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맵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3- 태평양 종전과 미군정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

하늘에서 떨어진 불덩어리는

도시를 그림자만 남긴 채 태워버렸다.

아이들의 울음은 증발했고

강물에는 불탄 인간의 형상이 떠내려갔다.

그곳에는 일본인만 있지 않았다.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제국의 전쟁에 동원되었고

핵의 불길 속에 버려졌다.

소형차 크기의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2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중 5만 명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착취당하던 조선인이었다.

일제 군수 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날의 태양보다 뜨거운 빛 속에서 산화했다.

해방을 갈망하던 조선인들은

제국의 희생자가 되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 이틀 뒤인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 외무상이 모스크바 주재

일본 대사를 불러다 말했다.

"내일부터 양국은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이틀 후, 소련군은 만주 국경을 넘었다.

일본 관동군 100만이 무장해제를 당했다.

1945년 8월 9일 나가사키

원자탄 '팻 맨'이 두 번째로 떨어졌다.

미국은 소련의 선전포고 다음 날,

소련에 대한 사전 통보 없이

두 번째 원폭을 투하했다.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그것은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소련이 만주와 한반도를 더 이상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압박용 메시지였다."

미국은 스탈린을 굴복시킨,

막강한 소련을 두려워했다.

소련이 유럽에서 승승장구한 뒤

그 여세를 몰아 동북아시아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전략수립에 고심했다.

미국은 일본에 두 번째 원폭을 투하해

소련을 압박하려 했다는

추정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의 핵 공격을 받은

두 도시의 피해는 엄청났다.

현장 사망 23 만 명, 부상 및 후유증 피해 51 만 명.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피해자는

10만여 명에 달했다.

조선인 5만 명은 즉사하고

5만 명이 살아서 4만 3,000명이 영구 귀국하고

7,000명이 일본에 거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생존 조선인 가운데는 원폭 투하 후에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홀대를 받았고,

귀국이후에도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미국은 일본 원폭 투하 후 피폭자에 대한

보도와 정보 유출을 매우 강력하게 통제했다.

1945년 9월, 연합국 최고사령관(GHQ/SCAP)은

일본 전역에 엄격한 언론 규제를 시행했다.

원폭 관련해서 특히 심했다.

원폭은 일시에 한 도시를 파괴하고

인명을 무차별 살상하면서

생존한 피폭자들의 고통이 심했다.

갖가지 형태로 부상을 당했지만

치료받을 수 없었고 마실 물조차 구할 수 없어

고통 속에 죽어갔다.

병원과 같은 구호시설과 식수와 식량 수급 시스템이,

교통과 통신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이

완전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원폭 피해를 압축한 문장이 생겨났다.

“산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했다.”

미국은 피폭 현장 취재부터 철저히 봉쇄하고

피폭 영상 자료는 압류하고 기밀로 분류했다

미군이 촬영한 뉴스릴이나

일본 영상팀이 촬영한 필름은 모두 압수했다.

필름 일부는 약 40년이 지나서야 일반에 공개되었다.

피폭의 생물학적 피해는

일본 국민에게조차 철저히 차단되었다.

일본 과학자들의 의학 연구 결과물까지도

발표가 금지되었다.

'히로시마'라는 단어도 검열 대상이었다.

검열 통제는 점령이 종료된 1952년까지 지속되었다.

미국 정부는 원폭 투하의 참혹함을 감추고

전쟁을 끝낸 인류애적 무기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미국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상을 집중 보도토록 하면서

미국의 반인륜적인 원폭의

참혹한 파괴력을 철저히 감추었다.

미국식 합리주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 정부가

항복 의사를 미국에 타진했다.

소련군은 만주와 한반도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소련 육군 25사단은 육로로

두만강을 건너 공세를 취하고 있었고

소련 해군은 북동부 한반도 해안에

상륙작전을 전개했다.

8월 15일 미군 지휘부는 종전 후의

동북아 전략을 매듭짓고

소련에 공식 통고했다.

"한반도의 미소 점령군 경계선은

북위 38도선으로 한다."

스탈린은 수락했다.

원자탄의 위력 앞에서,

그는 한반도 남쪽을 포기하기로 선택했다.

1945년 8월 14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을 무조건 수락하겠다고 통보했다.

항복을 선택하고 저항을 접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함성

일본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천황의 떨리는 육성이 라디오를 타고 흐르며

삼천만 동포가 거리로 뛰어나와

눈물겨운 "만세"를 외쳤다!

한반도 전역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해방이다!”

태극기를 꺼내 들었고 울면서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그 환희 뒤에서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이미 각자의 진주 계획을 실행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북에서 내려왔고 미군은

남으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해방의 주인공은 승전한 제국들이었다.

그것은 잔혹한 분단의 출발점이었다.

삼천리강산은 이미 차가운 냉전의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이는 미국이 종전 이전부터 심사숙고한 결과였다.

미국은 종전 수년전부터

동북아를 주목하며 머리를 굴렸다.

“일본이 무너지면, 미국은

동북아 어디를 차지할 것인가”

그 질문 속에 한반도가 끼워 넣어졌다.

미국에게 한반도는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익숙한 땅이었다.

그것은 미 국익을 위해 점령해야 할 대상 이었다.

1945년 6월 전쟁이 끝을 향해 가자

미국의 극비 문서 속에

일본, 만주, 대만, 그리고

한반도가 점령대상으로 포함됐다

서울도, 개성도, 군산도 ‘점령 대상’이었다

1945년 8월 중순 미국의 일본 원폭 투하 후

소련군은 만주를 점령하고

한반도 북부로 빠르게 진격했다.

소련은 만주에 포진해 있던

일본군 1백 여 만 명을 무장해제 시키켰다.

한반도와 일본 본토까지 진격할 기세였고

8월 21일 원산에 상륙해 평양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들은 38도선을 넘지 않았다.

미국의 핵 위협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 주력부대는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하면서

일본 본토 점령 작전을 준비 중이었다.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분할 점령을

소련이 너무나 쉽게 수락한 것은,

미국이 쥔 핵무기의 가공할 위력에

기가 꺾인 탓이었다.

소련은 평양에 사령부를 차리고

더는 남하하지 않았다.

38도선 이남에는

일본군이 점령군 행세를 하면서

미군이 상륙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모습은 세계 1,2 차 대전 때

연합군내에서도

점령지역 쟁탈전 등이

심각했던 것과 대비된다.

그만큼 미국 핵폭탄에

크게 주눅이 든 탓이다.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한 전함 미주리호.

맥아더 장군과 일본 외상, 일본군 사령관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태평양 전쟁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1945년 9월 4일 하지 중장 부대의 선발대가

항공기를 타고 한반도로 향했다.

그들은 소련군이 38도선 이북에

머물고 있는 것을 확인했다.

1945년 9월 8일 24군단이

인천항에 발을 들였다.

성조기가 게양되었고, 하지 중장은

포고문 제1호를 발표했다.

"미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다."

조선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해방을 기다린 35년.

그 끝에 맞이한 것은, 또 다른 점령이었다.

조선민중은 광복을 외쳤지만

강대국은 점령을 준비했다.

1945년 9월 9일 조선총독부 중앙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이 열렸다.

아베 노부유키 총독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하지 중장과 T.C. 킨케이드 제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 직후, 조선총독부 건물에 걸려 있던

일장기가 내려갔다.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은 태극기가 아닌

다른 외세의 상징, 성조기였다!

미군정은 상하이의 임시정부도,

해방 직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세운 조선인민공화국도

그 어떤 정치조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 중장은 일제 총독부의 일본인

간부들을 고문으로 앉혔다.

그들은 미국인보다 한반도를

더 잘 알았다는 이유였다.

과장급 아래의 일본인 실무자들은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계속 근무했다.

일제치하에서 동포의 피를 빨던

친일 한국인 관리들을 원래의 권좌로 복귀시켰다.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

친일 청산의 역사적 기회는

그렇게 점령군에게 처참하게

짓밟히고 파묻혀 버렸다.

서울의 미군정에는 한국어 통역군인이 전무해서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조선인 전쟁포로 6명을

통역사로 배속시켰다.

워싱턴 정부는 서울의 미군정과

동경 맥아더 사령부에게

동일한 명령을 하달했다.

“일본과 남한에 동일한 군정원칙이 적용된다.

친미파를 양산하라.

미국익을 위해 철저히 복종할

자들을 군과 경찰로 등용하라.

남한에서 친일세력을 친미세력으로 만들어라.”

미국 정부는 동북아에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과 조선을 방패로 삼으려 했고

군정사령관도 본국 정부의 지침을 충실히 이행할

야전군 사령관들을 기용했다.

정무적 감각이 있는 장군들은 배제한 채

동북아를 미국 진지로 만들려는

전략에 맹종할

군인들을 앉힌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일부처럼 보였다.

미군정은 해방된 민족을 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패전국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이유는 명확했다.

"우리는 좌익이든 우익이든,

우리의 통치에 도전할 수 있는

어떤 세력도 원하지 않는다."

1946~1947년, 38도선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남과 북의 균열은 더 깊어졌다.

북쪽은 소련의 지원 아래 김일성이

중심이 된 통일 전선을 구축했다.

남쪽은 미군정 아래에서 우익 세력이 결집했다.

한반도를 독립시키겠다던 모스크바와 워싱턴의

약속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념대립의 대 혼돈 속에 한반도는

좌우의 분열과 대립으로 치닫고 있었다.

신탁통치 합의가 불발되고 1947년

미국은 유엔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그리고 유엔 감시 아래 남한에서만

총선거를 치르자는 안을 통과시켰다.

소련은 반발했다.

"38도선 전체에서 동시에 선거를 치르자"고 맞섰다.

미국의 단독 총선거 강행에

이승만과 친일파가 적극 지지하면서

남과 북은 분단의 비극을 향해 치달았다.

서로 다른 이념 속에 불신이 쌓였다

하나는 자유를 말했고

하나는 해방을 말했지만

사람들은 점점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기 시작했다

같은 언어로 욕하고 같은 땅에서 죽어갔다

미국은 한반도의 특수성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자국의 이익과 공산주의 저지라는

거대한 성벽만을 쌓아 올렸다.

조선인의 독립 열망은

미국의 국익을 앞세운 전략 앞에서

철저히 무시되었다.

1948년, 제주도에서

제주 4.3항쟁이 일어났다.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외침이었다.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군은 무력으로 진압했다.

아름다운 탐라의 섬, 한라산의 붉은 흙은

미군과 조선인 군경 토벌대의 칼날 아래 숨져간

3만여 무고한 주민들의 피로 물들었다.

비공식 기록은 그보다 훨씬 많다.

제주의 피는 단독정부의 초석 아래 흘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성조기가 내려가고,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하지만 그 태극기는

38도선 이남에서만 펄럭였다.

북쪽에서는 한 달 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탄생했다.

서로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조상을 모시며

같은 산천을 노래하던 민족은

두 개의 체제와 두 개의 군대와

두 개의 미래로 나뉘었다.

드리는 말씀

연재하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370 2026.06.09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2 -제국주의 침략과 일제 강점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1866년 미국의 철갑선 제너럴 셔먼호가

조선의 대동강으로 침범해 외쳤다.

“문을 열라”

식민지 진출과 군사적 위협이었다.

평양 사람들이 맞서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배는 불탔고, 미국 선원들은 전멸했다.

미국과 한반도의 첫 만남은

저항의 화염 속에서 기록되었다.

단순한 충돌이 아닌 열강 침략의 시작이었다.

5년 뒤인 1871년, 기함 콜로라도가

군함 다섯 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포성이 하늘을 찢고

초지진의 돌담에 선혈이 낭자했다.

신미양요다.

미국은 통상을 아니, 정확히는 이익을 원했다.

조선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

자신들의 몫을 챙기길 원했다.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돼

조선과 미국이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악수는 조선의 빗장을 여는 열쇠였다.

치외법권, 최혜국 대우를 요구했다.

그것은 시작의 시작일 뿐

형태 바꿔 150년 이어졌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혁명계기

발생한 청일전쟁 후

1895년 10월 경복궁 옥호루 새벽,

일본 자객들이 난입해

명성황후 황후 칼로 찌르고 시신 불태웠다.

명성황후의 피가

경복궁 차가운 바닥을 적셨다.

불길 속에서 타오른 것은

한 여인의 육신만이 아니었다.

조선의 마지막 자존이었다.

피비린내 진동한 궁궐에

공포 가득 했을 때,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공관들이 분노해

"고종을 보호하고 조선을 유지하자"

손을 내밀었으나,

미 국무부는 단호히 거절하고

서울 공사에 전문을 보냈다.

"개입하지 말라, 오직 중립의 장막 뒤에 숨어라."

대한제국의 국운이 짓이겨지는 동안

미국은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침묵을 지켰다.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조선의 군주,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자주를 구걸하며

워싱턴으로 편지를 보냈다.

“서구 열강이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도록

미국이 앞장서 달라.”

1899년 매킨리 대통령은 그 편지를 읽고

서울의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거부하라.”

1900년 동경에서 조선 공사가

미국 버크 공사를 붙잡고

"서구 열강이 조선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케 앞장서 달라"

눈물로 호소할 때

돌아온 것은 냉담한 침묵.

미국은 관심이 없었다.

조선의 황제가

일본에 무릎 꿇는 것이

미국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루스벨트 제26대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1901년 일본의 조선 강점을 방조했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루스벨트는 미국의 대기업들을 통해

일본에게 전쟁

자금(7억 엔. 현재 가치로 14조 원)을 빌려줬다.

.일본이 그 돈으로 총과 대포를 만들어

러시아에게 승리한 뒤

조선 점령을 향한 입지를 확보했다.

분하다. 1905년 7월 두 국가의 밀거래!

가쓰라와 태프트가 맺은 비밀 협약

필리핀을 탐한 미국과

한반도를 삼키려는

일본의 추악한 거래 속에서

조선의 숨통은 산 채로 끊어지려 하고 있었다.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해

일본의 조선 지배를 사실상 승인했다.

이익을 나눈 자들의 악수 위에서

조선의 운명이 결정됐다.

조선은 물건처럼 거래됐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으로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 됐다.

일주일 뒤, 미 국무부가

서울 공사에게 전문을 보냈다.

“영사관을 폐쇄하라.

조선에서 철수하라.

모든 업무는 도쿄에서 처리하라.”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불이 꺼졌다.

워싱턴의 조선 공사관 문도 닫혔다.

그해 12월 16일 조선은

미국의 지도에서 지워졌다.

루스벨트는 러일전쟁 종식을 위한

포츠머스 강화회의를

중재한 공로로

190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미국인 최초의 노벨상 수상이었다.

1910년 8월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었다.

경술국치의 치욕 속에

나라가 통째로 삼켜질 때

그해 9월, 미국은 기다렸다는 듯

일본의 손을 들어주었다.

총독부의 칼날 아래

언어가 잘리고

역사가 찢기고

농민의 논밭은 빼앗겼다.

언론과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모조리 빼앗긴 채

피눈물 흘리던 조선의 백성들,

무단통치에서 저항의 불씨를 지폈다.

민초들의 심장은 계속 분노하고 있었다.

1919년 기미년 삼월

삼천리강산을 뒤흔든 대한독립만세!

무장전쟁을 외친 무오독립선언과

도쿄의 2·8 선언을 거쳐

온 겨레가 붉은 피로 써 내려간

비폭력 혁명이었다.

만세.

대한독립 만세.

골목마다 독립을 절규하는 함성이 터져 올랐다.

학생과 농부, 기생과 승려,

이름 없는 백성들이

맨손으로 제국의 총칼 앞에 섰다.

그들은 믿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약한 민족에게도 태양처럼 비칠 것이라고.

그러나 미국의 훈령은 달랐다.

“조선인들이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지 않게 하라.”

“일본이 오해하지 않게 하라.”

그 문장은 총칼보다 더 차갑게

독립운동을 외친 민초들의 가슴을 후볐다.

윌슨이 전 세계에 외친

거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이 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전승국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에게 해당이 되지 않았다.

그의 선언은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고

강대국들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 출신 대통령이

1918년 가을, 억압받는 민족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민족자결주의를 세계 앞에 선언했다.

세상의 약자들이 그 말에 귀를 세웠다.

조선도 귀를 세웠다.

만주 지린에서 독립선언 함성이 터져나왔다.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거리에 섰다.

한반도 방방곡곡에서 만세 소리가 터졌다.

대한독립만세.

윌슨은 그 소리를 들었는가,

듣고도 못 들은 척했는가.

아니면 정말 들리지 않았는가.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미 국무부가 도쿄의 미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서울의 미 영사에게 전달하라.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미국이 자신들을 도우리라는 믿음을

갖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하라.

일본 정부가 미국이 조선 독립에

동조한다고 의심하지 않도록 하라."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원칙적으로는

‘모든 민족’에게 적용된다는 것이었으나,

1차 대전 패전국(독일, 오스만제국) 식민지와 영토에 적용되고

승전국(영국·프랑스·일본·벨기에 등) 식민지는 배제되었다.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강대국 이기주의 앞에서 정의는 없었다.

윌슨은 위선적인 평화주의자의 연기만을 했을 뿐이다.

조선에서 만세 소리는 총성에 묻혔다.

유관순이 잡혀갔다.

7천 명이 넘게 죽었다.

수만 명이 부상당했다.

수만 명이 투옥됐다.

미국은 침묵했다.

민족자결을 외친 미국 대통령은

조선의 절규를 외면했다.

윌슨은 만세 운동으로 죽어가는

조선의 영혼들을 향해

단 한 마디의 지지나 동정의 언어도

던지지 않았다.

파리강화회의의 화려한 홀에서

약소민족의 절규는 문밖에 멈췄다.

민족자결주의는 강자의 해괴한 논리였고

조선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오랜 세월, 1920년과 30년대의

긴 밤 동안

미국은 일제의 포악한 식민 지배를 철저히 외면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세계의 정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미국, 영국 등은 철저히

악취 나는 이익만을 계산했다.

조선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쓰러지는데

열강의 회의장은 침묵했다.

피 묻은 만세 소리는

지구촌 양심의 창문 앞에서 절망 속에 통곡해야 했다.

세월은 흘러 다시 전쟁의 광풍이 불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포성이

진주만을 피로 물들인 후

미국은 일본과 싸우기 시작했다.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함대가 불탔기 때문이었다.

임시정부 청원서가 워싱턴을 헤매고 다녔다.

조선 임시정부를 인정해 달라.

합법적 정부로 승인해 달라.

미국 정부는 외면했다.

접견조차 쉽지 않았다.

자유중국이 조선 임시정부 승인을 제안했으나

미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며

그 법통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

1943년 카이로에서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만났다.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선언이 나왔다.

그러나 그 안에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적절한 조치를 통해,

조선인이 독립할 자질을 갖췄다고 판단될 때까지

수년 또는 더 긴 기간의 신탁통치가 필요하다.”

오만한 합의 외에

구체적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선언 속에도 조선의 운명은 모호했다.

독립시킨다는 적절한 시기가

누구의 시간인지 조선인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연합국의 우두머리들이

또 다른 지배를 준비하고

자국 이익을 챙기기 위한 싸움의 조건들이었다.

한반도라는 먹잇감을 응시하며

기회를 노리는 탐욕의 결과물이었다.

1945년 8월 초

원자폭탄 두 발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일본에 징용으로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도 희생됐다.

일제가 무릎 꿇자

강대국들은 동북아 지도를 놓고

전후 이익을 계산했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 일본 쪽을 바라보았고

미국은 태평양의 패권을 계산했다.

한반도는 전략 요충지였다.

태평양으로 나아갈,

아시아 대륙으로 진출할 출발점이었다.

미국은 소련의 진격을 막아야 했다.

한반도와 일본 전체를

소련에게 내줄 수는 없었다.

미국의 원자탄 위력에 소련이 주춤했다.

미국의 의사대로 38선이 그어지고

한반도가 두 동강 났다.

미 국무부 문건은 카스라-태프트 밀약을 참작하면서

조선을 일본과 함께 전리품으로 분류했다.

조선인은 그 문건에 없었다.

조선인의 의견을 묻겠는

절차도 생략되어 있었다.

한반도가 해방되었다면서

38선 남쪽에는 미군이,

그 북쪽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두 개의 점령군, 두 개 진영의 이익이 우선하면서

한 개의 민족이 두 동강이 났다.

그 선은 동서 진영의 대치 선으로 만들어져

수천만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날이 왔다.

미군은 남쪽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북쪽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침내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

독립투쟁에서 내려온 이들,

들판에서 태극기를 숨겨왔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

하지만 해방의 새벽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을 포함한 연합군은

한반도를 일본의 식민지의 하나로 분류해

일본 본토에 대한 점령정책과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당시 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을 보면

가스라-테프트 밀약에 의해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동의한

역사적 사실의 연장선에서 머물러 있다.

그것은 한반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 문건에서 확인된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보호령이 되었고

그 이후 대한제국은 일본 통감에 의해

간접적으로 지배당했다.

그 후 1910년 일본은

한일합병조약에 의해 일본에 병합되었다.

그 후 일본은 대한제국을

대외적으로 조선으로 불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총독의 지배를 받도록 했다.”

남한을 점령한 미국은

조선 민중의 독립 투쟁의 역사를 외면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거리마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인민위원회도

민중의 의지도 역사의 갈망도 인정하지 않았다.

드리는 말씀

연재될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고승우
북마크
405 2026.06.05
창작정원 고승우 연재 1- 역사서사시 한미관계 150년

드리는 말씀

연재될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

******

시작하며

망국, 식민. 분단과 동족상잔 등을 거친

150 여 년의 모진 세월.

우리는 오랜 시간 미국을 ‘혈맹(血盟)’이라 불렀고,

그들이 흘린 젊은 피 위에 세워진

정치적·경제적 기적의 신화를 찬양해 왔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지난 70 여년간 침묵하고 감춰온

진짜 한미관계를 확인하고

미국의 실체를 모른 채 고정관념화 된

미맹(미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지난 한 세기 절반의 진실의 기록, 질문을 시작하려 한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기에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신미양요의 그날부터

오늘 이 순간까지

미국과 한반도의 관계는

한 편의 대 서사시.

그 우여곡절을 살피는 것은

희비극을 넘어

새로운 깨달음의 시작.

우리는 지금,

그 역사적 전환점에 서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과거,

직시해야 할 현재,

그리고 스스로 써내려가야 할 미래.

기억하는 자가 미래를 산다

우리가 잘 모르거나,

혹은 잘못 알려진

150 여년의 여정을

펼쳐놓고 확인해야 한다.

미국은 혈맹이었습니까?

평등한 동반자였습니까?

미국익을 위한 예속적

이해관계였습니까?

한국이 원조, 은혜 속에 많이 챙겼습니까?

진실은

분명히 존재한다.

오늘 우리의 과제는

과거를 확인, 청산하고

현재를 직시하며

미래를 스스로 개척하는 것.

그 길 위에서만

진정한 평화와 번영이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1871년 태평양 건너 한 제국의 야욕이

강화도 앞바다를 피로 물들인 신미양요의 그날

조선의 병사들은 낯선 침략군의

전함을 바라보며 칼을 뽑았다.

“물러가라, 서양의 침략자여!”

그 함성은 150 여년의 시간을 넘어

오늘 우리 가슴에 메아리친다.

그날의 총성은 단순한 전쟁의 시작이 아니라

한반도와 미국, 얽히고설킨 운명의 서막이었다.

1905년 동경 밀실에서 맺은

추악한 ‘가쓰라–태프트 밀약.’

미국은 필리핀을 집어삼키는 대가로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묵인하고 축복했다.

그 음험한 독기 속에 을사늑약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도려냈다.

안중근 장군의 대일 선전포고가 작열했으나

1910년 경술년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침몰시켰다.

그 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의

함성이 하늘을 흔들고 절규가 온 땅을 진동할 때,

서울과 도쿄의 미국 공관으로 내려진 훈령은 냉혹했다.

“조선인의 독립운동에 미국이 동조하거나

지원하는 인상을 절대 주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세계의 정의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미국은 철저히 이익만을 계산했다.

거리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들고 쓰러지는데

열강의 회의장은 침묵했다.

피 묻은 만세 소리는

지구촌 양심의 창문 앞에서 절망 속에 통곡했다.

일본의 패망이 짙어 가던

태평양 전쟁의 끝자락이 보일 때,

미국은 원자탄을 터뜨려

소련의 극동 남하를 저지하는 북위 38도선을 그었다.

그들의 한반도 정책은

냉전 대비 극동 미군기지화.

민족의 허리는 두 동강이 나서 갈라졌다.

미국과 소련이 합의한

그 선은

동서 진영의 대치선으로 만들어져

수천만의 삶을 둘로 가르게 된다.

일제 항복과 조선 해방의 날이 왔다.

미군은 남쪽으로 들어왔고

소련군은 북쪽으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마침내

새로운 나라가 태어날 것이라 믿었다.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

독립투쟁에서 내려온 이들,

들판에서 태극기를 숨겨왔던 이들이

서로 얼싸안으며 외쳤다.

“이제 우리 힘으로 나라를 세우자.”

하지만 해방의 새벽은 자주독립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미국은 조선 민중의 독립 투쟁의

역사를 외면했다.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의 지휘 아래,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그저

‘일본의 식민지’로 대하며

패전국 일본과 동일한 군정을 실시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생적으로 세워진 인민위원회도

민중의 의지도

역사의 갈망도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총독부 건물엔 다시 불이 켜졌고

조선총독부의 관리들이 다시 중용되고,

민족을 배반했던 친일 경찰들이

권좌로 복귀했다.

해방된 조선의 민중은

새로 온 점령군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해방은 왔지만

청산은 오지 않았다.

어제의 순사가

오늘의 경찰이 되었다.

누군가는 울부짖었다.

“왜 독립된 나라에서

독립운동가가 쫓겨나고

친일파가 권력을 잡는가.”

그것은 미국의 동북아 전략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반공의 성벽으로 세우고

남한을 거대한 전략의 전초기지로 만들려 했다.

오늘날까지 이 땅을 좀먹는 친일 미 청산의 독극물,

그 원천적 책임은

해방정국의 거대한 설계를 주도한 미국에게 있고

독재자 이승만은 그 속에서

권력을 탐하는 하수인이 되었다.

미국은 단독정부 수립을 강행해

분단을 고착화하려했다.

미국의 획책에 격렬하게 반대한

제주에서 봉기, 진압 속에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4·3의 산과 마을엔

미국을 추종하는 반민족세력의

총탄이 쏟아졌다.

어머니는 불타는 초가 앞에서

아이를 끌어안고 울었고

바다는 시신을 떠안은 채 흐느꼈다.

공산주의 배후라는 가짜뉴스 속에

자국 군대와 친일 세력의 총칼에

도민 10분의 1이 학살당했다.

여수순천의 병사들은

양심과 명령 사이에서 외치며 궐기했다.

“동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

미국과 이승만은 어린이까지

빨갱이로 몰아

학살로 흐른 피가 대지를 적셨다.

친일이라 불리던 이름들이

반공이라는 새 이름으로 변신했다.

민족반역자를 잡으러 나선 반민특위에

친일 경찰이 총을 들고 쳐들어갔다.

이승만은 말했다

“내가 지시했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자물쇠가

이 나라의 입에 채워졌다.

묻지 말라, 따지지 말라, 기억하지 말라.

그리고 1950년 여름

군사분계선 남북에서 총격전이

꼬리를 물다 38도선이 무너지며

전면전쟁이 터져 산하가 불타올랐다.

애치슨이 그은 방어선 바깥에 있던 땅에서

포성이 울렸을 때 미국이 다시 왔다.

이번엔 유엔의 깃발을 달고 다국적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의 배 위에

일본 청년들도 타고 있었다.

한반도의 전쟁이 일본에게

폐허에서 일어설 발판을 주었다.

중국군이 참전한 뒤

만주와 북한에 핵 공격을 감행하자!

맥아더의 목소리가 커지자

3차 대전을 원치 않았던 트루먼이

그를 갈아 치웠다.

냉전 논리 속에 전선이 교착되자

북녘 하늘은 미군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불타올랐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일본의

도시보다 더 참혹하게,

평양의 하늘, 함흥의 골목, 원산의 항구

지상의 모든 것이 파괴되어 빨래판처럼 변했다.

1953년 총성이 멎었다.

그리고 휴전.

평화협정은 멀어지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미국에게 분단 상태 유지가 최상의 조건이었다.

주한미군이 동북아의 최전방 부대가 될 수 있었기에.

7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화약고.

불평등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의 쇠사슬,

주한미군사령관은 3개의 모자를 쓰고

적절한 긴장 속 전쟁 방지, 분단지속을 위해

남북을 관리한다.

남북이 손을 맞잡으려 할 때마다

미국은 한미동맹을 앞세워 안보 튼튼을 외치면서

주한미군의 중국, 러시아를 향한 비밀작전을 전개했다.

한국 정부도 그 비밀에 입 다물고

미국에 동조하면서

한국민은 까맣게 모르고

개돼지의 가짜평화를 즐긴다.

미국 국익을 위해

한국헌법과 민주주의는 실종상태.

한미정부는 주한미군이 대북 방어용이라고만 합창하고

한미동맹은 남북교류협력으로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면서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전략과

작계 5015, 5026에 압축된

선제타격, 참수작전 등이 공개된다.

모두를 향한 심리전 차원에서.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의 남북정상회담 때마다

미국은 한미동맹 강화를 강조하며

한국의 군사적 대미 종속을 심화시켰다.

남북정상이 평양에서 세 번이나 손을 잡고

남북국가연합도 가능할 수 있게 했던 2018년 열기는

트럼프의 제동과 압박 속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북한의 적대적 2국가론은 그 뒤에 나왔다.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주한미군 전략적 유연성을 강조한다.

동북아에 신냉전의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남쪽은 경제력과 군사력이 세계 선진국 수준이고

K-팝, 한류는 지구촌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세계사적 번영의 그림자 아래

지구촌의 궁금증은 커지고 있다.

왜 그들은 아직도

작전권을 완전히 갖지 못하는가.

왜 평화협정은 오지 않는가.

왜 강대국의 전략 속에서

한반도는 늘 전쟁의 문턱에 서 있는가.

대한민국은 자주의 목소리를 잃은 채

왜 불편해 하지 않는가.

한미관계의 150 여년은

제국과 약소국 사이의 역사이며

동맹과 지배, 통제의 기억이고

희생과 번영이 뒤엉킨 거대한 서사다.

필요한 것은 진실을 확인하는 성찰이다.

감춰진 미국 정부 비밀문서를 읽고

침묵당한 목소리를 듣고

왜곡된 기억을 바로 세우는 일.

다시는 이 땅이

누구의 전략지도 속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 나라 역사에는 등장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이름 없이 사라진 수많은 민간인들

제주에서, 여순에서, 대전에서

그들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미군사고문단의 보고서에는

"불순세력 제거"라는 말로 대체되었다

숫자로 처리되었고, 통계로 소멸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한다

기록되지 않아도, 기억은 살아 있다

어머니의 눈물, 아버지의 한숨

아이들의 울음, 노인의 절규

이 서사시는 그들을 위한 것이다

잊혀진 자들을 위한 추도가

침묵 속에 묻힌 진실을 위한

낮은 목소리의 증언이다

해방정국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가 진정한 해방을 이루지 못했기에

그 날까지 우리는 써 내려갈 것이다

잊혀진 역사의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이제 한반도는 폐허 속 약소국을 탈피해

세계의 강물과 무역이 만나는 나라,

혁명을 창출한 촛불과 민주주의의 기억을 가진 나라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전초 기지가 아니라

지주 속에 스스로 평화를 선택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강화의 바다에서 시작된 포성 이후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눈물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서 있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역사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철조망 너머의 바람이

전쟁의 냄새 대신

평화의 풀 향기를 실어오는 날,

제주 바다와 여순, 광주의 혼령들

분단 비극 속에 산화한 단군 후손 전사들도

희생된 수많은 아이들과 부녀자들도

비로소 조용히 말할 것이다.

“이제는,

정말 끝났노라고.”

고승우
북마크
463 2026.06.03
창작정원 — 광주는 우리의 매일이다

오월이었다.

남도의 하늘은 그 어느 해보다 파랗고

라일락은 그 어느 해보다 향기로웠다.

광주의 거리에는

공수부대가 내려왔다.

시민들은 일어섰다.

"계엄 해제하라!"

그 함성은 전두환의 귀에 이르렀고

그 귀는 워싱턴으로 직통이었다.

광주 미공군기지.

남한 최대의 전술핵 저장소.

핵무기들이 그곳에서 엎드려 있었다.

중국을 향해, 소련을 향해

언제든 날아오를 준비를 한 채.

정보 당국의 보고서가 올라왔다.

광주의 소요가 핵무기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

핵무기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핵기지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

아니, 핵무기가 안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핵무기가 먼저다.

미 국익을 수호하는 것이

무엇보다 먼저다.

카터 대통령 긴급 안보회의 소집했다.

백악관 지하 벙커에서

미국의 전략가들이 둘러앉았다.

광주의 인권? 중요하지 않았다.

광주의 민주주의?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오가는 질문은 미국익 안전뿐이었다:

광주 핵무기는 안전한가?

한미동맹의 핵심 기지는 안전한가?

백악관의 결정이 내려졌다.

카터는 광주시민을 도륙내는 학살명령을 승인했다.

그 허락이 떨어진 순간

광주 시민의 목숨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백악관 마루 바닥위로 나뒹굴었다.

금남로에 탱크가 왔다.

총성이 울렸다.

오월의 광주는

민주주의의 순교지가 되었다.

미국은 눈감고 귀 막고 침묵했다.

냉전이 끝났다고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고 했다.

소련은 해체되었고

동유럽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38선은 무너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분단은 미국의 이익이기 때문에

김대중이 평양으로 갔다.

6·15가 선언되었다.

남과 북이 손을 잡는 순간,

온 겨레의 심장이 뛰었다.

그러나 미국은 무기를 더 사라고 요구했다.

한미동맹 유지를 위해 무기를 사야했다.

평화를 구걸하는 나라가 되었다.

노무현은 10. 4선언을 위해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했다.

문재인이 평양을 3차례, 백두산도 동반 방문했다.

남북이 열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트럼프는 전화를 걸어 합의를 무효화했다.

참수부대가 창설되었고

무기는 계속 팔렸다.

북한은 결국 두 국가론을 선언했다.

"당신들은 미국의 식민지다."

남쪽은 전과 동일했다.

3차례 남북정상회담을 다녀온 문재인의 표정은?

전과 같았다. 남북합의 백지 된 이유?

침묵했다. 미국의 명령으로 못했다는 설명도 없었다.

향후10년 이상 남북정상회담이 불가능해진 현실?

그는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책방에서 열심히 일한다.

그러는 사이 전작권은 미국의 손에 있고,

군대는 미국의 지휘를 받으며,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의 날개를 더 크게 만든다.

극동 전방기지를 넘어 인도태평양까지 참전 가능하다.

한미일 3각군사협력도 강화된다.

광주여.

너는 1980년 5월에 시작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의 배신에서 시작되었고,

미국이 이 땅에 점령군으로 온 그날부터

제주 4.3에 이어 너는 진행되고 있었다.

광주 학살을 명령한 한미동맹 구조는 여전해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아 오늘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반도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겨울은 길고 어둠은 깊다.

분단위에 걸터앉은 미국은 여전히

중국, 러시아를 상대로 미본토 수호를 위한

비밀작전을 벌이고 있다.

한국 정부도 그 비밀을 70여 년 동안 지키고 있어

한국민은 강대국 전쟁으로 언제 재앙을 맞을지

까맣게 모르고 살고 있다.

주한미군은 북한 방어용이라는 한미 정부의 합창만을 믿으면서

한국 민주주의는 한미동맹 속에 좁아지고

국가보안법으로 그 사실조차 발설하지 못한다.

미국에 대한 절대지지가 미맹 속에 남한을 지배하고

냉전의 잔재는 여전히 독기를 뿜고 있다.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

광주는 우리의 매일이다.

그 매일 속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침묵할 것인가, 증언할 것인가.

가짜를 지킬 것인가, 허물 것인가.

망설이고 눈치 보면 후손이 괴롭다.

K-팝 세계 아이콘의 주인공들에게

살만한 미래를 넘겨주어야 하지 않나.

모두가 한마음으로 힘을 모으자.

그러면 반드시 온다.

그 날은 올 것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다.

그 날을 위해

오늘 모두 힘차게 궐기하자.

진실을 밝히자.

카터의 결정을,

광주 체로키 파일의 먹칠한 미국 비밀을.

국보법을 폐지하자.

동맹과 분단이 더 이상

우리의 입을 막는 칼이 되지 않게 하자.

진실을 증언하자.

가짜를 허물어가자.

그 날을 만들어 가자.

그날이 바로

광주의 서사가 완성되는 날이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꽃피는 날이다.

평화통일의 광장에서 모두가 함께 하는 날이다.

고승우
북마크
410 2026.05.16
창작정원 두 개의 쇠말뚝

두 개의 쇠말뚝

동맹이 상전(上典) 되고 보안법이 작두 되니,

이 땅의 민주주의는 숨 쉴 구멍조차 찾지 못해 안색이 창백하구나.

국민의 입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라 떠들어도

보안법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 오들오들 떨기 바쁘고,

행복하게 살 권리는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동맹의 바퀴에 깔려 짓이겨진다.

두 개의 쇠말뚝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안보라는 명목으로 성벽을 높이 쌓아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 좁아진 광장 위엔 외세 군화 소리와 "침묵하라"는 서늘한 명령만 가득하다.

주권자가 제 나라 땅에서 이방인처럼 눈치 보며 사는

이 꼴이 과연 헌법 제1조가 말하는 민주공화국이냐,

아니면 동맹의 그늘 밑에 세워진 거대한 가막소냐!

옛날도 먼옛날 해방 직후 그날 이후

한강 이남 땅덩어리 외군 들어앉은 뒷날

주권은 구석에 처박히고 안보만 번쩍번쩍

으뜸가는 동맹 동맹 한미동맹이라

그 무슨 자주가 있겠느냐 온전한 권리가 있겠느냐

기지는 늘어나고 국민은 모른 채 고개만 끄덕끄덕

제4조라, 미국 권리 속에 주한미군 위세 당당

SOFA라, 이름하여 한국 법과 공권력 밖 특권

전략적 유연성이라, 이름하여 국경 넘어 작전하기

이름은 그럴싸하나 속내는 따로 있으니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채 끌려다니는 형국이라

서울이라 용산 한복판 일본군 깃발이 성조기로 바뀌고

평택 세계 최대의 미군기지 위세등등

여기가 바로

사령관, 유엔사령관, 연합사령관

모자 셋을 눌러쓰고 한 몸에 세 개 권한을 얹어놓고

이리저리 명령을 굴려대니

이 나라 군대인지 저 나라 군대인지

경계가 흐릿흐릿 꿈결 같도다

몸뚱이 하나에 세 개 사령관 모자 쓴 히드라 대장 봐라.

유엔사도 내 것, 연합사도 내 것, 주한미군도 내 것 삼위일체가 이것이라

세 개 모자를 번갈아 쓰며 하나는 국제라 하고

하나는 동맹이라 하고 하나는 주둔이라 하며

왼손은 전략 무기로 동북아를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우리 군 작전권 위에다가

"현상 유지" "전쟁 억제" 깔짝깔짝 쓰다가도

한국 정부와 맨날 맞장뜨며 거들먹거리네.

간댕이 부어 남산만 하니 지하의 일본군 대장이 부럽다고 땅을 치네.

점령군 위세 하늘 찌르는 동맹조약 봐라

제4조를 옷처럼 두르고 SOFA를 장갑처럼 끼고

한반도 문제를 한국과 상의 않고

한국 땅에서 중국 러시아 상대 핵타격 연습한다.

한국 법은 우리 몰라닷 주한미군 기지는 미국법 적용!

주한미군 미 본토 수호 전략 SIOP, OPLAN 비밀리에 수행하니

3차 대전 몰고 올 위험 상존해도 한국 정부 침묵하네.

미국의 도깨비 방망이 전략적 유연성 나온다

국경은 없고 방향만 있다. 동쪽이면 동쪽 서쪽이면 서쪽

어디든 출동 준비 끝 중국이닷, 소련이닷, 러시아닷

SIOP 핵전쟁 계획 속에 한반도 편입되고

주한미군 전술핵 천 기 보유했을 때도 모두 소련 중국 타격용이었는데

북한 방어를 위해서라고 선전해 왔으니

하늘같이 높은 비밀 마다같이 깊은 작전계획

한국 주권은 잘라먹고 전략적 이익은 청해먹고

내가 언제 그랬더냐 흰구름아 물어보자

오산 기지 상공에서 모두 별 탈 없다더냐.

OPLAN 8800은 대중국 대러 비밀 핵타격 계획

한국 정부도 몰라 국민도 몰라

오산 군산 기지에서 날마다 정찰기 뜨고

중국 향해 핵전쟁 연습하는데

한국 땅이 핵전쟁 전방기지가 되었으되

한국 국민은 그 사실을 모르고 평화를 즐기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무섭다더니 작전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상황만 기다리는 형국이라

전쟁은 계획 속에서 70년간 한국의 현실이었네.

지도 위에 선 긋고 적을 만든 뒤 그 선 위를 넘나들며 작전이라 부르니

이 땅은 발판이요 한국 국민은 존재 없는 볼모라네.

미군 비밀작전 SIOP와 OPLAN, 숨어서 나오고 감춰서 움직인다.

서슬 푸른 성조기 나부끼는 몇 십 리 철책 속 비밀기지 속에

전문 용병 두고 군사고문단 두고 전략가 두고

국방박사 통역 두고 정치박사 연락장교 두고

박사박사박사박사의 합창소리 - 미국 만만세!

작전 행여 새어날세라 기밀문서 자물쇠 잠그고

동맹 행여 깨질세라 방위비 해마다 올리고

한국국민 행여 알까 봐 OPLAN 8800 철통 같이 봉인한다.

한국 국회, 정부는 미군 비밀작전 모른 채 침묵하며 권력투쟁에 열심

국민은 정치의 속임수에 바보가 되어 그냥 행복하다네

사이비 민주 앞세운 국민 기만 정치권력 납신다

입으로는 자주를 외치고 손으로는 서류에 도장 찍고

뒤로는 눈감고 모른 척 앞으로는 국민에게 설명 생략

묻지 말라, 알 필요 없다. 안보는 복잡하다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니

자주가 실종된 쇳소리 국치가 이보다 더할 소냐

불평등 조약 묵인 속 한국인은 후순위, 미군자 즉 치외법권자.

환경오염 조사? 미국이 허가해야로!

미군사고 배상은 최소한으로!

방위비라 이름 붙여 돈을 거둬 기지 확장에 쓱싹

오염 투성이 옛 기지 정화는 한국 국민 몫

그 대가는 안전 보장이라지만

그 안전 누구의 안전인지 물으면 대답은 언제나 모호모호

어허, 저기 보아라. 법전(法典) 중의 으뜸,

국보법이란 몽둥이가 번쩍 나온다.

낡은 법전 누더기 걸치고도 눈빛은 시퍼렇게 살아

입단속 족쇄로 목을 죄고 혀를 묶어

말 한마디 글 한 줄에도 딱지 붙여 쥐어짠다.

이 법은 동맹을 지키는 울타리라 비판하면 이적이요 의심하면 동조다.

묻는 입은 죄가 되고 따지는 말은 유죄 증거 되니

조약은 건드릴 수 없고 기지는 말할 수 없다.

비밀작전은 입 밖에 내는 순간 금기라

이리하여 철책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머릿속에도 있구나.

생각은 스스로 검열하고 입은 먼저 닫혀

동맹은 더 굳건하다 떠들어대는 사이

그 속내를 캐묻는 자는 홀로 끌려간다.

아, 국보법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파수꾼이라

총칼 없이도 질서를 세우고

법조문 몇 줄로 침묵을 길들이니

동맹의 그늘 아래 가장 충직한 수문장

이름 하여 국보법이렷다.

이 법이 한미동맹, 국보법 비판 세력 잡아놓고 길길이 날뛰며 호통친다.

네놈이 반미 세력이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평화활동가요

평화활동가면 더욱 좋다. 평화 통일 자주 주권 다 합쳐서

친북좌빨 오적이 그 아니냐? 아이구 난 평화활동가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시민기자요

시민기자면 더욱 좋다. 가짜뉴스 편파 선동 국보법 위반한

반국가 주범이 바로 너 아니더냐? 아이구 난 시민기자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대학교수요

대학교수면 더욱 좋다. 좌편향 강의 의식화 교육

이념 세뇌범 아니냐? 아이구 난 대학교수 아니요

그럼 네가 무엇이냐? 그냥 국민이요

국민이면 더더욱 좋다. 안보해치는 이적세력이란 너를 두고 이름이다

가자 이놈 큰집으로 바삐 가자. 애고 애고 난 아니요

나는 본시 이 나라 국민으로 세금 내고 병역 하고

주한미군 주둔 비용 방위비 분담금으로 내면서 살아왔소.

내게 죄가 있다면 자주를 주장한 그 죄밖엔 없습네다.

어허 슬프다. 국민이 동맹의 잘잘못을 논하는 그 자리조차

국보법이 "간첩 활동이다", "불법 집회다" 하여

쓸어담고 찢어발기고 구겨넣고 밟아버리니

아아, 대체 민주주의는 어디에 있고 국민의 행복은 어디에 있느냐?

국민의 한숨은 아무도 듣지 않는 새벽 바람처럼 스러져가는데 -

정부와 국회의원은 동맹 눈치 보며 고개 숙이고 "안보다" 외치고

언론은 국보법이 두려워 펜을 꺾어버리니

"나라가 누구의 나라냐, 국민이 누구냐"고 묻는 소리는 허공속으로 흩어진다.

어쩔꺼나 어쩔꺼나 이 나라 주권 어쩔꺼나

안보라는 이름 아래 묻혀버린 질문 어쩔꺼나

국민의 기본권은 동맹과 국보법의 쇠말뚝에 신음한다.

동맹과 법이 짝을 지어 춤추고 노래한 지난 70 여년

한미동맹은 바깥에서 철책을 두르고

국가보안법은 안에서 입을 막아

겉과 속이 맞물려 숨통을 죄어오니

겉으로는 안보요 속으로는 침묵이라

헌법이라 적어놓은 자유와 권리 종이 위에선 번듯하나

현실에선 이리저리 깎이고 잘려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네.

여봐라 들어봐라 이 기막힌 사연을 들어봐라

헌법이란 것이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있다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제2조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하였으되

주권은 어디 갔느냐

한미동맹과 평택 기지 철책 안에 갇혀 있고

OPLAN 8800 비밀 서류 속에 봉인되어 있고

국보법 육법전서 사이에 눌려 질식해 있고

방위비 분담금 협상 테이블 위에 팔려 나가 있고

주한미군사령관 모자 세 개 아래 납작하게 짓밟혀 있다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하였으되

행복은 어디 갔느냐

기지촌 여인의 눈물 속에 흘러가 버렸고

오염된 미군기지 지하수 속에 녹아 없어졌고

국보법 위반으로 끌려간 국민의 가막소 독방에 갇혀 있다

제19조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 하였으되

양심은 어디 갔느냐

찬양·고무죄 조문 앞에 무릎 꿇고 있고

이적표현물 딱지 앞에 혀를 깨물고 있고

국정원 사찰 그늘 아래 숨죽이고 있고

동맹 비판하다 빨갱이 낙인 맞고 사라져 버렸다

제21조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진다 하였으되

언론은 어디 갔느냐

주한미군 비밀작전 보도하다 군사기밀죄로 묶여 있고

SOFA 불평등 고발하다 반미 선동죄로 찍혀 있고

방위비 협상 내막 캐다 국익 저해죄로 낙인찍혀 있고

주권 회복 외치다 종북좌빨 낙인 맞고 뒷골목에 처박혀 있다

에라 이 나라 민주주의 공간이 얼마나 넓으냐

한미동맹이 한쪽 벽이요 국보법이 다른 쪽 벽이라.

전략적 유연성이 천장이요 방위비 분담금이 바닥이라.

사방이 꽉 막힌 좁디좁은 방 안에

국민은 쪼그리고 앉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겠다

민주주의는 어디서 살고 있느냐

미군 기지 담벼락 밖 좁은 골목에서 살고

국보법 조문 사이 바늘구멍만 한 틈새에서 살고

방위비 고지서 납부하고 남은 푼돈으로 살고

전작권 환수 꿈꾸며 겨우겨우 숨만 쉬며 살고 있겠다

헌법은 국민의 것이라 하였으되

동맹이 헌법 위에 있고 국보법이 헌법 위에 있고

주한미군사령관 모자 세 개가 헌법 위에 있으니

헌법이란 두 글자가 이 땅에서 가장 크고 가장 공허한 거짓말이 되었겠다

허허허 어쩔 건가 어쩔 건가

두견이는 두 개의 쇠말뚝 사이에 갇혀 오늘도 서글피 울어쌌는데

이걸 어쩔 건가 어쩔 건가.

PS.

한미동맹과 국가보안법은 본래 안보를 내세우지만,

현실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숨통을 조이고

국민의 헌법적 권리와 행복추구권을 위축시키는 장치처럼 작동할 수 있소.

동맹의 이름 아래 비밀과 예외가 늘어나고,

국보법의 그림자 아래 비판과 표현의 자유가 움츠러들면,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기보다 감시와 통제의 대상처럼 밀려나게 되오.

그리하여 헌법이 보장한 사상·표현·집회의 자유와 인간다운 삶의 권리가

안보라는 말 앞에서 쉽게 뒤로 밀리면서,

민주주의의 공간은 좁아지고 시민의 행복이 짓밟히고 있다오.

*************

*************

설명문

위의 글은 한미동맹과 국보법의 문제점에 대해 쓴 ‘두 개의 쇠말뚝’이라는 제목의 풍자시다. 이 시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조약 제4조(미국의 주한미군 배치 권리보장), 주한미군의 비밀주의를 규정한 SOFA,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과 OPLAN 8800(대중국·대러 비밀작전), 주한미군사령관의 UN사령관·연합사령관 겸직 문제 등 한미동맹의 구조적 문제점을 풍자했다.

위의 풍자시에 대해 부연설명을 드리고 싶다.

한국의 자주, 민주주의는 한미동맹과 국보법이라는 두 개의 쇠말뚝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한미동맹은 미국이 슈퍼갑, 한국이 을이란 상하, 예속 관계로 국민의 헌법적 권익을 짓밟고 국보법은 한미동맹 문제제기를 이적과 친북이라 낙인찍고 짓이긴다.

국보법은 21세기 최악의 군사동맹을 수호하는 법이 되어 외세에 봉사하고, 한미동맹도 국보법을 지키는 안전판의 하나가 되어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이 구조는 민주주의·주권·인권이라는 헌법의 핵심 가치를 심대하게 훼손하는 두 개의 쇠말뚝과 흡사하다.

한미동맹의 문제점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 SOFA, 주한미군의 중국, 러시아 상대 비밀작전 OPLAN 8800, 이 작전을 한국 정부도비밀로 해 한국 국민은 지난 70년간 까맣게 모르고 지내왔다. 또한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강화로 문제 심각, 주한미군사령관이 유엔사령관등 사령관 모자 3개 쓰고 한국의 점령군 대장과 같은 모습으로 군림하는 것 등이다.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원천 봉쇄하고 추악하게 원시적인 방식으로 처벌하는, 국제사회가 오래전부터 지탄하는 악법이다. 이 법은 특히 심각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한미동맹을 신성시해서 굳건히 뿌리내리게 한 결과 한국사회의 주한미군에 대한 무지 즉 미맹(미맹)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독하다.

한미동맹과 국보법으로 빚어진 문제를 간략히 압축해 본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21세기 지구촌에서 가장 심각한 불평등 조약으로 이 조약 제4조는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미국의 권리(right)로 되어 있어 점령군에 준하는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고 있다.

SOFA(주한미군지위협정)은 한미상호방위조약 4조의 부속협정으로 한국이 제공하는 주한미군 기지, 시설에 한국의 법과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다. 이는 필리핀, 나토 회원국이 미국과 맺고 있는 군사관계가 주권국간의 평등관계에서 맺어진 것과 너무 차이가 크다.

주한미군은 지난 70 여년 동안 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한 미국의 세계전략(SIOP, OPLAN)을 중국과 소련, 러시아를 상대로 수행하면서 이를 미국 법에 의해 비밀로 분류하고 한국 정부도 그에 따르기로 하면서 한국민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한미 두 정부는 주한미군이 대북 방어용이라는 점만을 앞세우고 SIOP, OPLAN 등은 함구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 러시아간 강대국 무력충돌로 비화할수 있는 주한미군의 비밀작전에 대해 한국 국회도 이에 대해 개입할 수 없어 한국민의 헌법적 권익이 심각하게 짓밟히고 있다.

주한미군사령관이 UN사령관·한미연합사령관까지 겸직하며 사실상 한국 안보의 최고 결정권을 행사한다. 세계 전사에서 사령관 한 사람이 세개의 사령관 직함을 가지고 주둔국에 군림한 경우는 점령국과 피점령국 관계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해괴한 경우이다.

미국은 최근 중국에 대한 포위, 압박 전략을 강화하면서 주한미군은 전략적 유연성 강화를 앞세워 향후 대만에서 전쟁이 날 경우 주한미군이 참전한다는 사실을 공언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한국을 미중 패권경쟁에 끌어들이는 위험을 안고 있으며 미중 무력충돌 시 국제법적으로 주한미군의 기지가 있는 한국도 책임을 면치 못하는 구조다.

국가보안법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면서 '적의 이롭게 한 행위'라는 모호한 조항으로 한미동맹 비판까지 탄압하는 도구로 작동해왔다. 국보법은 주한미군 철수나 SOFA 개정 같은 합법적 주권 논의조차 ‘이적 행위’, '종북'으로 몰아 낙인찍어 차단하거나 처벌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의 관계는 '동맹 보호 = 국가 안보'라는 고정관념을 강제하고 주입하면서 비판의 공간을 원천 봉쇄한다. 국보법이 동맹의 문제점이 드러나는 것을 막는 '호위무사' 역할을 수행하는 현상이다. 결과적으로 동맹은 국보법을 통해 비판을 억압받고, 국보법은 동맹을 명분으로 존치되는 현상이 고착화되어 있다.

국민의 알 권리는 주한미군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군사행동을 규정한 OPLAN 8800 같은 비밀작전과 한국 정부의 진실에 입을 닫는 직무유기 앞에서 무력화된 상태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제1조는 동맹의 군사작전 우선주의 앞에서 유명무실하다.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은 주한미군의 비밀작전, 전략적 유연성으로 강대국간 전쟁에 한국이 휘말릴 구조 앞에서 대단히 취약한 구조로 방치되어 있다.

정치권은 동맹과 국보법이라는 두 개의 쇠말뚝으로 제한된 민주주의 공간에 국민을 가둬놓고 권력다툼을 하는 양상울 반복하고 있다. 언론도 두 장치 앞에서 자기검열에 길들여져 감시자의 역할을 포기한 채 국민에게 알릴 책무에 눈을 감고 있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국제질서가 대지각변동을 일으키고 미중 갈등이 격화되는 상황에서 한반도 또한 심각한 격동기를 겪고 있다. 한국은 경제와 군사력이 세계 선진국 상위권 대열에 올라 있고 K-문화는 지구촌의 부러움과 환호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한미동맹과 국보법의 문제를 털어내고 새 질서를 세우는 노력이 절실하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하니 더 늦기 전에 비정상이 정상화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로 본인은 위와 같은 문제점에 대해 ‘불평등 한미동맹 실종된 한국주권’, ‘150년 한미관계사와 주권국가로 가는 길’. ‘한미동맹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인문사회과학적 시각으로 본 국보법’ 등의 저서를 통해 지적한 바 있다.

고승우
북마크
128 2026.04.28
창작정원 가짜 전쟁영웅

1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건국 이래 최대의 전쟁영웅으로 자타가 공인해 온 인물이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이 제기되어서다. 그는 호주에서 생존한 전쟁 영웅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이 나라 최고의 정예특별부대 SAS에서 복무했다.

그는 호주에서 살아있는 전쟁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2006년 무공훈장, 2011년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데 이어 2012년 우수군인으로 선정되었다. 2013년 제대한 뒤 퀸스랜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2015년 퀸스랜드의 TV 방송사의 부사장으로 취임하고 후 고속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는 세계 1차 대전이래 호주 병사가 보여준 용기와 희생의 상징이었으며 완전한 병사의 전형이라고 인정받았다. 호주의 한 군사전문가는 그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거칠면서 활달하고 날카로우며 지적 능력이 탁월해서 어떤 역경에 처한다 해도 목적을 달성하고 귀환할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민이 존경하는 진짜 사나이 군인중의 군인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마른하늘에서 날벼락도 분수가 있지 국민적 영웅이 추악한 전쟁범죄자라는 언론보도가 나온 것이다. 그가아프칸 복무중 저지른 전쟁범죄가 폭로되면서 그의 빛나는 이미지는 산산조각 나고 호주 사회를 경악케 했다.

호주의 시드니 모닝 헤럴드 등 3개 신문은 2018년 로버트 스미스(44살)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해외파병 되어 군 복무하는 동안 아프칸에서 벌어진 여러 작전에서 비무장 민간인들을 살해했다고 보도한 것이다.

-로버트 스미스 전 상병은 2009-2012년 아프칸에서 근무할 당시 비무장 포로 또는 민간인 6 명을 살해하는데 가담했다. 스미스는 수삽을 채운 농부를 10m 절벽 아래로 발로 차 떨어뜨려 이빨을 부러뜨렸고 결국 사망케 해다. 당시 아프칸인은 공포에 질려 나뭇잎처럼 벌벌 떨었다. 스미스는 부상한 아프칸인을 부하를 시켜 머리를 총으로 쏘아 살해하도록 강요했다. 그는 그 상황을 자신이 본 가장 아름다운 광경이라고 떠벌렸다.

스미스는 기관총을 쏘아 포로로 잡은 아프칸 전사를 살해하고 그가 다리에 끼고 있던 의족을 벗겨 전리품으로 챙겼고 뒤헤 부대원들이 술을 마실 때 잔으로 사용토록 했다. 스미스는 동료군인을 협박하고 못살게 굴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스미스가 하급자에게 ‘ 다음 정찰을 나가서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 내 뒷머리에 총알이 박힐 줄 알아’라고 협박한 사실이다.

위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스미스는 제네바 협약에 규정된 전쟁범죄인에 해당했다. 이 협약은 전쟁 중에 야만적 행위는 금지해야 하며 이에 따라 포로에 대한 고문이나 살인 또는 잔혹행위를 금하면서 부상병이나 병든 병사에 대해 보호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호주를 발칵 뒤집어놓은 언론보도에서 전쟁범죄인으로 지목된 주인공인 제대군인 로버트 스미스는 아프카니스탄 전쟁 등에 참여해 빛나는 무공을 세워 수많은 훈장을 받은데 이어 영국 및 영연방 왕국 회원국의 군인에게 수여되는 최고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고 상병으로 제대한 전직군인이었다. 2011년 그는 자신의 부대를 공격한 탈리반 기관총 사수들을 혼자서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2m 가까운 장신인 그는 2010년 탈리반 반군의 기관총에 맞아 쓰러진 동료를 단신으로 구한 공로로 국가 최고훈장을 수여해 그 명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 훈장은 전쟁 중 적과 맞서 싸우면서 나타낸 뛰어난 용맹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육군, 해군, 공군의 장교, 부사관, 병사 등을 상대로 수여하는데 1856년부터 현재까지 총 1천6 백 여 명이 수여받았을 뿐이다. 그는 17년간 군에 복무하면서 아프칸에서 전공을 세운 것이 인정받아 자신의 초상화가 호주 전쟁 기념관에 게시되어 있다. 스미스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론보도가 나온 직후 수많은 기자들 앞에서 격렬한 어조로 반박했다.

-나는 전투규정을 항상 준수했다. 언론이 문제를 제기한 민간인 살해는 전투 중에 발생한 것이고 일부는 사실무근이다. 이는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군인에 대한 최악의 모욕이다. 이번 사태는 나를 시기한 옛 동료들이 거짓말을 하고 모함하려 내 등 뒤에 총질을 한 것이다.

-나를 모함하는 이 보도는 가짜뉴스다. 언론인들이 낚시의 미끼를 무는 고기처럼 허위사실에 현혹되어 망발을 저지른 것이다. 나는 즉각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것이며 재판을 통해 명명백백하게 진실이 규명되도록 노력해 이들 엉터리 언론에 철퇴를 가할 것이다.

스미스는 공언한대로 즉각 소송을 제기했고 법정심리가 시작되면서 호주에서 발생한 금세기 최대의 사건으로 주목받았다. 스미스가 호주 역사상 가장 명예스런 훈장을 받은 살아있는 전직 군인이었고 그가 과연 전쟁 범죄를 저지른 인물로 전락할지 여부에 관심이 집중됐다. 스미스가 언론을 제소한 뒤 호주가 지난 2001-2021년까지 아프칸에 군대를 파견한 바 있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참전 군인들이 불미스런 일을 저질렀는지 여부 등에 대한 진실 규명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제기됐다. 하지만 호주 국방부는 스미스 사건에 대해 민사 소송일 뿐이라며 언급을 자제했다.

호주에서 전쟁 범죄에 대한 소송이 공개된 재판에서 심리된 것은 최초였다. 이 사건은 호주 정부가 아프칸에 파병된 호주 특수부대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해 군인 25 명이 2007-2013년 동안 아프칸 민간인 39 명을 살해하는데 가담한 사실을 확인해 1명을 체포했다고 발표한 뒤 3년 만에 발생했다. 소송은 4년이나 지속되었다. 재판 기간 동안 40 명의 증인이 출석했는데 그 가운데는 아프칸 주민, 국방장관, SAS 부대 제대군인 등이 포함돼 스미스의 삶에 대해 세세한 것 까지 밝혀졌다. 재란 과정에서는 베일에 싸여있던 호주 정예부대의 내면에 대한 비밀들이 밝혀졌다. 증언에 나선 전현직 부대원들은 부대내 불미스런 일들이 부대 내의 경직된 분위기 때문에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폭로했다.

스미스가 언론사들을 자신의 명예를 훼손한 협의로 고소하면서 언론사들은 자신들의 보도가 사실이라는 점을 법정에서 확인받아야 했다. 호주의 법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2021년 6월 재판이 시드니의 연방법원에서 시작되었다. 피소된 언론사들은 보도한 내용이 사실이라는 점을 입증하는데 노력했다. 스미스는 언론보도가 가짜뉴스라고 연일 떠들고 호주 국방부 등이 침묵하면서 호주 언론은 후속 보도를 계속 이어갔다.

그의 부대원이었던 전직 군인은 절벽에서 떠밀려 죽은 아프칸 인에 대해 증언했고 이는 당시 현장에 있던 아프칸 민간인들의 화상 증언에 의해 뒷받침 되었다. 그러나 스미스와 다른 동료 군인들은 그는 탈리반 반군 정찰병이었고 그를 살해한 것은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소송이 진행되면서 스미스의 명예에 금이 가는 새로운 증언들이 제기되었다. 그의 전처는 그가 집 뒤뜰에 군인들이 의족으로 술을 마시는 사진과 군사기밀이 담긴 유에스비를 어린이 점심 도시락에 담아 묻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에 대해 변명했다.

-내가 그 유에스비를 한때 소유했지만 땅에 묻은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가 그가 말을 바꿔다.

-나는 그 유에스비를 휘발유로 태워버렸는데 그것은 증거를 없애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그의 친구가 충격적인 새로운 증언을 제기하면서 사태가 급변했다.

-스미스는 아프칸 민간인을 살해하는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

이 증언은 전쟁범죄에 대한 것으로 명예훼손이라는 민사의 영역이 아닌 형사 사건에 속했다. 결국 스미스가 범한 전쟁범죄에 대한 사실이 언론에서 보도됐다.

-스미스는 현재 호주 군범죄특별수사대가 수사 중인 호주 특수부대 SAS 군인들의 아프칸 민간인 살해 사건과 관련된 세 명 가운데 하나다.

새로운 전쟁범죄 사실이 밝혀지면서 SAS군인 세 사람이 2012년 아프칸 밀 경작지에서 비무장상태인 아프칸인을 사살해 저지른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됐다. 미국은 호주 특별대가 저지른 많은 전쟁범죄 사실 때문에 이 부대와의 합동작전을 중단할 것을 경고한다고 호주 정부에 통고했다.

2.

스미스는 1978년 11월 호주의 한 법관의 큰 아들로 태어나 1995년 고교를 졸업한 뒤 다음해인 1996년 18살이 되자 군에 입대했다. 그는 훈련을 마친 뒤 소총부대에 배속되어 분대장이 되었고 그 1999년 동티모르에 주둔중인 파병부대원이 되었다. 스미스는 1998년 에마를 시드니에서 만나 2003년 결혼했다. 2010년 쌍둥이 딸이 태어났고 2015년 제대하면서 이혼했다.

그는 2004년 피지. 2005-2006년 이라크에 파견되었다가 2006-2007년 아프칸에 배치되었다. 2009년 하사관 교육을 마친 뒤 수색대에 배속되었다. 그 후 아시아 지역에서 근무한 뒤 2009-2012년 아프칸에 재배치됐다.

2011년 1월 23일 그는 호주 총통가 참가한 시상식에서 빅토리아 십자 무공훈장을 받았다. 당시 SAS 일부 전현직 부대원들은 그가 그 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식의 문제를 제기했었던 것으로 후에 밝혀졌다. 2014년 1월 그는 아프칸에서 50 차례의 위험한 작전에서 소부대를 성공적으로 지휘한 공로로 군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그의 초상화가 그가 입고 있던 군복과 함께 호주 전쟁기념관에 게시됐다. 그는 훈장을 받은 뒤 전방 수색대 지휘관으로 복무할 것으로 기대하면서 말했다.

-수색대에 배속되면 그것은 호주 최정예부대 SAS의 최강 군인이 되는 것과 같고 그렇게 되면 비로소 사나이로 인정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예상과 달리 그는 2013년 35살이 되자 하사로 일선부대에서 물러나 2015년까지 예비군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2013년 퀸스랜드 대학에서 그에게 경영학 공부를 할 수 있게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38살이 되던 2016년에 대학을 졸업하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18살에 입대해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일반사회에 적응할 전문성이 부족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이제부터 사회에 기여하는 직업을 갖겠다.

그는 2015년 4월 퀸스랜드 TV 그룹의 한 회사에 부 책임자로 취업했고 두 달 뒤 최고 책임자로 승진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다가 2017년 호주 군수사당국이 스미스가 포함된 불법적인 전쟁 행위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상황이 스미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2006년 아프칸 코라 파스전투에서 한 민간인을 탈리반 소속원이라고 주장하며 살해한 사건에 대해 호주 여러 언론이 일시에 관련기사를 쏟아냈다.

-호주 SAS 부대원 2명이 순찰을 나갔다가 15-18세로 추정되는 아프칸 소년 한 사람이 호주군 초소로 다가왔다가 되돌아가가는 것을 목격했으나 그냥 지나치기로 하고 본부에 보고했다. 그러자 스미스와 다른 부대원 1명이 현장으로 달려와 9mm 권총으로 사살한 뒤 본부에는 적 두 명을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스미스는 순찰 도중 적을 발견했다는 점도 덧붙였다. 그러나 맨 먼저 보고된 내용은 비무장 소년 한 명이라고 되어 있었던 점이 문제가 되었다. 본부에서 스미스가 보고한 내용을 캐묻자 스미스는 자신이 기억을 잘못했다고 얼버무리면서 일단락 됐다.

이 보도가 나간 뒤 2017년 10월 호주 군 당국이 아프칸에서 SAS 부대원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조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다.

- 군 당국이 해외참전 용사들에 대해 조사한다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는 국가의 명을 받고 목숨을 걸고 싸운 참전용사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스미스는 더욱 궁지에 몰렸다. 2018년 6월 SAS 부대원들이 2012년 9월 아프칸 다르완 부락을 공격할 때 아프칸 민간인 한 명에게 수갑을 채운 뒤 절벽 아래로 떨어뜨려 사망케 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이 보도가 나간 뒤 호주의 언론들이 스미스에게 치명적인 사실들을 보도했다.

-스미스는 2012년 아프칸 다르완 부락 민간인 피살 사건에 연루된 SAS 부대원 가운데 하나로 밝혀졌다. 스미스는 동료 군인들에게 가혹행위를 했으며 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스미스는 그해 8월 동료 부대원에게 이슬람교의 지도자 한 명을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당시 그 지도자는 비무장이었고 포로로 잡힌 상태였지만 모스크 성당에서 끌려나와 살해됐다. 이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들 보도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부인했다.

-나는 결코 그런 사실이 없다.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스미스는 자신이 군부대내에서 동료들을 못살게 군 위선자라고 주장한 옛 동료들의 증언을 언론이 보도하자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그것은 나를 흠집 내기 위해 언론이 과장한 것으로 전혀 사실 무근이다. 언론이 재판부에 제출하기 위해 그런 것을 조작한 것은 비열한 행위다. 나를 모함한 옛 동료들은 위선자다. 내가 부하들을 괴롭혔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나에게 하고 있는 짓과 같다. 이는 비겁한 행위다. 그들이 그늘에 숨어서 하는 짓은 집단 겁쟁이 짓과 같다. 나는 남을 괴롭히는 것을 싫어한다. 나는 그것에 염증을 느끼는 사람이다.

스미스는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그는 아프칸 복무 중 전쟁범죄에 대한 혐의로 내사를 받기 시작했고 2018년 11월 연방검찰이 본격 수사를 개시했다. 아프칸 현지인들은 호주 정부의 전쟁범죄 조사에 대해 환영했다.

-호주 정부의 행동은 20여 년간에 걸쳐 미국이 주도한 연합군에 의해 자행된 전쟁범죄에 대한 진상 규명의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연합군에 의해 희생되거나 그들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의 가족은 진실이 전면적으로 공개되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들에 의해 초래된 피해에 대해 배상해야 할 것이다.

- 탐사저널리즘이 연합군의 전쟁범죄에 대해 진상을 밝히고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대단히 훌륭하다. 언론의 진상 규명 노력으로 진실에 가까이 갈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할 것이다. 호주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배상하고 사과해야 할 책무가 있다.

스미스가 제소했던 언론사의 한 기자는 스미스가 받은 훈장이 어떻게 처리되어야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고 분노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 진실 규명을 통해 밝혀진 것은 그가 뻔뻔한 거짓말 장이라는 점이다. 이번을 계기로 미국이 주도한 아프간 전쟁에 대한 모든 진상이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호주 정부도 호주 군지휘부나 의회가 전쟁범죄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도 눈감아 주었는지 등도 규명되어야 한다.

3.

2023년 6월 재판부는 스미스가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 대해 11주 동안 증인을 소환하는 방식 등으로 심리를 벌인 끝에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번 판결은 호주에서 호주군에 의해 저질러진 전쟁범죄에 대해 최초로 내려진 법정 심판으로 기록됐다. 재판부는 스미스가 아프칸 민간인 4 명을 살해하면서 복무규정을 어긴 것이 입증되었다고 판시, 스미스는 패소했다. 당시 판결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아프칸과 같은 복잡한 전쟁터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사고는 어느 것도 명확한 것은 없다. 이는 모든 전쟁도 마찬가지다. 거짓이나 꾸며낸 것에서 진실을 가려내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하지만 그것을 중단할 수는 없다. 언론이 스미스에 대해 보도한 전쟁범죄 혐의에 대한 기사는 충분한 근거에 입각해 진실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반면 스미스는 군복무법과 윤리 규정을 위배했고 그것은 범죄에 해당한다. 이런 행위는 전쟁터에서 민간인과 포로를 보호할 것을 규정한 제네바협약에 위배된다.

- 스미스에게 제기된 네 건의 살해 혐의는 사실로 밝혀졌다. 2009년 4월 위스키 108 작전에서 SAS는 탈리반 부대를 폭격하고 기습해 비밀지하 터널에서 두 명이 잡혔을 때 의족한 사람을 스미스가 살해했다. 스미스는 아프칸인을 엎어놓고 그의 등에 기관총 4-5발을 발사해 살해하고 그의 의족을 벗겨 부대로 가져가 부하들이 술을 마실 때 술잔대신 사용토록 지시했다. 이는 냉혹하고 비인간적인 행위다.

- 2006년 6월 2일 SAS 부대원 2 명은 매복해 있다가 그 소년이 70m 정도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소년은 비무장이었다. 그 곳은 탈레반이나 민간인들이 항상 이용하는 언덕길이었다. 두 병사는 후에 그 소년이 부근에 숨어 있던 폭도들에게 협조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두 병사는 자신들이 숨어 있던 장소에서 상당 거리 떨어진 곳을 소년이 걸어가는 것을 목격했다. 소년은 배낭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방향을 바꿔 걸어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부대원들은 당시 소년에게 발사하지 않았다. 그를 사살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닥칠 위험을 감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발사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런 행동은 당시 그들의 임무가 잠복해서 주변을 관찰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스미스는 그러나 다른 내용으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두 명의 아프칸 놈팽이가 어두워지기 두 시간 전 어슬렁거리며 우리가 잠복해 있던 관측소로 접근했다. 그래서 나와 다른 SAS 부대원이 두 놈을 사살했다. 그 놈들이 우리가 숨어 있는 것을 알아챘는데도 그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떼고 현장에서 물러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와 동료 부대원은 그들을 제거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시체를 처리하고 다시 초소로 돌아왔다. 나는 이런 상황을 상부에 보고했다.

스미스가 현장 상황에 대해 다른 말을 하는 것에 대해 지적을 받았을 때 그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그랬다고 변명했다. 스미스가 동일한 상황에서 발생한 사실을 놓고 왜 총을 발사했는지 등에 대해 말을 바꾼 것은 전투 중 규정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른 의혹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스미스는 과거 동료들이 자신이 무공훈장 등을 받은 것에 대한 시기심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많은 전직 부대원들이 동일한 문제를 제기한 것은 매우 주목된다. 이는 SAS 지휘부가 소속 군인들에 대한 감독과 관리를 부실하게 했다는 의혹으로 연결되고 있다.

실제 일부 칭송받는 군인들의 전쟁 영웅행위가 일부는 정부나 군 당국이 자신들의 해외파병 결정이 정당했다는 것을 내세위기 위해 부풀려진 결과로 지적되는 일이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전적을 과대 포장하고 포상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로 지탄 받아야 할 것이다. 스미스가 최고 훈장을 받은 것에 대한 동료 부대원들의 문제제기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부대 지휘관들을 상대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미스는 2017-18년 성명 미상의 여인과 6개월간 동거했으며 그녀가 낙태수술을 하려는 것을 사설탐정을 고용해 감시하고 그녀를 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스미스는 그것을 부인했지만 거짓인 것이 들통이 났다. 스미스는 2017년 12월 캔바라의 한 호텔에 투숙한 그 여인을 폭행했다. 그 여인이 술에 취해 계단에서 넘어져 얼굴을 다치자 스미스가 그녀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그녀는 법정에 서서 울면서 스미스가 어떻게 자신에게 폭행을 가했는지 증언했다. 스미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스미스는 그런 사실을 부인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그녀의 상처를 얼음찜질하는 등 도왔다고 주장했으나 다 허위로 밝혀졌다.

4.

2023년 7월 스미스는 일심법원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으나 그의 소속 TV 사가 그에 반대하면서 1백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법적 조치가 취해졌다. 스미스 개인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벅찬 거금이었고 결국 항소는 진행되지 않았다. 그는 패소 직후 방송사 사장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재판에서 패소했지만 형사 사건으로 피소되지는 않았다. 호주 형법에 따르면 민사가 형사로 이어지려면 복잡한 입증 절차가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호주 전쟁기념관 위원회는 스미스가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이 확인 된 뒤 그에게 호주 최고 무공훈장을 수여한 결정이 문제가 있었으며 추후 유사한 사태가 발생치 않도록 조치할 것이라고 밝혔다.

탈리반 대변인은 스미스의 재판이 일단락되자 아프칸에서 외국군에 의해 무수한 전쟁범죄의 하나라고 지적하면서도 국제적으로 그것을 규명하는 시도가 취해질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전망했다. 스미스 사건으로 호주 군당국이 해외 파병군인의 전쟁범죄 가능성에 대해 전현직 군인 40 여 명을 상대로 조사했지만 단 1명만이 기소됐을 뿐이다. 호주는 2001년 아프간전 발발 이후 20년간 총 3만9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다.

ps ; 호주 연방경찰은 2026년 4월 7일 스미스(48)가 2009∼2012년 아프간전 참전 당시 현지 민간인 여러 명의 불법 살해 사건과 관련해 5건의 전쟁범죄에 따른 살인 혐의로 체포, 기소했다. 그는 유죄가 입증될 경우 최대 종신형을 받게 된다.

고승우
북마크
184 2026.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