적절한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의 지배적인 인문학 토대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를 합리화시키는 관점에서 만들어졌고 그 결과 인류는 그 뿌리가 다른 백인종, 황인종과 같은 인종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정실화 했다. 이는 결국 지역, 민족, 국가간 착취에 따른 갈등과 대립의 역사를 낳았고 오늘날에도 그 폐해는 지속되고 있다. 이를 시정하기 위한 새로운 논리의 구성은 80억 인류가 한 지붕 한 가족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AI시대에 대한 타당한 접근 방식이 될 것이다.

인간 두뇌는 유사 이래 완성된 채 정지한 기관이 아니다. 환경과 제도 속에서 끊임없이 최적화 경로를 찾아가는 살아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우리는 여전히 진화의 한가운데에 서 있으며, 그 방향은 이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AI시대를 맞아 인류의 진화는 형식과 내용을 달리해서 계속될 것이다.

문학도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는 것과 같은 정보환경의 변화가 미치는 영향을 십분 고려해야 할 것이다. SNS의 대중화와 정보사회의 발전으로 종이신문이나 잡지 등의 오프라인 매체가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국내 많은 문예지들이 자취를 감춘데 이어 최근 샘터가 휴간한 것도 그 영향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TV가 나오면서 라디오가 사라질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렇지 않고 종이매체도 인간의 DNA 잠재력을 생각할 때 그 생명력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종이책 문학, 소설도 발상의 전환을 하면서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할 집단지성의 발휘가 필요해 보인다.

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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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6 2026.03.26
창작정원 내 죽음을 기억할 사람의 범위에 대하여

검색해 보니 있다. 비록 뉴스레터긴 하지만, 인터넷 시대라 찾을 수 있었다. ROTC 동문회가 추모행사를 개최했다는 한양대 동문회보의 기사다. 추모되는 분은 고 이인희. 순직 당시 계급은 중위.

‘1966년 5월 18일 강원도 양구 송청교 복구공사 중 기중기 고장으로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부하들을 구하고 승화했다’고 한다. 추모비는 그해 11월 11일 건립됐고. 추모행사에는 ROTC동문회장, 학군단장, 후보생들이 참석했단다.

이인희라는 이름은 전혀 몰랐다. 한양여대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캠퍼스를 같이 쓰는 한양대 교정을 다니다 발견한 추모비에서 처음 보았다. 사실 자주 지나다녔어도 이름까지 기억되지는 않았다.

추모비에서 뚜렷이 남는 이름은 조지훈이다. 학창시절 국어시험에서 스트레스 받았던 이름 중 하나.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조지훈 정도 되면 나름, 아니 상당히, 역사적 인물 아닌가? 고 이인희 중위는 내가 태어나기 6년 전에 유명을 달리했는데, 당시 조지훈은 교수였던 모양이다.

이제 삶의 반환점이 가까워지고 있어서일까? 남은 삶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뜬 뒤 누가 나를 기억할지 궁금하다. 반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내가 조지훈만한 역사적 인물과 인연이 있던가? 내가 죽게 되면 어느 정도 비중 있는 인물이 추모의 비문을 써줄까? 아니 글을 새길 만한 비석 하나 서지 않겠구나. 봉분 묘역은 납골당으로 대체된 지 오래라 비석을 세울 일도 없는 시대인데 ….

언제 전화번호부가 없어졌는지 돌아본다. 휴대폰이 대중화될 때 집 전화를 쓰지 않게 될 줄 몰랐다. 몇 년은 집과 휴대폰 번호를 같이 적었는데, 곧 자택은 빈칸이 되었다. 뭐라도 반드시 채워야 하는 온라인 서식에는 111에 2222 같은 아무 숫자나 넣곤 했다.

그나마 내 이름이 남을 역사 기록으로 거의 유일했을 전화번호부. 좀 아쉬웠다. 어릴 때 가끔 전화번호부에서 아버지 이름을 확인하곤 했다. 요즘처럼 개인정보 보호를 중시하는 시대엔 전혀 생각하기 힘든 야만(?)의 시절에 가진 추억이다.

어머니 두 분이 지병으로 60대에 일찍 세상을 떴다. 궂긴 소식을 전하며 언론사에도 보냈다. ㄷ일보에서 두 분 부고를 모두 실어주었다. 역사 기록으로 신문 한 귀퉁이에 이름 석 자 정도라도 새겨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딘가에 묻혀 있다면, 자손들 말고도 누군가 지나다 보기라도 할 테다. 의식은 벌써 꺼지고 몸도 썩어버렸을 텐데, 정작 나는 알지도 못할, 죽음 뒤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이 마음은 도대체 뭘까?

그래도 자식들과 아이들은 한 번씩 찾아주겠지. 세상을 뜨기 전 제사는 지낼 필요 없다고 할 생각인데, 그러면 아예 찾아오지 않으려나? 아마 가끔, 아주 띄엄띄엄, 몇 년에 한 번씩은 찾겠지? 제사를 안 지내면 장례가 끝나면 끝이려나.

언젠가 유명한 물리학자가 이순신 장군 숨결 계산법을 설명했다. 50년 넘게 장군이 내쉰 숨은 수억 톤이 넘는다. 균질하게 지구상에 분포된다고 가정한다. 몇백 년이 지났지만 지금 우리가 이순신의 숨결을 말 그대로 함께 들이마실 수 있다. 황당무계해 보이지만 대학자께서 물리학적으로 고찰해 주시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같은 이치로 나의 숨결도 그대로 남게 되겠다. 흙으로 돌아간 내 몸도 어딘가에 그대로 머무를 테다. 그렇다면 나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아니 지구가 남아 있는 한 영속할 테다. 굳이 나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아니다. 지구가 사라져도 우주의 한 줌 먼지로는 계속 남을 테니, 나는 영원히 사는 존재가 된다. 영원히 ‘산다’가 틀렸다면 적어도 영원히 ‘존재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정리가 된다. 죽은 뒤 나를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바랄 필요도 없다. 어차피 영속하는 존재인데, 몇 사람 더 많은 이들이 기억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런데도 가슴 속의 어딘가에서는 이순신이 부럽다. 직계 혈족 후손 이외에 몇 사람이라도 나를 더 기억하기를 바란다.

삶은 언제든 끝나기 마련이고 나라는 존재는 우주 어딘가에서 영속한다. 평생 많이 공부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그런데도 가족을 넘어 사회적으로 기려지는 이인희 중위가 부럽다.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면, 추할까? 얘들아! 아빠가 죽으면 신문사에 부고를 꼭 보내다오. 이제는 전화번호부도 없잖니? 할머니 두 분은 아빠가 신문사에 연락했단다. 이순신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누군가 한 명이라도 더, 아빠를 기억할 수 있게 해주렴. 부탁한다. 아, 이왕이면 금방 망할 신문 말고 큰 데다 해 다우.

권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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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2026.03.17
창작정원 할머니의 밀주

나는 어린시절을 외할머니 곁에서 보냈다.

비록 한 집에서 살지는 않았지만, 늘 걸어서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할머니가 계셨다.

평택과 인천, 광주로 흩어져 지내던 이모들과는 달리, 외할머니는 언제나 우리 가족과 함께 머물렀다.

나는 종종 할머니집에서 할머니의 젖을 만지며 잠들곤 했다.

그 시절 가정에서 술을 담그는 일은 ‘밀주’라 불리며 법의 눈길을 피해 이루어져야 했지만, 할머니에게 술 빚기는 그저 삶의 연장이었다. 

몇 번이고 쌀을 씻고, 고두밥을 짓던 그 분주한 손길은 금지와 단속을 초월한 생활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할머니에게 술은 기다림에 대한 보상이자 위로였고, 아버지에게는 장모가 보내는 무언의 사랑이었다.

아버지의 친구였던 단속 공무원이 들러 “어머니, 이번 술은 향이 참 좋네요.”하고 웃던 장면은 지금도 희미한 영화처럼 남아 있다.

그 웃음 속에는 법보다 정이 조금 더 가까웠던 시절의 느슨한 온기가 있었다.

술을 빚는 날이면 할머니는 밤새 쌀을 씻고 또 씻으셨다.

그러면 나는 떡보다 더 맛있었던 ‘고두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밤새 침을 삼키곤 했다.

늦잠에서 깨어나면 달큼한 고두밥이 익고 있었다.

할머니는 고두밥을 주먹으로 꼭꼭 뭉쳐서는 콩고물에 묻혀 내 입에 넣어 주시곤 했다.

눈곱도 떼지 않고 오물거리며 맛보던 그 따뜻한 고두밥 맛은 지금도 내 향수의 깊은 자리에서 꺼내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누룩을 딛던 기억도 있다.

대접에 면포를 깔고 밀기울을 채운 후 발로 꼭꼭 딛던 할머니의 모습.

그 누룩은 마치 한 해를 품은 된장처럼, 할머니가 한 해를 점검하는 의식이었다.

그렇게 삼복의 항아리를 풍성하게 채우며 또 다른 계절을 기다렸다.

술을 담그시던 날이면, 할머니는 새벽 공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목욕을 하셨고, 물을 끓여 항아리를 닦으셨다.

돌이켜보면, 그건 단순한 정결함이 아니라 할머니가 술을 대하는 존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는 고두밥과 누룩을 정성스레 버무렸다. 

그렇게 항아리에는 밑술이 앉혀졌다.

술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간을 들여 모셔지는 것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할머니가 빚던 것은 술이 아니라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을 견디는 법, 서두르지 않는 마음, 손으로 삶을 확인하는 방식.

그 모든 향기와 맛, 감촉과 체온 속에서 나는 비로소 배웠다.

삶에는 취하기 전에 먼저 숙성되어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순간에는 언제나 할머니의 따스한 살 냄새가 배어 있었다.

이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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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0 2025.12.23
창작정원 배에 실린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다

배에 실린 것은 사람뿐이 아니었다

 

군사학 수업에서 처음 배운 '전술적 철수(Tactical Withdrawal)'라는 단어는, 수십 년이 지난 후 내 가슴을 울렸던 '인류애(Humanity)'라는 단어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나는 흥남철수작전을 그저 지도를 펼쳐놓고 병력과 물자를 계산하는 냉철한 '철수작전의 성공적 사례'로만 배웠다. 메러디스 빅토리호(Meredith Victory)라는 작은 배가 군수물자를 바다에 버리고 피난민 14,000명을 태웠다는 이야기는 전술 교본에는 맞지 않는 '특이한 결정'일 뿐이었다.

 아무래도 그 시절의 나는 전쟁과 군사작전을 이론적으로, 그리고 지극히 이성적으로만 이해했던 것 같다. 군사 교리가 시키는 차가운 임무와, 인류의 역사가 기억하는 뜨거운 용기는 전혀 다른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 배에 실린 이들이 느꼈을 생사의 공포와 절박한 희망까지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아직 젊었고, 인생의 고단함과 슬픔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살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작전이 단순한 군사적 후퇴가 아니라, 인류애의 위대한 상징이라는 사실은 오랫동안 나의 인식 밖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단지 '성공적인 철수율'이라는 숫자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임관 후 소령 계급을 달고 육군본부에서 근무하던 중, 워크숍 일정으로 거제도를 방문하게 되었다. 흥남철수작전을 처음 접했던 기억은 이미 오래전 일이었지만, 거제도 앞바다를 보는 순간 그 배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드넓고 차가운 해수면은 그날의 수많은 목소리를 삼킨 채 고요했다.

 이제 나는 한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피난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군사적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놓고 떠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절박한 생존이었다. 내 가족이 저 배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부모가 자식을 잃지 않으려 업고, 아내가 남편을 부르짖으며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려 했던 그 수많은 사연들이 한순간 머릿속을 덮쳤다.

 차가운 군사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한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뜨거운 의지가 해수면 아래에서 밀려왔다. 이론과 숫자 뒤에 숨겨져 있던 그들의 절규가 비로소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진짜 전쟁의 기록은 총과 포탄이 아닌, 헤어짐과 기다림, 그리고 절박함이 남긴 눈물로 쓰인다는 것을. 거제도 앞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비로소 전쟁의 가장 깊고 인간적인 층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작전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지 많은 인원을 태웠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두가 죽음을 피해 떠났고, 누구도 미래를 알 수 없던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다섯 명의 아기가 그 배 위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전율했다. 바다 위, 좁디좁은 공간에서, 수천 명이 서 있는 틈 사이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는 것. 사람들은 죽음을 피해 배에 올랐지만, 배 위에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경이로운 아이러니였다.

 미군들은 그 아기들에게 김치원, 투, 쓰리, 포, 파이브 같은 기발한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언어도, 문화도 다르지만, 인간의 생명을 향한 본질적인 애정은 국경과 이념을 넘는 것이었다. 그 아기들은 지금 모두 성인이 되어 그날의 유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생애 가장 극적인 순간에 함께 태어난 인연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아도 가족처럼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느껴졌다. 그들의 존재는 그 작전이 단지 철수가 아닌, 인류애가 승리한 배였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자꾸만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레너드 라루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명백히 '군수물자 수송'이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것이다. 그것을 차가운 바다에 버리고 타국 사람들을 태운다는 결정은 일개 선장이 질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책임이자 규율 위반이었다. 눈앞의 임무와 배후의 책임, 그리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타국 사람들의 절규 사이에서 그는 얼마나 긴 밤을 고뇌했을까.

 그가 짊어진 군수물자는 수많은 전력을 의미했지만, 라루 선장은 그 차가운 쇠붙이의 무게보다 14,000명의 생명이 지닌 뜨겁고 절박한 무게가 훨씬 더 무겁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결단은 명령 체계를 거스르는 것이었고, 그의 경력과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인류애라는 나침반을 따랐다.

 그는 군인이기 전에, 그리고 명령을 이행하는 선장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생명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따른 것이다. 그의 배는 이후 '작은 배에 가장 많은 인원을 태운 기적의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지만, 나는 그 기록보다 더 위대한 것이 라루 선장의 용기와 신념, 즉 '사람을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결정한 한 사람의 윤리적 잣대였다고 믿는다. 만약 그가 '규정대로'만 행동했다면, 흥남철수는 그저 기록 한 줄로만 남았을, 무수히 많은 작전 중 하나로 묻혔을 것이다.

 라루 선장의 결단은 '상관의 명령보다 양심의 명령을 더 두려워했다'는 성찰과도 맞닿아 있다. 라루 선장은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옳음'의 목소리를 따른 것이다. 이 결단은 군인의 '칼'과 인간의 '십자가'가 만나는 지점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피난민들은 배에서 내려 각자의 삶을 다시 시작해야 했다. 누군가는 가족을 잃은 채 홀로 남았고, 누군가는 낯선 땅에서 전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어릴 때 어른들이 "이북에서 온 분들은 정말 억척스러워"라고 말하곤 했다. 당시엔 단순한 성격으로만 들었지만, 이제 그것이 절박함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던 사람들의 '생존 근육'이었음을 안다.

 그들은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고, 절약하며 자녀 교육에 온 힘을 쏟았다. 그 결과 대부분은 경제적으로도 자리 잡았고,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오른 이들이 많다. 척박한 땅에서도 기어이 뿌리를 내린 그들의 삶은, 절망의 끝에서 인간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그들의 억척스러움은 곧 끈기와 성실함으로 이어졌고, 이는 전후 한국 사회가 기적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선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 이 땅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전쟁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 아이러니한 시련 속에서 그들은 가장 강인한 삶의 의지를 단련해낸 것이다.

 이제 전쟁을 단순히 지도 위의 작전 선으로만 볼 수 없다. 그 선 너머에는 헤어진 가족, 생사의 갈림길에 선 아이, 그리고 이름 없이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영원히 숨 쉬고 있다. 흥남철수작전은 나에게 작전의 성공보다 더 큰 것을 가르쳐주었다. 바로 전쟁의 한복판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다는 '인간 연대의 힘'이다.

 나는 군인으로서 평화를 준비하며 동시에 이 비극이 반복되는 것을 막고자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지속되지만, 인간이 인간을 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믿는다. 흥남철수작전이 바로 그 증거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단지 물자와 사람을 실어 나른 배가 아니었다. 두려움과 절망, 그 속에서 피어난 생존과 탄생,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버리지 않는 한 꺾이지 않을 인류애라는 거대한 짐이 함께 실려 있었다.

 군인의 칼이 '전술적 철수'를 명했을 때, 레너드 라루 선장은 인간의 십자가를 짊어지기로 결단했다. 그의 배는 전후 세대가 잊지 말아야 할 윤리적 나침반이다.

강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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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 2025.12.21
창작정원 거짓된 사랑

처음부터 그대는 날 사랑한다 하였지만

그 말이 거짓이었음을

세월의 무게에 알았습니다

사랑의 쇠사슬에 현실의 무게가

감당 할 수 없을 정도로 짓눌러 올 때

난 숨을 쉴 수 조차 없었습니다

끝없이 주고 주어도

내가 더 이상

내 힘으로도 노력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비참함을 울고싶은 나의 마음을

당신은 알지 못합니다

이젠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사랑도 현실의 무게도

모든 것을 놓을 때가 된 때를 알기에

뒤돌아 서려합니다

너무 힘든 사랑을 했기에

더 이상 후회는 하지 않겠습니다

세월의 무게에

나에게 남은 것은 상처뿐입니다

당신은 나의 눈물을 본 적이 있나요?

나의 괴로움을 아시나요

이 모든 물음을 뒤로 한 채

이젠 "안녕" 이라 고백하고 싶은 밤입니다

이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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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 2025.12.01
창작정원 그렇지

일출을 볼 수 없는 여운을

산책길에 만난 해송향이

마음까지 세척해 내는 기분은 뭘까?

바다경치가 있으니 그렇지.

저 구름 넘어 보름달

여전히 뜨고지겠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알아서일까?

파도소리에 묻히니 그렇지.

짙은 안개에 보슬비

가족들의 발걸음에

정을 더한 애(사랑)가 넘쳐 파도를 넘는다.

멀다않고 한자리에 모이니 그렇지.

뜨지 않아도

보이지 않아도

숫자로 표현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도 느낄 수 있으니 그렇지.

그래서 가족인가 보다.

그러면 그렇지.

이홍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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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2 2025.11.19
창작정원 그림자에게 묻다

그림자에게 묻다

권준희

 

삶은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는 끊어진 선

그 선 위에서 흔들리는 나의 그림자

 

수풀 사이로 스며드는 빛길

낮은 구름자락에 매달린 그림자

안개로 덮힌 고된 하루가 지나고

저녁빛 그림자도 희미해진다

 

쾌락과 영혼이 뒤엉킨 세상 속

흐릿한 바람결에 감춰진 흔적 같은 그림자

가로등 아래 처진 표정없는 그늘진 허상

나의 안팎을 넘나드는 너

 

너의 정체가 무엇인가

삶의 그림자는 항상 내 발 밑에

하지만 잡히지 않는 시간처럼 나를 감싼다

그래서 가끔은 멈춰서서 묻는다

 

오늘도 나는 앞을 향해 달려왔지만

뒤엉킨 시공간 속에서 나는 누구이며

너는 나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그림자야, 오늘은 나에게 답해다오

 

때로는 멈추어 너를 들여다 보리라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내 삶의 빛을 찾으리라

https://blog.naver.com/kwonju22/223973576963

권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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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 2025.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