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부탁이 있다.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거둬주길 바란다. 나는 어디서건 살아남을 테니까. 학교 기숙사를 신축하느라 내가 파헤쳐진다는 소문이 있다더군. 그래서 날 걱정한다는 걸 안다.설혹 둥치가 잘리고 뿌리가 파헤쳐진들 어떤가. 열매와 잎은 약재로 쓰임이 있겠지. 가장이는 바둑판이 되어 어느 심심한 아비의 벗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널빤지로 잘려
- 조현숙(대구)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는 시선을 거둬주길 바란다. 나는 어디서건 살아남을 테니까. 학교 기숙사를 신축하느라 내가 파헤쳐진다는 소문이 있다더군. 그래서 날 걱정한다는 걸 안다.설혹 둥치가 잘리고 뿌리가 파헤쳐진들 어떤가. 열매와 잎은 약재로 쓰임이 있겠지. 가장이는 바둑판이 되어 어느 심심한 아비의 벗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널빤지로 잘려
요즘은 종일 잠을 잔다. 형과 누나가 들어오면 잠시 애교 좀 떨어주어 간식을 받아먹고는 산책하러 나갈 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가물가물 꿈속으로 들어간다.형과 누나가 결혼하면서 시골에 사는 집사의 곁을 떠나 내가 서울로 온 지 벌써 3년이 되었다. 형과 누나가 결혼했다고 해서 근친혼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형과 누나는 성씨 자체가 달라 혼인에 아무런 제약이 없
시간의 여신이 자정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을 때 긴 여행에서 돌아왔다. 짙은 어둠을 뚫고 버스는 달려 내가 사는 도시에 내려놓고 바람처럼 다시 어둠 속으로 달려가 버렸다. 검은 입 속으로 사라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쳐다보며 나는 한동안 차가운 바람이 부는 황량한 밤거리에 혼자 서 있었다. 모두가 잠든 깊은 밤거리에 혼자 서 있으니 꾹꾹 눌러 가슴에 묻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 하늘엔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고요한 하루의 시작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아파트 앞 황톳길은 벌써 맨발로 걷는 사람들과 운동하는 이들로 활기가 넘쳤다. 그들 사이로 나는 경보하듯 빠르게 걸었다. 수영, 이 작은 시작이 오늘을 조금 더 다르게 만들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수영을
나이가 들어 가면서 내 가슴속에 남아 있는 고향을 한 번 생각해 본다. 고향을 떠난 지 어연 50년. 그러다 보니 내가 태어난 고향보다 현재 살고 있는 곳(서울)에서 더 많이 거주하면서 지방에 내려갔다가 서울에 오면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한 마음이 든다.고향을 떠난 1970년대엔 고향이라는 주요 노랫가사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때는 산업시대의 시작으로
만나고 헤어짐이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라고 하지만, 헤어짐은 늘 익숙하지 않다. 정들었던 사람이 다른 곳으로 이사해서 못 보게 되어도 아쉽고 허전한데, 하물며 가까운 사람이 다시는 볼 수 없는 생의 반대편으로 떠나간다면 그 이별은 슬픔이 겹겹이 쌓인 고통임을 말해 무엇할까.새해가 되어 시댁에 인사하러 갔다 작은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얘기를 듣고 시댁에서 한
떡 두 덩이가 든 가방을 메고 논두렁길을 걷는다. 쌀밥 한 번 실컷 먹는 것이 소원이던 시대를 건너온 나에게는 이보다 더 배부르고 흐뭇한 순간이 있을까. 한데 황금물결을 이루어야 할 들판이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잘라 놓은 시루떡처럼 반듯반듯한 논에는 벼 대신 잔디가 자란다. 마을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라 일손이 부족하고 쌀 수요도 점점 줄어 대체 작물로 잔디
내 나이 종심이다. 불혹을 넘긴 자식들이 있어도 가끔 어스름한 저녁이 되면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 서글퍼진다. 고향 옛집을 지도 앱으로 찾아서 도시계획으로 바뀐 도로와 길목을 옛 모습으로 복원하며 추억의 장소를 찾아 헤맸다. 사라진 건물도 많은데 50년도 더 된 고향 이층집이 건재하고 그곳 아래층은 약국과 약재상이 들어서 있다. 앞집은 일본 양
잿빛 구름이 드리운 11월. 목화밭으로 향한다. 가을걷이도 마무리된 들녘을 바라본다. 읍내 쪽으로 뻗어 나간 길 끝을 보며 땅바닥에 퍼져 앉았다. 설움이 목구멍을 타 넘어 오는가 싶더니 어느새 절규로 변했다. 언니야! 언니야! 그 절규가 허공이 삼켜 버렸다.불과 몇 시간 전 언니는 빨강 치마 노랑 저고리를 입고 할아버지를 대동하고 울며 차에 올라 시집을 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고 하였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하고 섬세한 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인공지능(AI)이 세상을 주도해 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손은 앞으로 어떤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타인과 악수를 나눌 때 우리는 손의 촉감으로 상대방과 교감을 느끼고 관계를 형성한다. 손은 사람이 세상과 관계를 맺는 가장 직접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