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5
248
1
< 역사서사시 - 한미관계 150년>
독일이 항복하고 석 달이
지난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한 우라늄 폭탄이
약 580미터 상공에서 폭발해
도시 인구의 약 39%를 소멸시켰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주저하자
이틀 뒤인 8월 9일 일본 나가사키에
플루토늄 폭탄이 투하되어
약 7만 명이 즉시 사망했다.
같은 날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다.
소련군은 160만 보병, 2만 7천 문의 대포
5,600대의 탱크, 3,700대의 전투기를 이끌고
만주벌로 진군했다
관동군 100만은 그 적수가 되지 못하고
종이호랑이처럼 무너져 내렸다
일본군의 탱크 400대는 소련의 철갑 앞에
어린아이 장난감처럼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소련의 군대가 움직인 그 날
트루먼은 일기에 썼다
"스탈린이 마침내 움직였다.
우리도 서둘러야 한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탄이 투하되면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되었다.
항복을 주저한 일본을 향한 최후통첩인가.
나치 군을 궤멸시킨 세계 최강
소련을 향한 무언의 견제인가.
강대국들이 앞 다퉈 연구하던
원자탄을 미국이 개발한 것에
세계열강은 주목했다.
일본, 독일도 다 이 무기를 만들면 세계를
지배할 거라면 열을 냈지만
미국이 과실을 맨 먼저 딴 것이다.
무력이 국력이고 그것이 승패를 가리는 세계는
미국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원자폭탄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면서
국가 간의 관계도 이전과 달라졌다.
미국은 원자탄을 인류 최초로 발명해
세계 최강의 위치에 올라선 것이다.
소련은 절대적 군사력을 과시한
미국의 요구에 순응했다.
8월 10일, 소련은 미국이 제시한
‘북위38도선’제안을
두 말 없이 받아드렸다.
원자탄이 동북아에서
소련의 한반도 전체, 일본 진격을 막고
한반도는 두 동강이 나버렸다.
민족의 동의도 없이 강대국 둘이
조선의 허리를 단칼에 잘라낸 것이다.
서울과 남쪽의 1,600만 영혼은
자본주의 장막 안으로,
평양과 북쪽의 900만 삶은
사회주의 깃발 아래로.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이념국가들에게 장악됐다.
1945년 8월 9일 한반도 북부에 진입한
소련군은 웅기·나진·청진을 거쳐,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8월 21일 원산을 점령한 뒤 8월 26일 평양에 입성했다."
평양에 들어선 소련군을 맞이한 것은
일본군이 아니라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인민위원회였다
소련군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1945년 10월 3일 공식 출범한 소비에트 민정청은
이듬해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될 때까지 활동했다.
이들은 전면에 조선인 행정 기구를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배후에서 북한 지역을 통제하는
간접군정 체제를 구축했다.
9월 19일, 원산항에 한 배가 들어왔다
66명의 조선인 붉은군대 장교와 함께
젊은 게릴라 지휘관이 내렸다
그의 이름은 김일성
소련군은 그를 영웅으로 소개했다
"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점령군으로 상륙했다
성조기를 앞세운 존 하지 중장은
일제의 마지막 총독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그는 미 정부의 지시를 집행했다
"조선인의 어떤 자치기구도 인정하지 말라"
"일본인 관리와 일제에 협력한 조선인을 고용하라"
하지 중장의 첫 번째 과제는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었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 40만 일본인의 송환
그리고 1천 명의 일본인 기술자를
미군정에 잔류시키는 일 이었다.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는 명분 아래
일본인 관리들은 그 자리를 지켰다
조선인은 여전히 2등이었고
일제의 잔재는 미군정하에서 현실 이었다
일본에 부역했던 친일파가 득세했다
조선인들은 분노했다
"일본의 앞잡이가 다시 권력을 잡다니"
"해방이 이렇게 무색할 수 있나"
그러나 미군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행정의 편의를 위해, 반공의 보루를 위해
친일파는 용서받았고, 되레 새로운 권력이 되었다
민족정기는 짓밟혔고, 정의는 빛을 잃었다
한반도 남북에 진주한 두 국가의 정책은 달랐다.
소련은 조선인의 자생적 기구를 인정했다
조만식의 인민위원회와 함께 일하는 형식을 취했고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실행했다
미국은 조선인의 자치기구를 불허했다
일본인 관리와 친일파를 복귀시켰고
민족정기를 짓밟았다
북에서는 사회주의 식 혁명이 진행되었고
남에서는 반공국가가 세워졌다.
김일성은 항일영웅으로 호명되었고
이승만은 미국의 후원 속에 권력을 세웠다.
그렇게 한민족은
두 개의 체제로 갈라졌다.
한쪽은 혁명의 이름으로,
다른 한쪽은 자유의 이름으로.
그러나 그 두 이름 아래
공통으로 흐르던 것은
외세의 전략과 냉전의 공포였다.
남한에 온 미 군정은 1945년 11월
미군사고문단(KMAG)을 만들었다.
40보병사단 미군 장교 18명이 차출돼
남한 각 도에 조선인 치안경찰대를 조직했다.
조선인 경찰대 인력을 선발하는
기준이 있었다.
“일본군 장교 출신을 우대한다.
광복군, 독립군 출신은 근대적 기준에 미달한다.”
그 기준을 만든 자들은 미국인이었다.
그 기준을 집행한 자들은
일본군 장교 출신 이종찬, 백선엽 등이었다.
미군정이 만든 군사영어학교가 열렸다.
조선인을 미국식 군대로 양성하는 곳이었다.
처음 학교에 들어간 자들은 영어 회화가 가능한
일본군 장교 출신이었다.
이종찬, 백선엽, 그리고 수많은 친일파
일본 육사 출신이 특혜를 받았다.
영어학교 학생 선발을 시작했을 때
광복군 출신은 배제되었다
미군정은 말했다
"광복군 출신은 미국식 규율에 맞지 않는다"
그것은 변명에 불과했다
진짜 이유는 충성도, 즉 친미 성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 주인이 된 미국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꼬리를 흔들었지만
광복군 출신은 그렇지 않았다.
영어학교를 졸업한 자들이
미군에게서 권력의 완장을 받았다.
군사영어학교는 친일의 온실이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사냥하던 자들이
해방된 나라의 군복을 입었다.
노덕술, 하판락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를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들이
해방 후 미 군정의 배려로 경찰복을 입고
민중 앞에 나타났다
조선인을 짓밟던 일제의 개들은
해방정국의 공무원으로 변신했다.
미군정은 이들을 비호했다.
친일 경찰 청산을 주장한 경찰 간부를 파면했다.
1946년 대구 사건이 터지고
일제 경찰 청산 목소리가 높아져도
미군정은 수용을 거부했다.
미 군정청 조선인 2만 5천 명의 경찰.
그 중 일제경찰 출신이 5천 명.
전체의 20%.
그리고 광복군 출신은 몇 명이었는가.
달랑 열다섯 명.
열다섯.
567명의 광복군 유공자 중에서
단 15명만이 경찰이 될 수 있었다
이 사실은 2018년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이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한다.
해방된 나라의 경찰이
누구의 나라를 지키는 경찰인지를.
왜 미국은 일본의 식민통치 잔재를 부활시켰을까
미국은 왜 미군정을 통해 독립군 출신을 배제하고
친일파를 우대했을까.
육군 최고사령관 1946년부터 1968년까지
초대 참모총장.
2대 참모총장. 3대. 4대....
18대까지.
모두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거나
미군정의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한 명의 예외도 없었다.
1946년부터 1968년까지.
22년.
독립군 출신이 한국군을 이끈 적이 없었다.
만주 벌판에서 총을 든 자들이
자신의 나라 군대를 지휘한 적이 없었다.
오늘날 군 일각에서 말한다.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라고.
미군 주둔을 통한 군사적 의존이 안보라고.
이것은 미군사고문단에 의해 의식화된 결과다.
22년 동안 군 최고사령관 옆에 앉아
자문하고 조언하고 지휘한 자들의 유산이다.
1945년 11월, 미군정은 국방사령부를 세웠다
그 아래 경무국과 군무국
그리고 미군사고문단(KMAG)이 들어섰다
처음에는 미군 장교 2명, 사병 4명
형식은 "자문", 내용은 "지휘"
고문단은 군사영어학교 입학생이나
조선인 경찰의 선발을 지휘했다.
해방정국에서 남한의 지배계급을 만들었다.
군사고문단은 조선인 국방경비대 5만 명 구성을 지휘했다.
조선인 병력 3개 여단 사령부 창설은 물론
서울, 대전, 부산 등에서 현지 부대를 관리했다
미군사고문단의 지위는 특별했다
외교관 면책 특권, 치외법권
그들은 한국의 법 적용을 받지 않았다
한국인은 그들을 제재하거나 심판할 수 없었다.
남한에서 미군은 점령군과 다를 바 없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미군이 그 자리를 채웠다.
KMAG의 초대 단장 윌리엄 로버츠 준장
그는 한국군과의 관계에 대해 확고한 원칙을 가졌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라"
"매일의 업무를 공유하라"
"부대원을 함께 점검하라"
로버츠는 자신의 별도 사무실을 제외하고
모든 고문관들을 한국군 지휘관 옆에 배치했다
그 결과, 미군 장교는 한국군의 모든 작전을 지켜보았다
모든 결정에 개입했고, 모든 현장에 함께했다
제주 4.3의 현장에도
여순의 산골짜기에도
대전교도소의 비극에도
그들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 국방부 장관 옆에 앉았다.
참모총장 옆에 앉았다.
대대장 옆에 앉았다.
별도의 사무실이 없었다.
한국군 지휘관이 가는 곳에 항상 동행했다.
그것이 로버트 장군의 원칙이었다.
무기를 공급하는 자가 갑이었다.
무기를 받는 자가 을이었다.
이것이 한미관계의 본질이었다.
그 갑이 을과 함께 간 곳이 있었다.
제주도였다.
여순이었다.
대전이었다.
제주 4·3이 터질 때
미군 대위가 현지 경찰의 책임자였다.
두 대의 정찰기와 소해정 두 척이 있었다.
미군사고문단 소속원들이 현장에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학살 현장의 사진을.
미국 정부에 보낼 보고용이었다.
1945년에서 1949년까지
2만에서 3만 명이 제주에서 죽었다.
미국은 '반란군과 동조자들이 살해됐다'고 보고했다.
1948년 내 작전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했다.
여순에서 민간인 2천 명이 죽었을 때
한국군 각 부대 옆에 미군사고문단이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이동에 동원됐다.
미국은 말했다.
우리는 기록했을 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기를 준 자가 책임이 없는가.
지휘관 옆에서 자문한 자가 책임이 없는가.
갑이 을에게 일임했다는 것이
갑의 면죄부가 되는가.
1948년 4월 3일, 제주도는 피에 물들었다
미군 대위가 책임자로 있던 부대가
남한 경찰을 통해 진압을 지휘했다
미군은 정찰기 2대, 소해정 2대를 동원했다
산악지대 마을 전체가 사라졌다
미군은 "성공적인 작전"이라고 평가했다
제주의 푸른 바다는 4·3의 피로 물들었다.
미군 로버츠 준장이 작전을 지휘하고
미군사고문단은 현장 사진을 찍었다.
여순에서도, 대전교도소에서도
미군사고문단은 한국군과 함께했다
"자문"이라는 이름의 지휘, "갑"과 "을"의 관계
치외법권의 외교관들이 한국의 군경을 쥐락펴락했다.
제주 4.3의 학살 현장에
여순의 피 묻은 골짜기에
대전교도소의 어둠 속에
KMAG의 장교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진을 찍었다.
미소 짓는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민간인의 시신 사이에 서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 사진들은 지금도 존재한다
미국 국방부 기록실에
대학 도서관 아카이브에
인터넷 데이터베이스에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개입하지 않았다"
"단지 지켜보고 보고했을 뿐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말한다
"제주 4.3 사태는 미군정 치하에서 발생했다"
"1948년 8월까지 미군 대위가 치안대 책임자였다"
"미군정과 KMAG의 책임이다"
그러나 책임은 누가 지는가
미국 정부는 침묵한다
한국 정부도 침묵한다
가해자는 기억하지 않고
피해자만 기억한다
1948년 10월, 전남 여수·순천
반란 진압 과정에서 2천여 명의 민간인 사망
한국군 부대마다 미군 장교가 있었다
미군 항공기가 병력 수송에 동원되었다
"자문"이 아니라 "참전"이었다
미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미군사고문단의 지원을 받아
한국군은 민간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다
로버츠 준장이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미소 짓는 미군 장교들 사이로
제주도민의 시신이 보인다
마틴 하트-란즈버그는 기록했다
"미군은 진압 전 과정을 통제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미국은 입을 다물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한국 정부가 출범한 뒤
미군 7만 명의 철수가 시작되어
1949년 6월 철수 완료했다.
그러나 500명의 KMAG가 남아
미군 지배는 계속되었다
미군 철수 후, KMAG의 행정감독권과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은
무초 주한미국대사에게 있었다
맥아더 장군조차 KMAG에 대한 지휘권이 없었다.
그러나 로버츠 장군은 있었다
한국군 참모총장이 가는 곳마다 로버츠가 있었다
그는 그림자였고, 그림자는 주인이었다
6·25 전쟁 후 KMAG 인력은 대폭 증원되었다.
1951년 12월 800명에서 1,800명으로 늘어났고,
그런 과정에서 한국군은 1953년
20개 사단, 60만 명 규모로 성장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주한미군의 한국 주둔이
권리(right)로 규정된 후,
KMAG는 합동군사고문단(JUSMAG-K) 체제로 개편되었다.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이 주한미군사령관이 장악한
한미 연합 지휘 체제의 틀 안에서,
한국군은 주한미군에 예속된 상태로
70 여년을 지내고 있다.
KMAG이 미국익을 위해 맹활약을 하면서
한국군 지휘부의 영혼과 기백은 USA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 초대부터 18대까지
모두 일본 육사 출신이거나
미군정 군사영어학교 출신이었다
이응준, 손원일, 정일권, 백선엽
그들의 과거는 일제의 장교였고
그들의 현재는 미군의 협력자였다
오늘날 한국군 일각에서 들리는 주장
"자주국방보다 한미동맹이 최상이다"
그것은 KMAG가 심어준 의식의 결과였다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슬은 여전히 채워져 있었다
이승만은 집권 초 예속적인 한미동맹과
분단을 고착시키는 국가보안법으로
민주주의를 짓밟았다.
이승만은 일제 잔재 청산을 차단하는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집권 2개월 후인 1948년 10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이승만의 발악이 시작되었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는 민중의 함성
그러나 그 함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벌에 완강히 반대했다
"국가가 분열된다"는 이유로
그는 반민특위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경찰은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했다
반민특위를 주도하던 국회 소장파 의원 13명이
남로당 프락치로 체포됐다.
백범 김구 선생이 암살됐다.
안두희의 총탄이 그 가슴을 뚫었다.
안두희는 주한미군 방첩대(CIC)의 정보원이었다.
미국의 어둠 속에서 방아쇠를 당겼다.
특위는 업무 개시 8개월 만에 무너졌다.
1951년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폐지됐다.
친일파를 처벌할 법이 사라졌다.
반민특위 구성 두 달 만인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일제의 치안유지법과 거의 같은 내용이었다.
독립운동을 처벌하던 법의 후예가
이제 통일을 처벌했다.
단죄받아야 할 친일세력이
반공주의자로 탈바꿈했다.
국보법이 그들의 보호막이 됐다.
관동군 헌병 출신 김창룡이
멸공전선의 제1인자라는 호칭을 받았다.
이승만의 총애를 받았다.
2016년, 뉴스타파가 폭로했다
친일 인사 222명이 해방 후 440여 건의 훈장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훈장을 받은 친일파 48명이
대한민국에서 다시 훈장을 받았다
가장 악질적인 친일 경찰 노덕술까지
그의 가슴에는 대한민국의 훈장이 빛나고 있었다
해방은 그들에게 심판이 아니라
두 번째 맞이한 영광이었다.
일본의 지배는 끝났지만
친일파의 지배는 여전했다
그들은 미군정의 보호 아래
더 강력해졌고, 더 교묘해졌다
그들은 반공주의자로 변신했다
"빨갱이 사냥"을 외치며
민중을 탄압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감췄다
일본에게 받은 훈장을 감추고
대한민국에게 새 훈장을 받았다
그들의 가슴은 훈장으로 가득했지만
그들의 양심은 텅 비어 있었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강이 흘러 오늘까지 이어진다.
1945년 8월의 결정이
2026년에도 살아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만든 군대의 문화가
자주국방보다 동맹을 우선시하는 신앙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국보법은 아직 살아있다.
78년의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통일을 처벌하고
분단을 고착시키는 장치로 작동한다.
반민특위가 해체된 나라.
친일파가 훈장을 받은 나라.
독립군 출신이 열다섯 명만 경찰이 된 나라.
그 나라 위에 우리가 살고 있다.
그 구조 위에 한미동맹이 올라앉아 있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바꾸는 자의 것이다.
구조가 지속되면 비극이 반복된다.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 구조의 이름은
친일과 미군정이 합작해 만든
분단 체제다.
국보법과 한미동맹이 함께 지탱하는
주권 반쪽짜리 나라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이
역사를 제대로 쓰는 첫 걸음이다.
그리고 그 첫 걸음이
진정한 해방의 시작이다.
드리는 말씀
이 연재는 한반도 근현대사 서사시는 미국 국무부 비밀해제 문서, FRUS(미국 외교관계 문서), 맥아더 점령 관련 역사 기록, CIA 비밀해제 자료 등을 토대로 작성됐다. 한미근현대사는 주로 국내에서 보고 들은 것을 중심으로 엮어져 미국 워싱턴 정부의 동북아 전략과 그 속의 한반도 정책이라는 설명이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미국의 존재는 엷어지고 남남, 남북 갈등이 주로 소개되었다. 이는 정사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미 행정부의 정책이 생략되는 근현대사는 역사바로잡기가 요구된다. 이 서사시 연재는 그런 시도의 하나이다. 역사는 360도 전 방위에서 살피는 자세로 기술되어야 한다. 생략과, 침묵 심지어 허위 속에 숨겨진 진실을 읽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위한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