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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孝宗)의 눈물

한국문인협회 로고 조영자(양평)

책 제목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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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대총(伐大聰)이 효종을 울렸다.”
요즘 역사 기록을 찾아가 보며, 거란과의 전쟁 드라마도 들여다보며 실록을 맞춤해 본다. 드라마가 허상이라지만 여기저기 골수를 찾아내 즐겁게 이어보는 것도 내 마음의 쾌거다.
강화읍 갑곶나루는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나루터다. 조선시대 강화에서 한양(서울)을 오가던 길목이며, 정묘호란(1627년) 때 인조가 건너왔던 나루이고, 병자호란(1636년) 때에 봉림대군 효종이 건너다니던 격전지였다. 병인양요(1866년) 때에는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진입했다. 1970년 강화대교가 개통되면서 완전히 폐쇄되었다.
그 옛날 강화에는 목장이 많았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양도면(良道面)에 있는 진강목장(鎭江牧場)은 유명했다. 양도초등학교 뒤 진강산(鎭江山) 남쪽 숲에 샘터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산 바위에 벌대총 말발굽 자국을 뚜렷하게 남겨 놓았다 한다.
옛적에 초상이 나면 이 샘에서 명마(名馬)가 났었다고 말한다. 장사(壯士)가 나면 명마가 생겨났다고 하는데, 당시 조선 17대 효종께서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귀국 후, 우암 송시열(宋時烈) 등과 함께 북벌을 은밀히 계획하면서 때와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화도는 외성(外城), 중성(中城), 내성(內城)과 진(鎭), 보(堡), 돈대(墩臺)를 설치하려는 보수 계획이 있어 효종이 강화로 왕림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뱃사공이 지금의 김포 대명포구를 건너 초지대 양천 펄로 배가 들어오면 벌대총 명마는 허리를 늘리며, 앞다리를 쭈욱 뻗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 꼬리는 하늘 향해 추켜세우고, 괴상한 울음소리로 사공에게 인사를 하니 너무 신기하여 마음이 흔들렸다.
영리한 사공은 명마에게 물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고 싶으냐?”
명마는 앞다리를 버둥버둥 추켜들고 고개를 좌우로 끄덕끄덕 흔들어 ‘애 해 해 행 애 해 해 해’ 괴상한 울음소리로 답했다. 나루터에 배가 도착하자 말은 잽싸게 내려 왕을 모시려고 따가닥 따가닥 따가닥 한양으로 달렸다.
명마는 효종을 사랑했다. 효종의 참모가 된 말은 목을 길게 빼 귀를 열어 놓고 왕을 기다렸다. 한양에서 양천으로 수차 강을 건너오는 왕의 행차를 잘 알아서 왕을 태우고 강화로 들어오고 떠나가실 때 모셔 가곤 하여 상감께서 이 명마에게 벌대총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셨다.
이는 곧 북벌을 계획한 상감의 뜻을 이루고자 명마에게 주신 이름으로 생각한다. 벌대총 명마를 타고 효종이 청나라 심양(瀋陽)을 공격하면서 내가 겪은 고초를 그들의 태자에게도 반드시 맛보게 하리라는 굳은 결심을 하셨다.
하지만 그러한 뜻을 하늘이 거역했는지, 그 어느 날 왕을 모시고 갔다가 진강목장으로 돌아오던 중, 양천(陽川) 땅에 이르렀는데 갑자기 벌대총 명마가 진강 양천 펄에 빠지면서 3일 동안 기절하여 누워 있었다. 양천 펄을 지키는 군수의 마음도 외면하고, 그는 회복을 못한 채, 하늘의 뜻에는 명마 벌대총도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굴복하여 죽고 말았다.
모든 사실을 상감께 숨길 수도 알릴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에 이르렀다. 알리고 나면 함흥차사 격이 될까? 두려워 멈추고 있다가, 끝내는 언제까지 숨길 수만 없는 일이고 죽은 벌대총 위신도 지켜주기 위해 고을 사또는 상감을 찾아뵙고 아뢰기를 ‘불식이 삼일 와이불기삼일(不食二三日臥二不其三日)’이라고 아뢰었더니 효종은 매우 놀라며 “그러하면 총이 죽었더란 말이냐?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하늘의 무심함을 슬퍼하며 나의 명마 벌대총을 죽게 하시다니!” 한탄하였다. 효종은 장대비가 쏟아져 내리듯이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져온다.
효종은 1619년 7월 3일(음력 광해군 11년 5월 22일) 출생했다. 후에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659년 6월 23일(향년 39세, 음력 효종 10년 5월 4일) 젊은 청년의 나이로 승하하시니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운명이요 하늘의 뜻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하늘이 주는 운명 앞에는 누구도 두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현재도 흔히 말하기를 ‘양천 펄에서 죽은 말 지키듯’ 한다고 말들을 한다. 벌대총을 일명 용마라고도 부르며 말이 태어난 그곳에는 샘물이 그치지 않고 넘쳐흘렀다는데, 지금은 샘이 마르고 억새만 무성하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란 어렵다. 그 샘터는 말이 태어난 우물이라고 말하며 흐르는 그 개울물이 용천 내라고 말한다.
초지대교에서 바라보는 진강산에 구름이 길게 걸쳐 있다. 전등사 방향으로 차를 달리다 보니 넓은 벌판에 푸른 벼꽃들은 서로 모습을 자랑하듯 이글거리고 있다. 벌대총이 뛰어다니던 벌판이 아니었을까?
읍내로 가는 길 끝에는 통제영학당이 있던 갑곶리다. 1893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해군 교육기관이다. 현재의 해군사관학교의 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효종이 나라를 굳건하게 하려는 의지와 맞물린다. 나는 벌대총 명마가 태어났다는 샘에서 나라에 동양이 될 말이 태어나기를 꿈꾼다.
안타깝게도 통제영학당은 일본의 압력으로 시행이 중지되며 문을 굳게 닫았다. 역사의 비극이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는 것이다. 역사를 망각해 버리면 우리나라 민족은 무의미하다.

*통제영학당: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61 소재.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 2001년 4월 2일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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