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1월 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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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울고 있는 아이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느 누가 모르는 척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석봉리에 있는 석달마을 골짜기에는 ‘이름 없는 아기 혼들’이라는 위령비가 있다. 시를 읽을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무슨 연유로 아기를 달래고 있을까?
석달마을로 가는 날이다. 도로에는 짙은 안개로 가득하다. 짧게는 십 미터, 길게는 이십 미터로 시야 확보가 어렵다. 차량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였다. 감곡을 지나자 해가 잡아먹힐 정도로 안개는 더 짙게 깔렸다. 아침 햇살을 잃은 해는 달이 되었다. 귀신이라도 나타날 듯한 어두운 그믐날처럼 보름달 같은 해가 고속도로 끝에 걸렸다. 달리는 차는 흐릿한 아침 해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이다. 충주에 이르자 해가 다시 기운을 차리고 강렬한 자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충주휴게소에 도착하자 해는 다시 달이 되었다.
위령제 장소까지는 아직도 한 시간은 더 가야 한다. 오늘은 문경 석달 사건 현장에서 위령제가 있는 날이다. 지난달 아버지 면회를 내려왔을 때 작은아재를 만났다. 아재는 몇 해 전부터 문경 양민 학살 사건 위령제 행사를 맡아 매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이번에는 행사 준비할 사람이 부족하다는 말에 도와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행사 사회를 부탁하셨다. 날이 날이라 그런지 가는 길이 순조롭지 않았다.
남들은 가을 단풍놀이와 연말 송년회로 들떠 있지만, 이즈음이 되면 늘 마음이 무겁다. 찬 바람이 불면 시린 손 호호 불고 있는 아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작년부터 가을로 행사를 옮겼다. 오곡이 무르익고 가을 들판이 붉게 물들어 가는 따스한 계절이다. 행사장 오른쪽으로 발갛게 익은 사과를 바라보니 그날의 피비린내가 기억 속을 헤집는 것 같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1949년 12월 24일 정오쯤에 석달마을에서 양민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유아 5명과 12세 미만 어린이 26명 등 주민 86명이 학살되고 집 24채를 불태운 사건이다. 처음에는 공비에 의한 사건으로 처리했다가 57년 만에 국군에 의한 민간 학살로 진실이 바로잡힌 사건이다.
사건 현장 산자락에는 ‘이름 없는 아기 혼들’이라는 영혼을 달래는 위령시비가 만들어졌다. 그 이후 문경 양민 학살 어린이 위령비가 만들어졌다. 나머지 어른들의 위령비는 없다. 아이들만 이곳을 지키고 있나 싶어 그날의 아픈 사건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위령비 앞 공터에서 위령제가 시작됐다. 차분하게 진행되던 위령제가 끝나고 유족회 추모사로 이어지면서 목소리가 커졌다. 양민 학살 사건과 관련된 처우 개선을 요구한다. 사건 현장의 관리 문제 개선과 잘못된 역사 반복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정부와 지역 주민이 함께하는 길만이 죽은 아기들의 영혼을 달래주는 길이라고 외쳤다.
위령제가 끝나고 만난 사건 현장 산너머에 사는 이장을 만났다. 이장은 사건 이야기는 대충 들었는데 어린 아기까지, 그리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는 몰랐다고 했다. 그동안 모르고 있었고 오늘 처음 참석했다고 한다. 바로 옆 동네에서도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갓 태어난 아기와 한 살, 두 살 된 아기가 울고 있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십이월 끝자락에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퍼지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누가 아기의 울음을 멈추게 할 것인가? 문경 석달 사건, 거창 사건, 노근리 사건과 같은 양민 학살 사건의 진실 규명이 제대로 되기를 바라면서 ‘이름 없는 아기 혼들’을 다시 읽어본다.
산 넘어 넓은 세상 머물 곳 찾아
구천 떠도는 어매 아배 기다리며
석달마을 산모퉁이에
이름 없는 아기 혼들 울고 있다
아가들아 아가들아
이름 없는 아가들아
피 묻은 아배 조바위 쓰고
눈물 젖은 어매 고무신 신고
그 옛날 이야기 말해주렴
지나가는 길손이 발 멈추거든
아가들아 아가들아 오늘 밤은
어매 품에 안겨 아배 등에 업혀
백토로 사라지기 전 그 옛날처럼
좋은 세상 꿈꾸며 잠들어라 (류춘도)
좌측으로 넘어가는 석양은 가을 단풍보다 더 수줍은 모습이다. 아침에 집어삼켰던 차를 토해내듯 도로는 또다시 차로 만원이다. 가다 서다 반복하는 고속도로에서 문득 위령제에서 유족회 회원의 추도글 낭독 모습이 떠올랐다. 추도글을 준비하였는데 만감이 교차하여 더 읽을 수가 없다며 한참을 울먹였다.
오늘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다. 때로는 골방에 묵혀둔 잠든 괘종시계가 부러울 때가 있다. 시간을 거슬러 그 시간을 찾는다. 빛바랜 책장을 펼치니 다시금 떠오르는 그때의 이야기.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의견으로 충돌하는 사람과 집단들. 그때마다 문경 사건이 떠오른다. 서로가 조금씩 배려하고 약간의 빈틈을 보여준다면 하는 아쉬움도 생긴다. 후회보다는 몸에 밴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지혜를 기대해 본다.
올해도 아기의 울음을 달래주기 위해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암울했던 시간의 보상이 되는 한 줄기 빛이 있기를 바란다. 다시는 이런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