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문학
월간문학 2025년 12월 6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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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슬로의 비겔란 조각공원이다. 조용히 펼쳐진 200여 점의 조각품들이 마치 우리의 일상처럼 서 있다. 나는 이렇게 많은 조각상을 처음 본다. 차가운 돌덩이를 예술 작품으로 조각한 비겔란의 뜨거운 예술혼이 공원 곳곳에 흐르고 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 서로를 끌어안은 연인, 다투는 부부, 굽은 등으로 홀로 앉은 노인…. 인생의 시작과 끝을 보여주는 듯한 조각 작품들이 공원 곳곳을 채우고 있다. 청동과 화강암, 주철로 빚어진 인물들은 단단한 재료 속에서도 근육과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섬세하다.
<죽음과 어머니> 작품 앞에 서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아이를 품은 어머니는 끝까지 저항하고 있었다. 그 장면은 단순한 모성의 상징이라기보다, 어머니를 일찍 잃은 비겔란의 기억이 투영된 듯 보였다.
비겔란은 시골의 가난한 목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풍족하진 않았지만, 노동과 신앙이 중심이 된 환경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장인정신과 어머니의 따스한 손길은 어린 시절 비겔란의 정서적 바탕이었다. 그러나 열세 살 무렵 갑자기 어머니를 잃은 상실은 깊은 고독으로 남아, 훗날 그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죽음과 모성이 반복해서 모습을 드러낸다. 작품을 바라보는 동안, 어머니를 그리워하던 어린 내가 떠올라 오래 발길을 떼지 못했다. 어린 날 내 삶 속 그리움과 서늘했던 기억이 그의 조각상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가장 안전한 안식처이자 마음의 등불이다. 안식처 없이 자란 나는 비겔란의 사실적인 조각 속에 깃든 모성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랑과 희생을 어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조각상들 앞에 서 있으면, 그는 평생 어린 날의 상처와 대화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비겔란은 잠시 결혼의 인연을 맺었으나 오래 이어가지 못했고, 자식도 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평생을 홀로 지내며 오직 조각을 삶의 동반자로 삼았다. 그는 아버지의 섬세한 솜씨를 이어 받아, 그 우울을 작품 속에 녹여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사람의 따뜻한 온기를 대신해 차가운 돌과 쇠를 붙들고 씨름하던 그의 고독이 작품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화강암 기둥 앞에 섰다. 하늘을 향해 곧게 솟은 17.2m의 <모놀리텐>은 멀리서 볼 때는 하나의 거대한 돌기둥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서자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다. 그 기둥에는 수많은 인간의 몸이 얽히고설켜 하나의 장엄한 서사를 새겨 놓은 듯하다. 맨 아래에는 노인의 몸이 짓눌려 있고,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다. 누구나 인생 어느 시점에서 마주하게 되는 불가피한 모습이다. 이어지는 청년의 힘찬 근육, 노인의 깊은 주름, 기쁨과 슬픔, 사랑과 갈등이 기둥 곳곳에 새겨져 있다.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의지하며 때로는 짓누르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는 듯하다.
작가는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말년을 보내며 전쟁의 참상을 지켜봐야 했다. 전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겪는 처참한 삶을 121개의 인체를 통해 표현했다. 인간의 다양한 생애를 이 돌기둥에 압축해 놓은 것이다. 기둥 위로 오를수록 어린이가 많다. 삶의 무게와 고통을 모두 짊어진 인류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꼭대기에는 어린아이를 조각했다. 비겔란이 끝내 바라본 것은 새 생명, 바로 곧 희망이었을 것이다. 비극적인 삶의 단편들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행복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비겔란의 조각 작품 속에는 왜 모성, 품에 안긴 아이, 가족애, 인간 존재의 고독 같은 주제가 자리 잡았을까. 아마도 어린 시절 일찍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깊게 작용했으리라. 그 아픈 흔적들을 마주하다가 문득 내 첫 수필집을 떠올렸다. 첫 책을 세상에 내놓았을 때, 주위에서는 축하를 건넸지만 정작 내 마음은 울적했다. 수필집 전체에 비슷한 아픔이 흐르는 것 같아 스스로 자책하기도 했다. 좀 더 밝은 글을, 당당하고 멋있는 글을 쓸 수는 없었을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독자의 마음을 울적하게 만드는 걸까 하는 부끄러움도 몰려왔다. 그런데 이 조각공원의 작품들이 내게 속삭이는 듯하다.
“여기 있는 작품들이 곧 비겔란이다. 그의 생각과 아픔, 그리고 희망이 이 안에 담겨 있다.”
조각이 곧 작가이듯, 글 또한 곧 그 글을 쓴 사람이다. 그러니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계속 글을 쓰라고 말하는 것 같다. 행복했던 순간만이 소중한 것은 아니다. 고통스럽거나 고단했던 시간, 혹은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들조차 귀하다. 비겔란이 121개의 다양한 인체를 쌓아 올려 <모놀리텐>을 완성했듯,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지금의 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공원에서 단지 비겔란의 조각품을 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작품을 통해 내 안의 외로움과 연약함, 그리고 사랑을 들여다보았다. 작품 앞에서 지난 아픔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나는 다시 앞으로 걸어갈 힘을 얻었다.