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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어떤 기억은 흩어진다. 어떤 기억은 강하게 남는다. 기억이 사라지고 남는 건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계속 남고, 어떤 기억은 고이 담아두려 해도 사라진다. 나에겐 소중한 어떤 기억이 있다. 너무 소중한 나머지 사라질까 두렵고, 또 너무 소중한 나머지 영영 사라지지 않을까 두렵다. 사라지는 것은 곧 잊는 것이고, 사라지지 않는 것은

  • 도남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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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씨앗을 심는 일

출발 하루 전, 마음이 들떴는지 잠이 쉬 오지 않는다. 새벽녘까지 뒤척이다 비몽사몽 일어나 시간 맞춰 공항으로 나간다. 대한불교 조계종 민족공동체 추진본부장 태효 스님을 비롯해 회원들 60명과 떠나는 3박 4일의 평화 순례길로 백두산 및 북중 접경지역을 도는 일이다.선 그은 복잡한 세상과 다르게 하늘길은 맑고 환하게 열려 있다. 하얼빈 공항에 도착해 곧바로

  • 강향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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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울타리

오빠가 울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삼십 년 전 오빠는 학교가 끝나면 또래들과 함께 소꼴을 먹이러 산으로 갔다. 해 질 무렵이면 배가 불뚝해진 소가 먼저 마당에 들어서고 그 뒤에 칡넝쿨을 짊어진 오빠가 따라 들어왔다. 그날은 소는 안 보이고, 오빠가 훌쩍이며 마당에 서 있었다. 엄마는 소는 어디 있냐고 오빠를 닦달했다.그제야 오빠는 소를 풀이 많은 근처 나무에

  • 이순미(성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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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그날의 기억

조카의 결혼식이 있는 날이다. 예약한 미장원을 가기 위해 경의중앙선 지하철을 탔다. 코스모스가 가냘프게 손을 흔들면서 철길에 가을이 온다. 좋은 일로 만날 친족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맑은 하늘을 본다. 응봉역에 도착하니 가끔씩 오는 안전안내문자가 핸드폰에 ‘띵’하며 떴다.‘영등포구 한○화 씨(여, 66세)를 찾습니다. 160cm 53kg, 꽃무늬 원피스’.둘

  • 한명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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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벚꽃을 싫어한 사람과 벚꽃이 싫어하는 것

봄이 다가온다. 지난해 봄 어느 주말 전국이 핑크로 물들었을 때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가도 핑크빛 벚꽃이 만개했다. 유모차의 애기부터 지팡이를 짚은 어르신까지 벚꽃이 핀 곳이면 어디든 꽃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만개한 벚꽃은 몸과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풀기에 딱 맞는 치료제인 것 같다. 꽃 속에 파묻히니 영혼까지 깨끗해지고 아름

  • 장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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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인생을 안다고 착각하지 마라

초등학교 1학년 손녀가 “할아버지는 잘난 척한다”고 말한다. 가감 없이 잘 따라주고 소소한 기쁨과 행복만 담아준 귀여운 손녀를 한참 동안 쳐다봤다. 철부지 어린이라고 생각했지만, 주관이 뚜렷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버릇없다고 말해야 할지 앞뒤 감정이 뒤섞여 침묵을 지켰다. 손주와 내 생각이 착각의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순간이다.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듣고 말문

  • 임병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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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묻히다

눈치껏 건너던 길에 새 신호등이 생겼다. 반가워 한발 다가섰더니 “위험하니 한 발짝 물러서세요”하고 소리를 낸다. 깜짝 놀라 빨간 선 뒤로 물러섰다. 그 후에도 좌우를 살피고 조심해서 건너라, 다음 신호를 받으라 한다. 요즘은 길을 건너는 일조차 소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주변을 둘러보면 다양한 소리들이 촘촘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 집 안에서는 밥솥이 조

  • 정옥순(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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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다가갈수록 더 멀어지네

민족의 비극인 6·25를 겪으면서 나라를 지키려고 싸운 젊은이들의 희생은 영원히 우리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이른바 전후세대(베이비붐 세대)의 출생률이 높아져서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하였다.나라는 피폐해지고 생활 수준이 비참하여 오히려 북한의 경제력이 남한을 추월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 최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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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봄의 산고

봄은 산고(産苦) 중이다. 지난가을 구절초가 만개하던 개울가 언덕배기에는 녹지 않은 싸락눈이 군데군데 자리를 지킬 뿐, 모든 게 황량하고 삭막하다. 공허만이 대지를 움켜쥐고 주위를 서성인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얇은 살얼음으로 뒤덮인 틈새를 비집고 튕겨 나온 은빛 물살의 조잘거림과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단숨에 넘지 못해 헉헉대며 용케도 빠져나온 삭풍의 소리뿐이

  • 장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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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2 672호 1978 성황당 나무와 나

비가 온다. 온통 녹색 하늘이던 마당 위에 그리움을 잡아먹는 소낙비 내려, 꽁치 한 마리 은박지에 돌돌 말아 봄부터 잠자던 난로를 깨워 불을 지피고 막걸리 한 잔을 입에 넣고 꽁치 비릿한 내음으로 안주 삼아 기억의 강을 곱씹어 본다.어느 마을이든 초입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우린 성황당 나무라 부르고 나의 할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당연히 언제

  • 전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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