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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히다

한국문인협회 로고 정옥순(양천)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2월 6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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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껏 건너던 길에 새 신호등이 생겼다. 반가워 한발 다가섰더니 “위험하니 한 발짝 물러서세요”하고 소리를 낸다. 깜짝 놀라 빨간 선 뒤로 물러섰다. 그 후에도 좌우를 살피고 조심해서 건너라, 다음 신호를 받으라 한다. 요즘은 길을 건너는 일조차 소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주변을 둘러보면 다양한 소리들이 촘촘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다. 집 안에서는 밥솥이 조용히 김을 내뿜고 청소기의 윙윙거림이 공기를 흔들며 TV와 냉장고 그리고 휴대전화까지 저마다의 목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차에 오르면 내비게이션이 길을 안내하고 버스나 지하철에서는 문턱을 넘기도 전에 수많은 정보들이 내 머릿속을 메운다. 모든 소리가 나를 보호하고 안내하려는 것임을 알지만 마치 비상벨이 끝없이 울리는 것처럼 마음을 금세 지치게 한다. 쉼 없이 흘러나오는 소리 사이에서 문득 세상이 나를 조용히 억누르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온다.

TV 화면 속 풍경이 온통 하얗다. 강원도의 작은 마을이 폭설에 묻혔다. 집들도 길도 들판도 하얀 눈에 잠겨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경계가 사라진 세상은 한없이 평화로워 보인다. 그러나 각자의 형태는 잃어버렸다. 쌓인 눈 속에서 집의 생김새는 어렴풋이 알겠는데 집 앞에 있는 둥글고 모호한 형태가 궁금했다. 자동차란다. 사람들이 삽으로 눈을 걷어내고 있었다. 차에 상처가 날까 봐 손길이 조심스럽다. 어떤 종류의 차일까? 단순한 승용차일 수도 있고 거친 길을 달리는 SUV일 수도 있다. 아니면 마을 사람들을 함께 실어 나르던 승합차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것은 단지 눈 속에 묻혀 있는 무언가일 뿐이다. 자동차가 답답함을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얼어붙은 깊은 눈 속에서 ‘나를 꺼내 달라’고 간절히 외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자동차는 스스로의 목소리를 낼 수 없어 더 답답하고 간절할지 모른다. 문득 눈 속에 묻힌 자동차와 나 자신이 겹쳐 보였다. 나 또한 무엇인가에 묻혀 있는 것은 아닐까?

일상에서 소리가 눈처럼 흩날렸다. 때로는 목화솜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함박눈이 되어 나를 감싸기도 했고 갑작스레 싸락눈처럼 날카롭게 변해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있었다. 소나기눈처럼 거칠게 쏟아지기도 하고 포슬눈처럼 가늘고 성기게 흩어지기도 했으리라. 어떤 날은 가루눈처럼 가볍게 내려앉기도 했지만, 또 어떤 땐 진눈깨비가 되어 나를 온통 적셔 버렸다. 하지만 나를 덮어오는 소리를 막아낼 방법을 알지 못했다. 세상의 한가운데서 모든 소리를 묵묵히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말이 눈처럼 쌓여 내 목소리를 덮어 버린 지 오래라는 사실을.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인공적인 소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짙은 사람들의 소리다.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옭아매고 있다. 권력을 쥔 자들의 거침없는 큰소리, 넘볼 수 없는 부를 가진 이들의 갑질하는 소리, 우월감에 취한 이들의 자랑질 소리가 무거운 돌처럼 내 머리를 누르고 몸을 가두었다. 나는 그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 단순히 곁을 떠도는 소리가 아니라 내가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돌아보면 내 삶은 늘 남의 소리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음식을 시킬 때도, 말을 할 때도, 심지어 내 삶의 큰 결정을 내릴 때조차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떠올렸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었고 칭찬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노력했다. 좋든 싫든 열심히 했고, 예의 바른 사람이 되어야 했고 늘 성실하고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런 삶이 정답인 줄 알았다. 그러다 보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타인의 소리에 반응하는 껍질일 뿐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그들의 목소리가 요구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의 소리에 덮여 본래의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가만히 나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원하니?’

한참을 생각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 작고 희미했다. 마치 눈 속에 파묻힌 자동차처럼 소리에 묻힌 나도 구해 달라고 외치고 싶다. 하지만 내 절규를 들어줄 누군가가 있을까?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소리의 눈은 이제 얼음처럼 단단해져 있다. 방금 내린 눈을 삽으로 퍼내듯 쉽게 치워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느낀다. 세월이 만들어낸 두터운 것은 무리하게 깨뜨리면 안 된다. 안에서부터 조용히 녹여내야만 하리라. 그렇게 해야 나라는 존재가 온전한 모습으로 다시 피어날 수 있다. 결국 나를 구할 사람은 나 자신이다. 겉으로 보이는 나가 아니라 내 안에 숨겨진 진짜 나를 돌아보고 찾아야 한다. 마치 긴 겨울 동안 얼어붙었던 땅을 뚫고 나오는 작은 새싹처럼 내 안에 따뜻함을 길러야만 단단한 껍질을 뚫을 힘도 생길 것이다.

세상에 특별한 삶이란 없다. 우리 모두 비슷한 길을 걸으며 살아간다. 삶이란 결국 나 자신과 함께 걸어가는 여정이다. 하루하루 내딛는 작은 걸음, 또 한 번의 시도가 쌓여 언젠가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순간이 오겠지. 앞으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리라. 나의 소리를 찾아가는 작은 여정이 결국 나만의 특별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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