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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의 눈물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민식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8월 67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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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나 뵈려고 잠깐 누님 댁에 들렀더니, 누님은 보이지 않고 그 녀석이 한쪽 손에 책을 펴든 채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워 있었다.
마루 밑에서 졸고 있던 누렁이가 인기척에 힐끗 쳐다보더니 무작정 짖어 대기 시작한다. 오다가다 제게 뼈다귀 던져 준 것만 해도 한 트럭은 족히 될 텐데, 아직도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고 나를 보고 으르렁거린다.
누렁이 소리에 책에서 눈을 뗀 그 녀석이 나를 발견하고는, 슬리퍼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환호성을 지르며 마당으로 달려 나왔다. 의외의 격한 반응에 한동안 뻘쭘하게 그 녀석을 바라보다가 마루에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저기…,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그 녀석이 펭귄처럼 우스꽝스러운 걸음걸이로 다가오며 환하게 웃는다.
“됐네, 괜찮다면 물이나 한 컵 주게.”
“오, 예!”
그 녀석이 무엇이 그리 신이 나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연신 호들갑을 떨었다. 지난달 처음 만났을 때 얼떨결에 겸상하고, 두어 시간 손짓 발짓으로 환담하다가 헤어진 게 전부인데, 벌써 오래된 친구처럼 그 녀석의 과장된 몸짓이 전혀 낯설지 않다.
갑자기 그 녀석을 보면 어릴 때 내 모습이 보인다고 누님이 혼자 넋두리하듯 내뱉던 말이 생각났다. ‘엉덩이가 닮았나?’ 나는 그 녀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녀석이 방으로 들어가 달그락거리더니 유리컵에 물이 넘치도록 따라 쟁반에 받쳐 들고 싱글벙글 걸어온다.
“그래, 공부는 잘되는가?”
“어려워요.”
내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그 녀석의 입에서 괴로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하기야 한평생을 이 땅에서 살아온 나도 오천 년 유구한 우리 역사를 알기가 어려운데, 유학생이 우리나라 역사를 이해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깐깐한 임 교수 밑에서 수학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 녀석 고생문이 훤하구나’ 생각은 했지만, 그 녀석의 해쓱한 모습을 보니 생각보다 훨씬 더 힘이 드는 모양이다.
마치 동물원에 온 아이처럼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연신 내 모습을 훑어보는 그 녀석의 눈길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는커녕 오히려 살갑게 느껴진다.
무언가 그 녀석과 대화를 이어 보려고 소재거리를 찾아보지만,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고 마땅한 소재도 없고…, 이제나저제나 누님 올 때만 기다리며 유리컵만 들었다 놓았다 하며 아까운 시간을 죽였다.
하루 종일 꽁무니를 따라다니던 태양이 어느새 밤나무 가지에 매달려 연신 서산 마루를 쳐다보며 하품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누님을 뵙기가 어려울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고 마당으로 내려섰다.
“더 놀다 가시면 안 돼요?”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그 녀석의 찐득한 목소리가 내 발길을 잡았다. 멈칫 돌아서서 물끄러미 그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구두를 벗고 아예 마루로 올라섰다.
한국에 유학 와 누님에게 하숙비를 보태 주니 고맙고, 발음이 시원찮은데도 꼬박꼬박 한국말을 하는 게 대견하다. 얼마나 외로우면 이제 겨우 안면 튼 나에게 더 놀다 가라고 하소연할까? 적선하는 셈 치고 오늘은 저 녀석 말동무나 돼 주어야겠다.
“우리 무얼 하고 놀까? 아니, 정식으로 통성명부터 하세. 난 정무식일세.”
내가 먼저 성명을 밝히고 손을 내밀었다.
“제 이름은…, 정창운입니다.”
그 녀석이 어눌하게 말을 마치고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그래? 자네도 정 씨구먼. 반갑네. 우리 같은 할아버지 자손일세.”
비록 교포이긴 하지만 같은 성씨라니까 왠지 모르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통성명하고 나니 대화를 이어 갈 마땅한 소재가 생각나지 않는다. 서로 어색한 얼굴로 마주하다가 이따금 눈이 마주치면 그저 계면쩍게 웃어 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어떻게 하든 내가 대화를 주도해 보려 했지만, 그 녀석이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물어볼 거 있어요.”
그 녀석이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말이 너무도 반가워 나는 안경을 고쳐 쓰고 그 녀석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선생님의 시집 읽었어요. 『그 뜨거운 여름밤의 아찔한 추억』.”
“그으래? 자네가 그 시집을 읽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저절로 입이 귀에 걸렸다.
지난해 일면식도 없는 이 사장의 도움으로 등단도 하고, 시집도 한 권 내서 나름 가슴이 뿌듯했는데, 한 해가 다 가도록 연락해 오는 친구 하나 없어서 의기소침해 있던 터였다. 미국에까지 내 시가 알려졌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절로 으쓱해졌다.
“내 시가 그렇게 유명해졌나. 어디에서 그 시집을 보았지?”
“임 교수님 서재에서요.”
그럼 그렇지. 마음속으로나마 잠시 앞서나간 나 자신이 머쓱해졌다. 출간되자마자 임 교수에게 제일 먼저 보냈는데 지금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다. 학창 시절부터 내가 쓴 시를 평가절하하던 대풍이었지만, 보내 준 성의를 생각해서 빈말이라도 시가 괜찮더라고 한마디 해 주기를 내심 기다렸는데….
시무룩한 내 표정을 살피던 그 녀석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 뜨거운 여름밤의 아찔한 추억」이란 시는, 제목부터 무언가 강렬한 메시지가 느껴져요.”
그 녀석이 한마디 툭 던지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 뜨거운 여름밤의 아찔한 추억’은 시의 제목이자 시집의 제목이었다. 언젠가 그녀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 몇 자 긁적였던 것인데, 이 사장이 습작 노트에서 용케 찾아내어 원고도 끼워 넣고, 시집의 제목도 아예 그걸로 바꾸어 버렸다. 뭔가 조금은 ‘선정적인 듯하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딱 맞는 제목’이라는 설명이었다.

 

「그 뜨거운 여름밤의 아찔한 추억」
온 세상이 태초의 적막처럼 숨을 죽일 때
그녀와 나의 심장은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밤새워 사랑을 속삭이던 그날
그녀의 하얀 날개는 흔적도 없이 재가 되고 말았다.
그날 밤 우리는 하나가 되어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지만
동녘이 밝아오자 그녀는 하늘로 날아가 버렸다.
그 뜨거운 여름밤 지글지글 불타는 열대야 속에서
온몸을 불살랐던 그녀는 천사였다.
천사는 지금 내 곁에 없지만
천사를 향한 내 마음은 현재진행형

 

“이 시에 나오는 그녀는 실존 인물인가요?”
그 녀석이 어렵게 질문을 마치고 의미심장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글쎄…. 실존 인물일 수도 있고…, 상상 속의 그녀일 수도 있고….”
가슴속 깊이 묻어 놓았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르며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선생님은 아직도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녀가 돌아와 주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 같아요.”
그 녀석이 내 가슴을 헤집어 보기라도 하는 듯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자넨 문학을 전공했어야 하는 건데…, 사실은 말일세. 그녀는 내게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주고 내 곁을 떠나간 여인이지. 그래! 수십 년이 흘렀지만 난 아직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어. 그녀가 말없이 내 곁을 떠났듯이 말없이 돌아와 주기를….”
나도 모르게 그 녀석에게 속마음을 고백하고 나니, 그녀와의 추억들이 한꺼번에 와르르 밀려왔다. 그 녀석이 무언가 확인하려는 듯 내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나는 그 녀석의 눈길을 외면하고 넋 나간 사람처럼 그저 멍하니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 녀석이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선생님! 혹시 그녀가…, 이미애 씨인가요?”
“자네 지금…, 이미애라고 했는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 심장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끓어올랐다.
“네. 이, 미, 애, 씨요.”
그 녀석이 바위에 글씨를 조각하듯 한 글자씩 또박또박 이미애를 부르짖었다.
“자네가 어떻게…, 그 이름을 알아?”
그 녀석의 어깨를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댔다. 살아야겠기에 그녀를 잊으려고 가슴 깊이 파묻어 버렸는데…. 갑자기 호흡이 가빠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그 녀석이 겁먹은 얼굴로 내 어깨를 흔들었다.
“물 좀….”
속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녀석이 물컵을 입에 대주었다. 지나간 추억들이 머리를 스쳐 가며 뜨거운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녀석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갑자기 임 교수의 얼굴이 떠오르며 불같이 화가 났다. 이 세상에서 그녀의 이름을 아는 건 오직 나와 대풍이뿐인데….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그 녀석을 노려보았다. 멈칫거리던 그 녀석이 옆자리에 올라탔다.
연구실에서 무열왕에 대한 자료를 검토 중이던 임 교수가 씩씩거리며 들어서는 나를 보고 잔뜩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너, 이 자식!”
다짜고짜 임 교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어, 어, 이 사람. 또 무슨 일인데 이렇게 흥분하고 그래. 여긴 내 연구실이야. 제자들도 있는데, 내 체면도 생각해 줘야지.”
임 교수가 나를 달랬다. 자료 정리를 도와주던 서너 명의 학생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감정을 추스르고 의자에 주저앉았다. 임 교수가 학생들을 내보내고 녹차를 내왔다.
“성질머리는 아직도 여전하구먼. 언제 철이 날래? 이젠 성질 죽일 때도 되지 않았어?”
임 교수가 내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눈알을 굴렸다. 문밖에서 엉거주춤 서 있던 그 녀석이 문을 빠끔히 열고 안을 기웃거렸다.
“어서 와. 자넨 어쩐 일로?”
그 녀석이 주춤주춤 들어서며 임 교수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임 교수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거두절미하고…, 네가 저 애한테 미애 얘기했지?”
“그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야? 미애 얘기를 저 애한테 하다니…?”
임 교수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네가 저 학생한테 미애 얘기를 지껄였잖아?”
“미친놈! 미애 씨 얘기만 나오면 돌아버리는 너를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데, 내가 두 자리냐? 미애 얘기를 꺼내게.”
임 교수가 내 말을 단칼에 싹둑 잘라 버렸다.
“자네 분명…, 임 교수 서재에서 그 책을 보았다고 했지?”
당황스러운 얼굴로 옆에 서 있는 그 녀석을 다그쳤다.
“아…, 네.”
모든 걸 체념한 듯 겨우 대답을 마친 그 녀석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세상에서 그녀의 이름을 아는 건 너와 나 둘뿐인데 이래도 발뺌할 셈이야?”
임 교수의 멱살을 다시 틀어쥐고 면상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임 교수가 얼굴을 감싸 안았다.
“너, 이 자식! 주둥아리 함부로 놀리지 마. 두 번 다시 미애 얘기했다간….”
임 교수와 그 녀석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탔다. 임 교수가 두루마리 휴지로 입술을 닦으며 달려 나와 내 팔을 잡았지만, 임 교수를 뿌리치고 차를 몰았다. 집에 도착하여 일찍 자리에 누웠으나,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임 교수한테서 여러 번 전화가 왔지만 나는 받지 않았다. 임 교수의 표정으로 봐서 괜스레 엉뚱한 곳에 화풀이한 것 같아서 임 교수 얼굴을 보기가 쑥스러웠다. 더구나 아무리 죽마고우라고는 하지만 제자들 면전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그나저나 그 녀석은 도대체 어떻게 그녀의 이름을 알았을까?
어느덧 한여름이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른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면서 해수욕장이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다. 임 교수를 만나 술 한잔했다.
“야, 날도 더운데 해외여행이나 다녀오자.”
임 교수가 뜬금없이 해외여행 얘기를 꺼냈다.
“누구랑?”
“우리 둘이 가면 되지. 옛날 배낭여행 생각하면서.”
“제수씨나 데리고 다녀와라. 난 우리나라가 좋다.”
사실 친구들이 해외여행 얘기를 꺼낼 때마다, 그래도 한 번쯤 비행기 타고 세계 일주해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람이 산다는 게 그리 한가하지 않았다.
모처럼 임 교수와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학창 시절엔 거의 붙어 지냈는데 결혼하고 각자 일이 있다 보니 둘이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임 교수의 전화 한 통이 내 환상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임 교수의 꽁무니를 따라, 일주일간 미국 여행을 다녀온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는데, 나 혼자 비행기를 타고 미국 땅에 간다고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았다. 당장 내일 출발해야 하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내가 그 녀석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 마땅한 명분이 없었다. 임 교수가 왕복 비행기표를 두 장 보내왔으니 함께 가자고 꼬드기는 바람에, 공짜 구경 한 번 하려고 얼떨결에 오케이 했어도 뒷맛은 개운치 않았다.
이튿날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만일을 위해 인터넷을 뒤지며, 해외여행에 관한 정보를 찾느라고 밤샘해서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겨우 비행기 탑승을 마치고 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지금쯤 하늘을 날고 있겠지?”
비행기가 이륙하자마자 카톡 카톡 하더니 문자메시지가 날아왔다. 
“다녀와서 보자구.”
나는 대거리할 기운도 없어 건조하게 답글을 달았다.
“이 사람 공짜로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왜 그렇게 풀이 죽었어? 함께 가지 못해 미안하네. 아무튼 여행 잘 다녀와. 나 대신 대부 노릇도 제대로 하고….”
“뭐? 대부? 그게 뭔데?”
“창운 군이 ‘아빠 노릇 좀 해달라’고 내게 특별히 부탁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영화 보면…. 별거 아냐. 창운이 모친 옆에서 진짜 남편처럼 다정하게 앉아 있으면 되는 거야. 모친이 꽤 미인이라고 하던데 실수하지 말고.”
임 교수가 차분한 목소리로 당부했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빠가 없다는 얘기도 처음이고, 출국 하루 전에 펑크 낸 것도 그렇고, 그런 부탁이 있었다면 진작 떠벌이고도 남을 사람인데….
문자를 주고받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설핏 도착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트랩을 내려오자, 그 녀석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녀석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답답했던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승용차로 한 시간여를 달리다가 주택 지역으로 들어섰다. 그 녀석이 백미러를 힐끗거리는 걸 보니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신기했지만 그걸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다. 임 교수가 했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코리아타운의 아담한 이층집 앞에서 차가 멈췄다.
“어서 오세요.”
대문을 들어서자, 긴 치마와 민소매 차림의 중년 여인이 어린 소녀처럼 수줍어하며 고개를 까딱했다.
“어머니세요.”
그 녀석이 어머니를 소개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늘 보아 온 사람처럼 외모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정무식이라 합니다.”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앞장서서 정원을 가로질러 거실로 들어섰다. 그녀의 성격을 말해 주듯 거실은 깔끔하고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거실만 봐서는 여기가 타국 땅이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어서 오시게.”
소파에 앉아 있던 사나이가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다. 대머리인 듯 이마 위에서 불빛이 반짝했다.
“반갑습니다. 정무식이라 합니다.”
미국인과 마주치면 어떻게 인사할까? 내심 긴장해 있다가 한국말을 듣자 너무도 반가워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그래, 없을 무(無) 자에 알 식(識) 자가 아닌, 무성할 무(茂) 자에 알 식(識) 자를 쓰는 정 시인이지?”
그 사람의 입에서 내 단골 멘트가 흘러나와 깜짝 놀랐다. 정확히 나를 아는 것을 보면 분명 나도 아는 사람일 텐데…, 뿔테안경을 고쳐 쓰며 상대방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이 사람, 이거….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으면 안경 하나 바꿀 것이지, 잘 뵈지도 않는 안경 뭣 하러 쓰고 다녀?”
사나이가 섭섭하다는 듯 헛기침을 연신 해댔다.
“예? 죄송합니다. 제가 워낙 눈이 안 좋아서…, 절 잘 아시는 분 같은데…?”
“이 사람 이거, 아주 들이받는구먼. 나야! 이형식이…, 문성출판사.”
내가 다가서자 사나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니, 이 사장님이 어떻게 여길….”
나는 너무도 반가워 엉거주춤한 자세로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생질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왔네. 그러는 자네는?”
“그럼, 창운이가….”
나는 이 사장과 창운이를 번갈아 쳐다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네, 외삼촌이세요.”
창운이가 싱글벙글했다.
이 사장은 무명이었던 나를 등단시켜 주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은인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이 사장이 왜 나를 그토록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는지 아직도 수수께끼였다.
“이리 와, 한잔 받아.”
이 사장이 술잔을 내밀었다.
“아, 네.”
내가 잽싸게 술잔을 받아들었다. 이 사장과 창운이가 가족 관계라는 사실이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아직 시차 적응도 안 됐을 텐데 술부터 마시면 어떡해요.”
사모님이 주방에서 과일 접시를 들고 나오며 눈인사했다.
“사모님도 오셨군요. 세상이 좁다더니…. 만리타국에서 사장님 내외분을 뵐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내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꾸벅했다.
“그러게요. 이런 기막힌 인연이 있을 줄은 나도 몰랐습니다.”
사모님이 만면에 웃음을 띠고 과일 접시를 내려놓았다.
“네 어머니는 뭐 하고 있냐? 오매불망하던 서방이 왔는데….”
이 사장이 주방 쪽을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아니 이 사장님! 무슨 그런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을….”
이 사장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어쩔 수 없이 결혼식 때 대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서방이라니…. 행여 그녀가 들을까 봐 벌떡 일어나 입막음했다.
“왜? 손 하나 까딱 않다가 이제 와 서방 노릇하려니까 양심 찔리나?”
이 사장이 정색하고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사장님!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저는 그저, 임 교수의 부탁을 받고….”
“맞아요. 외삼촌! 식사 준비가 다 된 것 같아요. 먼저 식사부터 하시고 난 후에 천천히….”
창운이가 내 앞을 가로막고 이 사장을 잡아끌었다. 창운이의 안내로 모두 식탁에 둘러앉았다. 나는 이 사장이 왜 그런 경솔한 말을 했는지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식사 내내 이 사장의 눈치를 살피며 퍼즐을 맞추듯 추리해 보았지만, 손톱만 한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식사가 끝나고 다과가 나왔다. 모두 입을 굳게 닫은 채 말이 없었다. 마치 폭풍전야처럼 사방이 조용했다.
“네 엄마 좀 나오라고 해라.”
이 사장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네.”
창운이가 짧게 대답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창운이가 그녀와 함께 거실로 돌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도무지 자네를 용서할 수 없네. 어떻게 인두겁을 쓰고 삼십여 년이 넘도록….”
“오라버니! 그분은 아무것도 몰라요. 모두가 제 잘못이니 제발….”
“그래요. 외삼촌. 아버지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직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이 이 사람 저 사람의 입에서 떠돌아다녔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훑어보며 눈만 껌뻑거렸다. 대화 내용으로 봐서 그 중심에 내가 있는 것 같은데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뿐이었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모두 진정하시고, 차근차근 얘기를….”
“자넨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이 사장이 내 말을 뚝 자르고 들어와서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동안 은인으로 생각하던 이 사장이 도대체 왜 나를 그렇게 적대시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여보! 좀 진정하세요.”
보다 못한 사모님이 끼어들었다.
“정 시인님! 자세히 보세요. 정말 저 사람을 모르겠어요?”
사모님이 손가락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무슨 말씀인지…, 저는 창운 군의 모친을 오늘 처음 뵈었는데….”
내가 멀뚱한 얼굴로 사모님을 쳐다보았다.
“에라이! 이제 와 오리발을 내밀어? 이 벼락을 맞을 인간아!”
이 사장이 나에게 찻잔을 집어던졌다. 어이쿠! 나는 피할 겨를도 없이 이마에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피가 솟구쳐 올랐다.
“아이고, 이를 어째!”
사모님이 비명을 지르며 내 이마를 수건으로 감쌌다. 그녀가 비상약을 가져와 지혈하고, 연고를 바른 뒤 붕대를 감았다.
“병원에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사모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괜찮습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이마가 쓰리고 아팠지만, 그보다는 평소 은인으로 알고 존경하던 이 사장이 왜 나한테 갑자기 그런 무례한 행동을 했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오라버니는 아직도 그 괄괄한 성격을 못 버리고…,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이렇게 무지막지하게….”
그녀가 내 이마를 어루만지며 이 사장을 힐난했다.
“왜 잘못이 없어? 제 새끼를 낳은 너를 처음 본다니…, 아무리 발뺌한다고 해도 그걸 변명이라고….”
이 사장이 분이 안 풀리는지 아직도 씩씩거렸다.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며 갑자기 꽁무니를 뺀 임 교수가 이륙 후 문자메시지로 킬킬거릴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공짜 비행기 한번 타려다가 이마까지 터지고, 나는 억울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해서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찢어진 이마가 욱신욱신 쑤셔왔다.
“이것 좀 보세요.”
창운이가 사진 한 장을 들고 와 내 앞에 들이댔다.
화이바를 쓰고 카키복을 입고 두 손을 양다리에 붙이고…. 얼핏 보아도 잔뜩 기합이 들어 있는 졸병 사진이었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군복이 무척 낯이 익었다. 천천히 사진을 들고 초점을 맞추려고 밀었다 당겼다 반복하며 이마를 찌푸렸다. 창운이가 초조한 얼굴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했다.
‘군복이 무척 낯이 익은데…. 우리 부대도 이런 군복이었거든…. 이럴 줄 알았으면 돋보기를 가져올걸….’
내가 중얼거리며 눈을 비볐다.
“잠깐만요. 돋보기 가져다드릴게요.”
창운이가 벌떡 일어서더니 후다닥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돋보기를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안경을 벗고 돋보기를 걸쳤다.
“어떠세요? 잘 보이세요?”
“그래. 이제 좀 보이네.”
약간 어지럽긴 했지만, 점차 선명하게 보였다. 반짝반짝 광이 나는 화이바며 칼날처럼 시퍼렇게 날이 서 있는 바지, 옷 구김을 방지하기 위해 바지 끝에 넣었던 링 자국, 화이바 정중앙에 선명히 쓰여 있는 ‘헌병’이란 두 글자, 그리고…. 내 시선이 군인의 얼굴에 꽂혔다.
창운이 내 얼굴을 마주 보며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내 시선이 다시 사진 속으로 옮겨 갔다. 왼쪽 가슴에 붙어 있는 까만 바탕에 하얀 글씨로 또렷하게 새겨진 ‘정무식’이란 세 글자, 내 이름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사진을 들어 뒷면을 돌려 보았다.
‘사랑하는 나의 천사에게. 1990. 8. 12.’
글씨가 바래긴 했지만, 분명 내가 헤어질 때 그녀에게 준 사진이었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이 사진을 가지고 있나?”
내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그 사진은…, 제 어머니인 이미애 씨가 준 것입니다.”
창운이가 나를 바라보며 큰소리로 울부짖었다.
“아니…, 그럼 저 여인이?”
창운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시에 실패한 나는 진학을 포기하고 입대를 결정했다.
한 달 후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6주간의 기본 교육을 받았다. 모든 걸 잊고 오직 훈련에만 매달렸다. 이따금 그녀 생각이 났지만, 그녀를 잊기로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그 지겨웠던 후반기 교육도 끝나고 수경사로 배치받았다. 첫 임무는 검문소 근무였다. 다행히 근무가 수월한 도봉 분초로 파견 근무를 나갔다.
이십 시 근무를 마치고 초소에 돌아오니 뜻밖에도 미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내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경찰서 보호실에서 나와 미친놈처럼 그녀를 찾아 헤맸던 날들이 떠올랐다. 영원히 함께하자던 그녀가 한마디 말도 없이 그렇게 쉽게 내 곁을 떠나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쩌면 그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지 않고는 도저히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정 일병, 애인인가?”
“네, 그렇습니다.”
잠깐 망설이던 내가 큰 소리로 소리쳤다. 상황 근무하던 엄 병장이 다음 근무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며 외출을 허락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여서 딱히 갈 만한 곳도 없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무작정 개울을 따라 올라갔다. 점점 초소에서 멀어지며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녀가 당장이라도 엎어질 듯 비틀거렸다.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해가 진 지 오래였지만 일주일째 계속된 열대야 때문에 골짜기는 찜통처럼 뜨거웠다. 그녀가 내 목을 끌어안고 숨을 헐떡였다. 산모퉁이를 돌아서서 그녀를 안은 채 백사장에 널브러졌다.
“도대체 한마디 말도 없이 왜?”
내가 눈물을 흘리며 몸부림치자, 그녀가 마치 갓난아이에게 젖을 먹이듯 내 얼굴을 가슴에 묻었다. 그녀의 상긋한 살냄새가 내 가슴을 뜨겁게 달궜다. 그녀의 뜨거운 입술이 내 입술을 찾았다.
격정적인 순간이 지나고 우리는 백사장에 누워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하늘의 별을 세어 보다가 눈길이 마주치면 다시 뒤엉켜 버렸다. 동녘이 훤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 짧은 만남 이후 영원히 사라져 버린 그녀!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평생 가슴 깊이 묻었던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있다니…. 내가 비틀거리며 일어서자, 창운이가 달려와 부축했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당신이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내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 무정한 사람아!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편지 한 장 없이…, 나는 당신이 죽은 줄만 알고….”
내가 가슴을 치며 오열했다. 갑자기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창운이가 잽싸게 나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혔다. 사력을 다해 속주머니에서 알약을 꺼내 입속에 털어 넣었다. 창운이가 물컵을 가져와 입에 대주었다.
그녀가 이불을 덮어 주고 손발을 주물렀다. 식은땀이 흐르며 연신 몸이 떨렸다. 창운이가 물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았다. 한참 만에 안정을 찾은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정말 미안해요. 얼떨결에 임신한 걸 알고 겁이 나서 엄마를 찾아 이곳에 왔는데…, 창운이를 낳고 우물쭈물하다가 당신한테 연락도 못 하고…, 이곳에 눌러앉고 말았어요.”
“그럼, 저 녀석이?”
그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창운이가 나를 끌어안고 어깨를 들썩였다.
“아비 노릇도 못하고…, 너한테 정말 미안하구나.”
나는 창운이를 끌어안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창운이의 결혼식이 끝나고 단둘이 남았다. 세월의 벽이 빙하처럼 쌓여 있어 모든 게 어색했다. 하지만 그 빙하는 뙤약볕에 버려진 얼음조각처럼 한순간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샤워하고 나오자, 그녀가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빛 가운을 걸친 그녀는 아직도 아름다웠다. 통통하던 볼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얄팍해졌지만, 앵두빛 입술은 더욱 농염해 보였다. 그녀의 침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베개 두 개가 묘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녀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피식 웃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보조개는 여전히 나를 설레게 했다. 지난날 그녀의 볼우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가 떠오르면서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참으로 오랜만의 떨림이었다. 으스러지도록 그녀를 끌어안고 입을 포갰다.
“창운이를 가진 걸 알았을 때 한 번쯤은 내게….”
“그때 난 너무도 당황해서…, 당장 당신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당신은 군 복무 중이었어요. 계모는 나에게 관심조차 없고, 아버지는 무섭기만 하고, 배는 점점 불러오고…, 엄마를 찾아 무작정 이곳으로 왔는데, 그냥 눌러앉게 되었어요. 아이를 낳고 당신이 못 견디게 그리웠지만…, 아이를 핑계로 당신을 구속하기 싫었고, 그보다도 엄마의 삶을 보면서 한 남자의 아내로 산다는 게…, 자신이 없었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녀를 살며시 감싸 안았다.
“몇 년 전, 그렇게 매정했던 오빠가 나를 찾아왔어요. 오빠를 통해 당신을 수소문했고, 당신이 아직도 문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오빠에게 당신을 소개했어요.”
이 사장에 관한 수수께끼가 단번에 풀려버렸다.
“창운이가 유학을 핑계로 아빠를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을 알고, 임 교수를 찾아가라고 얘기해 줬어요. 누님이 하숙집을 운영한다는 것도 얘기해 줬고….”
그녀가 내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날이 밝았다. 심장에 박혀 있던 비수가 목에 가시가 되어 따끔거렸다. 침대에 널브러져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모든 게 꿈만 같았다.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고 볼을 비볐다. 그녀가 살며시 눈을 뜨더니 내 품을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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